'앗 살람 마리꿈!'


이라크는 폐허가 됐다. 약탈과 방화로 이성을 잃은 도시가 불러오는 슬픔은 1950년의 한반도와 오버랩 되며 가슴을 쥐어뜯게 한다. "기브 미 쪼꼬렛또". 이라크 어린이와 한국 어린이는 다르지 않으리라. 아프가니스탄도 마찬가지. 지금 아프간은 재건사업이 한창이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살아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앗 살람 마리꿈(안녕하세요)! 편집자주

전날 카불에 가서 산 공사도구를 챙겨 싣고 톱다라 마을에 갔습니다. 멀리 힌두쿠시의 연봉과 도로를 따라 병풍처럼 펼쳐진 산은 아직도 흰 눈으로 덮혀 있지만 길 위에는 이미 봄이 왔습니다. 겨우내 황량한 흙모래뿐이어서 도저히 구원할 길 없는 황무지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도처에 푸른 융단처럼 풀들이 돋아나는 것 아닙니까?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풀 하나 없이 흙과 돌 투성이의 사막이 아프간의 앞날처럼 사철 계속될 줄 알았는데, 이토록 수많은 생명이 아우성치며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것을 보니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톱다라로 올라가는 완만한 비탈은 며칠 새에 푸른 풀밭으로 변해 있었고, 조그맣고 노란 들꽃이 활짝 피어있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마음이 찡해질 정도였습니다. 이 들꽃이 아프간의 봄을 이끌고 온 것입니다.

톱다라에 사는 굴팟샤는 교사이자 23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민병대 대장입니다. 덩치도 크고 추진력이 돋보입니다. 외모는 50대로 보이는데 실제는 서른 여덟 살입니다. 얼굴이 좀 얽었지만 서글서글하고 박력 있는 사나이지요. 눈빛이 깊고 기품 있게 생긴 공사책임자 사이더커글은 8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올해 겨우 마흔 다섯살이랍니다. 세상에….그는 마흔 네 살인 나를 20대 청년으로 알았답니다. 이곳은 그렇습니다. 평균수명이 마흔 다섯 살. 전쟁과 가난 때문이지요.

아득한 절경을 뒤로 한 채 마을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을 어귀의 2km 쯤 되는 심한 비탈길이 평평하게 닦여져 있는 것입니다. 한 달 반 사이에 열 번이 넘게 톱다라 마을을 찾으면서 비탈길을 지날 때마다 차가 굴러 떨어질 것 같아 불안했었지요. 이제 이 마을에도 조금씩 변화가 이렇게 오려나 봅니다.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차에서 공사도구를 꺼내놓았습니다. 해머가 5개, 무거운 철근도 5개, 삽이 15개…. 그런데 조그만 아이가 당커를 들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우리 차가 동네에 들어서면 으레 뛰쳐나와 열렬히 손을 흔들며 ‘앗 살람 마리꿈’을 외쳐대는 수십 명의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름은 미르아가, 일곱 살입니다. 어른들이 오늘 학교를 짓는다고 해서 나왔답니다. 자기가 다닐 학교라서 도와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가슴이 꽉 차 올라 아이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랬구나. 나는 이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나르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학교를 짓는 데에만 신경을 썼을 뿐, 학교가 세워짐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올 변화에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이튿날 학교 터를 트랙터로 닦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장정 30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주(州)정부가 기증한 학교부지는 꽤 넓습니다. 이곳에 우리는 교실 12칸을 돌로 지을 예정입니다. 아래를 내려보면 정말 아찔한 장관입니다. 드넓은 광야가 펼쳐져 있고, 끝간데 없는 구름과 안개가 깔려 있고, 힌두쿠시의 하얀 연봉이 우뚝 솟아있는 겁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이 광경을 보면서 넓은 운동장을 힘차게 뛰어다닐 겁니다.

사막이, 사막이 아니었네

우리가 학교와 조그만 댐 건설을 지원하고 있는 톱다라 마을은 카불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습니다. 최근에 그 길을 지나다 끔찍한 사고를 목격했습니다. 타이어가 펑크나는 바람에 승합차 한 대가 길 옆에 박히면서 대전차지뢰가 터져 차에 탄 사람들이 즉사하고 차는 산산이 부서진 것입니다.

카불 북쪽 마자리 이 샤리프나 쿤두즈로 이어지는 길로 3시간만 더 가면 힌두쿠시를 넘는 깊은 산골 마을 살랑그가 나옵니다. 거기까지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힌두쿠시산맥 사이에 큰 분지가 펼쳐져 황량하고 신비로운 장관을 이룹니다. 그러나 대자연이 주는 벅찬 감동도 잠깐, 머리카락이 거꾸로 솟는 경험을 간간이 하게 됩니다. 넓은 분지에는 예전에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옛 소련군은 시야확보를 위해 나무를 모조리 베어냈다고 합니다. 그 때 위기를 넘긴 포도나무들은 탈레반 정권 때 모두 베어져나갔습니다. 미국의 폭격으로 마을과 시장들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번성했던 땅을 이렇게 철저하게 사막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23년 간의 전쟁 과정에서 대전차지뢰와 대인지뢰는 물론, 헬리콥터로 플라스틱 지뢰를 뿌려, 카불 시내에는 다리 없는 장애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전쟁으로 전투요원보다 민간인들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된 거지요. 지금은 대로에 지뢰를 제거한 표식인 흰 돌멩이가 늘어서 있고, 곳곳에는 아직도 지뢰지대임을 알리는 빨간 돌멩이가 놓여 있어 묘한 긴장이 감돌고 있습니다. 차리카르를 지나 빠르완주까지 이어지는 연도에는 부서진 탱크 수백 대가 녹슨 채 나뒹굴고 있습니다.

아프간의 하늘을 찌르는 서러운 한들

우리는 지난해 11월 겨울을 앞두고 구호물자를 나눠주기 위해 카불 근처의 빈민가를 조사하다가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여자들의 30%가 전쟁미망인들이었습니다. 남자들이 러시아 전쟁 때 폭격으로 죽고, 생화학전의 후유증으로 앓다 죽고, 이 때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도 내전 과정에서 어느 한쪽에 군인으로 불려가 죽고, 지뢰사고로 죽은 것이지요. 집들은 대부분 흙집이지만 그마저 거의 부서져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톱다라 마을도 비슷합니다. 800명의 주민 중 전쟁미망인이 80명이나 됩니다.

우리 단체의 아프간인 실무자인 모하메드 하심은 항상 장난기 넘치는 웃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서른 일곱 살의 남자입니다. 그의 고향은 카불 북쪽의 샤카르다라입니다. 샤카르(Shakar)는 설탕, 다라(dara)는 계곡이란 뜻인데, 이름 그대로 이곳은 포도 재배가 잘되고 물이 많은 풍요로운 계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열 다섯 살 때, 소련군의 공습으로 집이 완파되고 어머니와 여동생 3명이 죽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눈물을 뿌리며 고향을 버리고 파키스탄 페샤와르로 피난을 갔습니다. 20년 동안 객지를 떠돌며 신산스런 난민생활을 하다가 결혼하여 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작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감전사고와 백혈병으로 아이 둘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아프간에서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도 스스로를 한이 많은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아프간 사람들의 고단한 삶 속에 배어있는 눈물과 한을 이해하면 아프간 땅이 왜 이리도 모질고 척박한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지난해 12월 하심의 고향마을에서 작은 병원을 지어달라고 부탁해와 하심과 함께 샤카르다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도 20년만에야 가보는 고향이었습니다. 그의 집터에는 폭격으로 생긴 구덩이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들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추운 겨울 초라한 깃발만 날리고 있는 외로운 무덤가에 어른이 되어 돌아온 아들의 통곡소리만 메아리쳤습니다.

전쟁의 도시, 폐허의 도시, 카불

우리 사무실은 카불 시내 남쪽 카테세이에 있는데, 전 러시아대사관과 국립카불대학교 사이입니다. 카불대학교와 그 앞 동네는 카불 시내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서진 차량과 허물어진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카불대학교는 담도 없고 건물도 몇 개 없으며, 그나마 있는 건물들도 1만1000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합니다. 파괴된 건물의 외벽은 무수한 총탄 자국으로 흉측한 모습입니다. 아프간의 도처에 무덤이 많습니다. 그 많은 무덤들에 23년 전쟁의 한이 묻혀 있습니다.

아프간공항에 처음 내리는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진 비행기의 잔해들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공항 부근에 부서진 비행기 잔해들이 널려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시골역보다 못한 공항 청사를 나오면 아프간 민간항공사인 아리아나의 항공기 잔해들이 1km 쯤 즐비하게 쌓여 있습니다.

아프간의 NGO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을 비롯해 세계식량농업기구(FAO), 세계식량계획(WFP), 국제노동기구(ILO), 아프가니스탄 지원 미션(UNAMA), 유엔개발계획(UNDP), 유엔인간거주정착센터(UNCHS), 국제아동기금(UNICEF), 유엔여성개발기금(UNIFEM), 유엔연구사업사무소(UNOPS), 세계보건기구(WHO) 등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적 구호활동을 펴는 적십자 적신월사(The Red Cross/Red Crescent Movement)도 있습니다.

등록된 국제NGO가 250여 개, 국내NGO가 1200개 있습니다. 국제NGO들은 직접적인 재정지원이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하고, 소수의 외국 활동가들이 많은 현지인 스텝들을 써서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아프간 국내 NGO의 상당수는 국제NGO의 지원을 받아 일을 합니다. 단체 예산을 독자적으로 마련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국제NGO들도 계속 들어오고 있지만 국내NGO들도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되고 있습니다.

아프간 사람들은 대체로 NGO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정부 관계자들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NGO가 차지하고 있어 정부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행정 집중을 방해한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서구 선진국의 몇몇 NGO들은 자국 활동가들의 월급과 안전대책비용으로 막대한 금액을 쓰고 있어 빈축을 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NGO의 해외지원금을 아프간정부에 직접 내달라고 요구하는 공무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프간 정부가 임시정부인데다, 탈레반 동조세력이 아직 공직사회에 남아 있어 지원금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카불 시내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하고 있고, 칸다하르를 비롯한 남부에서는 교전이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카불에는 치안을 담당하는 국제안보지원군(Inte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이 있지만 모든 NGO 사무실은 최소 4명에서 많으면 수십 명의 현지인들이 지킵니다. 현지인 고용도 늘리고, 이들에게 NGO 활동경험을 쌓고 지도력을 훈련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원하고 있을까?

처음 아프간에 왔을 때 우리는 칸다하르의 난민캠프를 지원하려고 계획했습니다. 지난 겨울 약 25만 벌의 옷과 이불 등 긴급구호물품을 나눠주었습니다. 마을들은 대부분 농사지을 물은커녕 먹는 물 마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담아둘 수 있는 작은 저수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또 주민들은 초·중학교와 진료소, 어린이를 위한 급식과 의복 및 학용품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톱다라에 학교와 작은 댐을 지어주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의 사업 원칙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좀 빡빡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건설 자재를 제공하고 마을 사람들은 노동력을 제공하기로 애초에 약속했지만, 이들은 하루 일당을 원했습니다. 대부분의 NGO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일꾼으로 고용한 것이 아니며, 사업의 주체가 마을사람들임을 분명히 일깨워 줍니다. 이런 원칙을 받아들이는 마을만 사업을 착수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일하는 동안 식량의 부분 지원을 약속하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사업을 통해 마을 사람들의 주체성과 자발성, 협동정신을 이끌어내고 활력을 불어넣어 이후에도 스스로 공동체적 발전을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되도록이면 외래 기술과 자재는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우리의 지원금이 밖으로 흘러나가는 결과를 낳습니다. 마을의 전통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그 지역에서 나오는 자재와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사를 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이는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을 대상으로 10년 동안 활동을 편 경험에서 얻은 생생한 교훈으로, 자연과 공동체를 덜 파괴하는 생태적 개발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카르다라에도 학교와 작은 병원 설립, 다리 복구를 지원하고 여자들에게 재봉교육을 시킬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카피사주와 가즈니주에는 부서진 학교를 복구해주고 소형 댐을 지어주는 일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는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활동할 계획이었습니다. 다른 NGO들이 가지 않는 곳, 위험하더라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을 활동근거지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카불주 근처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카불에서 가까워 많은 NGO들이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반면 탈레반의 본거지인 칸다하르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사관과 많은 NGO들이 이라크전쟁을 전후해 더 위험해진 칸다하르에서의 사업을 미룰 것을 강력하게 권해 지금 조사활동만 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합니다. 아프간 사람들은 진정으로 우리를 원하고 있을까? 지저분하고 가난하다는 것도 나의 생각일 뿐, 그것에 아마 익숙해진 그들에겐 약간의 불편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누려온 생활수준의 잣대를 이들에게 들이대 이들을 동정하면서 자존심을 짓밟고 은연중에 선진국의 소비문화를 고급문화처럼 아프간 땅에 퍼뜨리는 것은 아닐까? 그들 앞에서 양심적이고 헌신적인 자선가인 양하면서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을 심어주고, 본의 아니게 반생태적이고 파괴적인 서구문화를 옮겨 그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얼마의 돈에 팔아치우게 하는 일을 거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하는 일이 그러한 폐해를 상쇄하고 남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나 한 것일까?

주장만으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아프가니스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흉흉한 분위기였습니다. 국제기구는 물론이고 다른 NGO들도 여차하면 탈출할 계획을 세워놓고 불안에 떨며 전황을 주시했습니다. 미국의 관심이 이라크에 집중된 틈을 노려 탈레반이 복권을 시도하거나 미국의 전투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아프간에서 국지전과 테러를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프간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숨막히는 탈레반의 철권통치를 무너뜨린 해방자라는 것과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전쟁의 씨앗을 뿌리는 원흉이라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을 보면 이라크의 미래가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한이 그 넓은 사막을 덮고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세계인들이 지금처럼 ‘평화’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던 때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입 가진 사람들 모두가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외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은 평화를 위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옵니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만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폭력의 시작이며 반평화적인 자세입니다. 자신의 정의를 다른 사람에게 강제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폭력적인 사고로 반폭력적 사회를 만들 수 없듯이 지금과 다른 미래를 가꾸어나가는 방식도 철저하게 반폭력적인 바탕에 기초해야 합니다.

외부는 내부의 반영이지만 내부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밖의 평화를 위해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와서 얻은 깨달음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절실한 것은 전쟁은 정말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정길 아프간JTS 카불지원사업팀장
2003/05/01 00:00 2003/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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