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고구마 부정수매사건 김갑현 전 가톨릭농민회 함평군협의회장
2003/2003년 05월 :
2003/05/01 00:00
벙어리 새의 절규
함평 고구마사건은 농민운동 사상 1950년 이후 정부와의 싸움에서 첫번째 승리를 일궈낸 투쟁이다. 당시 투쟁을 이끌었던 김갑현 가톨릭농민회 함평군협의회장을 만나 2년에 걸친 지난한 투쟁의 내막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이러다 죽겠지 싶었다.
고구마가 썩고 있었다. 썩은 물이 흘러내려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는 그의 마음은 벌써 썩어 버렸다. 녹아 없어진 지 오래였다. 항상 양보할 것만, 포기할 것만 강요받으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젠 바보취급까지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죄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농민이었을 뿐이다.
“평생 이 자리에서 살았어요”
1976년에 발생, 78년 5월이 돼서야 해결된 함평 고구마 부정수매 사건(이하 고구마 사건)은 전남도 함평군 농협이 76년산 고구마를 전량 수매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기면서 시작됐다. 농민들은 조직적인 피해보상 운동을 전개했고, 결국 1950년 이후 정부와의 싸움에서 농민운동 사상 첫 번째 승리를 만들어냈다.
“내가 태어난 자리가 이 자리요. 사람이 못나다 보니까, 여기서 살믄서 옮겨 본 적이 없당께, 평생.”
보리가 아직 패지 않은 4월초, 그를 만났다. 전남 함평군 대동면 운교리. 마당에서 오골계 두 마리가 햇볕을 쬐고 있는 슬레이트 집에서였다. 가톨릭농민회 함평군협의회장. 사건 당시 그의 직함이다. 김갑현 씨는 일생을 그 집에서 떠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집이었다. 생각하면 눈물부터 쏟아지게 만드는 그 아버지가.
전쟁! 이념! 가난! 그의 65세 인생 역정엔 한국 현대사를 대변하는 이 세 단어들이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마치 선택받은 듯 했다. 한 개인에게 이 단어들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실험하기 위해 역사가 점찍은 실습재료로 말이다.
고구마 사건에 다다르기 위해선 먼저 그의 개인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사건 당시 그가 농민운동가로 참여했던 것도, 역사의 강요에 맞선 그의 대거리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짧은 인터뷰였지만 고단했다. 눈물을 참으며 말하는 이가 그랬고, 눈물나는 이야기를 자꾸 들춰낸 이가 또한 그랬다. 이야기 내내 마당에선 강아지 ‘거멍이’가 짖어댔고, 마당 너머 대나무 숲은 스산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어요”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나보다 10살을 더 자셨어요. 그 형님이 6·25 이전에 학교 다니면서 좌익계열 학생운동을 했던 가비여. 형님이 입산을 해 버리니까 경찰들이 가만 안 놔둘 거 아니요. 그래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어머니하고 내가 형을 따라 불갑산으로 입산했죠.”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이념이 뭔지 모를 나이였다. 그래도 그는 산을 탔고 ‘빨갱이’가 됐다. 이념을 모르면서 살았던 부모 또한 산을 탔고 ‘빨갱이’가 됐다. 형이었기 때문이고,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다였다.
“6·25가 난 다음 해, 그러니까 51년이죠. 음력으로 2월 15일이던가, 경찰이 토벌작전을 시작했어요. 그때 다 죽었어요. 빨래 널렸듯 죽은 시체가 널렸어. 형님은 행방불명 돼서 생사를 몰라요. 어머니는 시신도 못 찾았고.”
그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요. 6·25때 이북에서 내려와서 사람 별로 죽이지 않았다고. 지방 토호들이 죽인 사람이 더 많았잖아요. 그때만 해도 참 절대적인 가난 아니었소. 초근목피로 세상을 살던 땐디. 나뭇잎사구 먹고살면서 정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분들, 우리 아버지 어머니 같은 사람들, 법 없어도 살 사람들이 다 죽은 거 아뇨. 글 안 허요? 밤에 산사람들이 내려오면 그 사람들한테 협조하고, 낮에는 경찰들한테 협조하고, 그래야 사니까. 글 안 허면 못 사니까. 그런 형편이었어요.”
다행이랄까? 아버지와 김갑현 씨, 두 사람은 살아 남았다. ‘잠시 동안’만.
“빨갱이 가족을 가만히 놔뒀겠어요? 심심하면 뚜드려 팼어요, 경찰들이. 산을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버지가 경찰들한테 죽도록 뚜드려 맞았어요. 그래서 아버지하고 고개 너머 금사리에 있는 고아원으로 피난까지 갔다니까요. 고아원엔 그렇게 피난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근데 거기서도 경찰들이 못 살게 구니까, 아버지는 혼자 다른 곳으로 또 거처를 옮겼어요. 아버지는 그 골병으로 돌아가셨지.”
정말 고아가, 혼자가 됐다. 그에게 가족이란 실종된 언어였고, 손에 닿지 않는 그리움이었다. 특히 아버지. 아버지는 벙어리 새였다. ‘아버지’를 발음하며 그의 눈은 티 나게 충혈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무식하셔 가지고…. 벙어리 새였지.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말하고 싶은 건 있어도 이,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한 많은 벙어리 새. 그 아버지가 살다 가신 세월을 되짚어 보면서 글 하나 쓸려고 <벙어리 새의 절규>라고 제목은 만들어 놨는데, 아직 글은 못 지었어. 아버지 한을 내가 대신 써 주고 싶어서. 허허.”
갑자기 그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정적 속에서 거멍이만 소란스러웠다. 잠시 후 되돌아온 그의 손엔, 수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나 같이 팔자가 센 사람도 없을 거요. 열 아홉 나이에 가장이 됐어요. 계모가 세 분이 들어오셨다 나가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계모님이 우리를 데리고 살 이유가 없는 것 아니오. 어쩔 수 없이 얼마 안 있어 결혼했어요. 말 못하는 여동생까지 동생이 넷인데, 살림은 해야 하니까.”
그는 여러 번 말했다. 배우지 못한 아버지의 한을 가슴 아파했다. 그건 또한 자신의 한이었다. 처음엔 전쟁 때문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을 마지막으로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엔 가난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단 둘만 남으면서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열아홉 이후엔 책임감 때문이었다. 가장이 되면서 공부는 불가능한 꿈이 됐다.
“내가 농민운동 시작한 게 뭣 때문인지 아요?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요. 우리 대에만 이렇게 곤란하게 살자. 이 팍팍한 세상에서 농민운동이라도 해서 정말로 농민들의 권익을 찾아 가지고 우리 다음 대에는 이런 놈의 세상 물려주지 말자, 이 말이 너무 좋았단 말이에요. 인자 교육을 받아가면서 스스로 깨우쳤죠. 가난은 죄가 아니구나. 솔직히, 내가 무식허기는 하지마는 농민운동 허면서 못 헐 소리 없었어. 어떤 사람한테, 누구한테라도 못 허는 소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죠. 벙어리 새의 그 가슴을요.”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시작한 농민운동, 고구마 사건을 만난 건 운동을 시작하고 몇 년 후인 76년이었다. 당시 함평은 무안, 해남 등과 함께 전남의 대표적인 고구마 산지였다. 하지만 그 명성이 농민들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 건 아니었다. 농민들은 항상 판로 걱정에 마음 졸였고, 고생스레 수확한 고구마는 번번이 중간상인들의 농간으로 헐값에 팔아 치워야 했다.
“사람 애간장이 녹는 거여”
76년 그 해도 마찬가지였다. 전년도에 비해 고구마 값이 30% 정도 뛴 데 자극 받은 농민들은 고구마 재배 면적을 늘렸고, 결과적으로 과잉생산 물량이 5000톤에 달했다. 농민들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7월,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농협이 그 해 고구마를 전량 수매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것도 15kg 1포대당 1317원, 전년보다 17.4% 인상된 금액이었다. 7월부터 농협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신문과 방송뿐 아니라, 리·동장회의, 반상회 등을 통해 광고했고, 앰프차량이 마을마다 돌았다. 농협 전남도 지부장은 직접 함평을 찾아와 사업방침을 설명하기도 했다.
“농협이 웬일로 농민들 생각해 주나 했지만, 가격을 맞춰 준다고 하니까 기대를 했던 거지. 답답하던 농민들이 믿고 팔 수 있는 길이 생겼다는 얘기요. 고구마를 인자 심어 놓으면 보통에는 상인들이 와서 밭떼기를 하거든요. 근데 농협이 사 준다고 하니까 중간상인들이 와서 팔라고 혀도 안 팔았다 이거죠.”
고구마를 사러 온 상인들이 1포당 1100원∼1200원이라는 그럴듯한 가격을 제시했다. 하지만 농협을 믿고 있었던 농민들은 농협이 나눠 준 포대에 고구마를 담아 도로변에 야적해 두었다. 운송하기 쉽도록 해 달라는 농협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11월이 되자 약속대로 각 단위조합들은 읍·면당 2명의 수매원을 배치, 고구마를 조금씩 수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산발적인 소량수매 외에 농협은 전량수매를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늘, 내일 실어가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날씨가 추어지면서 고구마는 부패할 기미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렁께 농민들이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것이, 농협이 사갈 거라 안 했으면 애초에 상인한테 판달 지 저장한 달지 아니면 절간 고구마를 한달 지 이, 그렇게 라도 했을 거란 말이지. 그게 아니고 농협이 다 사간다, 도로 옆에다 쌓아만 둬라, 실어간다 그래 놓고, 시간만 지나다가 난중에 보니까 얼어 버리더란 말이여. 얼어 버렸어. 그래 가꼬 다 썩어 버리니까 이제 누가 사갈 거여. 10원이라 그래도 안 사가지.”
고구마가 썩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는 농민들 마음도 썩어 들어갔다.
“고구마만 그런 게 아니고 농사지은 게 썩는 걸 보면 사람이 정신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사람이 사는 것도 같고 안 사는 것도 같고 그래요. 마음이 불안해서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니까. 고구마를 쌓아 놓았는데 이것이 썩으니까 내려앉아 버리잖아요. 물이 빠지면서 허물어져요. 그 때는 사람 애간장이 같이 녹아 내리는 거여.”
농민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낌새를 챈 상인들이 면 단위 마을에 나타나 농간을 부리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1포대당 500∼700원, 경우에 따라서는 400원, 혹은 200원에 사 가기도 했다. 다급해진 농민들은 단위조합에 몰려가 ‘고구마 사가라’며 아우성 쳤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말만 되돌아 왔다. 이제 농민들은 앞을 다퉈 고구마를 헐값에 팔아 넘기기 시작했다. 한 푼이라도 더 건져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과정에서 자기 고구마를 먼저 팔려는 농민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다급한 마음에 상인들 트럭 밑에 드러누워 ‘내 고구마 제발 사 달라’며 간청하는 농민도 있었다. 몇몇 농민은 농협과 수매계약을 맺었다는 함평읍의 신한제분회사에 고구마를 싣고 갔지만, 회사는 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3∼4만 원의 운임을 들여가며 목포 지역 주정회사로 팔러간 농민들도 헛걸음하긴 마찬가지였다.
“국민총화를 위배한 사람이 누군데”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농민들은 11월 23일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 회원을 중심으로 함평고구마보상대책위원회를 구성, 조직적 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대책위는 곧바로 함평군 9개 마을 160농가를 대상으로 피해조사를 실시했다. 썩은 고구마 223포대, 총 피해액 309만 원. 당시 가난한 농민들에겐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이 조사결과를 토대로 대책위는 농협에 피해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협은 보상요구에 응하는 대신 농민들을 상대로 회유작업을 벌였다. 각 단위조합 직원들은 피해농가를 찾아다니며 ‘본인이 생산한 고구마는 본인의 영농 형편상 상인에게 판매하였으며 대금은 ○월 ○일 전액 수령하였으므로 농협 기타 관계기관에 대해서 하등의 의의가 없음을 확인함’이라는 내용의 확인증에 농민들이 날인하도록 했다. 그것도 마을 유지나 친지들을 동원해 내용도 설명하지 않고 도장을 찍어 가는 식이었다.
“농협 직원들이 농가에 개별적으로 들어가서 ‘본인의 뜻대로 상인에게 팔았다고 해라’면서 서명까지 싹 받았어. 거기다 도장 찍은 사람들이 난 취소할란다 하니까, 농민운동 하던 사람들이 힘 싹 빠질 거 아니요. 그때 그런 상태였어요.”
경찰은 경찰대로 가만있지 않았다. 대책위를 소집하기 위해 작성한 가농 공문의 일부 표현을 문제삼아 관련자를 대공분실에 넘기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피해보상운동을 하는 가농 회원들의 집을 직접 찾아다니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경찰들이 우리 집까지 총을 들고 찾아왔당께, 위협한다고. 몇 사람 패기도 하고. 그 정도였어요. 나 같은 사람은 워낙 완강하게 나오니까 가농 탈퇴하라는 말은 못해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겁이 많이 나지.”
하지만 농민들의 피해보상 요구는 꺾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를 넘겨 77년을 맞았다. 농협의 해결의지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농협과의 몇 차례 협상 시도도 무산됐다. 농민들은 함평농민의 힘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4월 22일 전국에서 모인 농민회 회원과 가톨릭 성직자 등 600여 명은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경찰과 대치하며 농협도지부장까지 면담했지만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 후 5일 뒤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결과는 대책위가 조사한 액수보다 오히려 더 많은 금액이었다. 검찰에서도 조사단이 파견됐다.
“검찰에서 12명이 내려왔어요. 함평군 대표로 나하고 다른 분하고 둘을 불러서 갔는디, 고약하데요. 묻는 대로 대답해 주고, 이래도 농협이 잘했다고 하겠느냐, 하니까, ‘국민총화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합디다. 그래서 예, 내가 그 말을 물어볼라고 했는디 물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국민총화를 위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람이 누구냐, 대답 좀 허쇼, 그랬더니 ‘애들 몇이요?’하고 묻더구만요. 그래 내가, 다섯이요, 했지. ‘다 말 잘들읍디여?’ 안 듣는 놈도 있고 듣는 놈도 있소. 그러니까 ‘정부도 그래’라고 하더만. 정부에서는 잘 허라고 하는 디 밑에서 잘 듣는 놈도 있고 안 듣는 놈도 있다는 거지. 나 참.”
그 후에도 농협의 지루한 시간 끌기는 계속됐다. 그 해가 지나도록 조사결과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는 전혀 취해지지 않았다. 78년 마침내 가농은 전국 차원의 운동을 결의한다. 4월 24일 광주북동천주교회. 전국에서 모인 농민들과 신부들 700여 명이 또 다시 대규모 기도회를 개최했다. 고구마 피해 즉각 보상, 용공이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가농에 대한 탄압 중지 등을 주장하며 농협 전남도지부장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묵살됐고 항의하는 농민들의 거리 진출도 경찰의 제지로 가로막히고 말았다. 25일 정오, 농민과 신부 60여 명은 단식에 돌입했다. 모든 투쟁 방법이 차단된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갔고, 관계당국과의 협상이 결렬되는 가운데 27일엔 가농회원 2명이 강제연행됐다. 급기야 29일엔 단식자 중 5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날 오후 4시, 농협 판매과장이 중앙정보부 관계자와 도경 형사와 함께 찾아와 피해보상금 309만 원과 지불증을 전달해 왔다. 3일 뒤인 5월 2일엔 연행된 가농 회원 두 명도 풀려났다. 2년여를 끈 기나긴 싸움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감사원은 고구마 계통수매 및 인수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농협 전남북·경남북 도지부 산하 단위조합들이 76년과 77년 2년 동안 고구마 수매를 위장, 조작해 농협자금 80여 억 원을 유용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농협이 주정회사와 중간상인들과 결탁해 농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고구마 수매자금을 착복한 것이다. 농민을 지원해야 할 농협이 농민을 착취하는 바람에 생긴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애들한테 미안해”
그 후 사람답게 살기 위한 김갑현 씨의 농민운동은 계속됐다. 79년 양파 마늘 파동 때는 백골단에게 ‘전무후무하게 죽도록’ 맞았고, 85년 소몰이 시위 땐 장터에서 잡은, 피가 철철 흐르는 자식 같은 소를 경운기에 싣고 달렸다. 수출을 위해 모든 걸 감내해야 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포박 당했고, 농민들은 저곡가정책을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그는 못 배운 부모의 한을, 자신의 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농민운동에 일생을 던졌다고 했다. 농민운동을 시작하고 한 평생 할말하며 살았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그의 가슴 한 가운데엔 아직 한이 남아 있다. 입에 담을 때마다 눈물짓게 하는 한, 그건 벙어리 새, 이젠 자식들 속에서 절규하고 있는 벙어리 새다.
“그려요…. 부모님께서 잘 배우지를 못 하셨으니까…. 우리 애들은…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내가 농민운동 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혹시 내가 잘못한 건 아닌가 하는…. 나는 사람답게 살았기 때문에 좋았는데, 자식들 못 가르친 거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리고, 슬프고 그래요. 딸이 셋이고 아들이 둘인데, 큰 아들은 고등학교 나오고 작은 아들은 중학교밖에 못 다녔어요. 딸 둘은 국민학교밖에 안 다니고, 하나는 고등학교 나오고. 젊은 시절 농민운동 한다고 돈벌이를 못 한 거지. 농사는 지으면 지은 만큼 적자고…. 애들한테 미안해.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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