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 없는 협정은 우리 농업만 죽인다
2003/2003년 06월 :
2003/06/01 00:00
트로이의 목마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가장 바쁜 농번기인 4월, 농민들은 논밭이 아닌 국회 앞에서 24일 동안 ‘아스팔트 농사’를 지어야 했다. 일년농사는 망쳐도 평생농사를 망칠 수 없다는 것. 지난해 10월 체결되고 이제 국회비준만을 앞두고 있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한국농업을 포함한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이 크다. ‘일부 농산물’을 내주는 대가로 ‘공산품 판매로 인한 더 큰 수익’을 가져오겠다는 정부 주장은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한 농민운동가의 주장을 듣는다. 편집자 주
지난해 10월 24일 체결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하 FTA)’은 올해 2월 15일 칠레 라고스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과 서명을 한 것으로 공식화되는 듯 했다. 하지만 국회동의를 얻어야 발효가 되는 FTA는 4월 임시국회에 상정되지 못했다. 농민들은 FTA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며 국회의원들에게 반대 서명을 요구했고 5월 15일까지 전체 의원의 과반수가 넘는 139명이 서명했다.
한-칠레 협정 중 한국 농산물 양허안은 쌀, 사과, 배는 제외하였고 포도는 계절관세를 적용해 수입하며 종우, 종돈, 사탕수수, 사료첨가제 등은 당장 무관세로 수입된다. 당류, 쵸콜릿 등도 5년 안에 관세를 철폐하는 등 총 1080여 품목이 단계적으로 관세를 철폐해 무차별 수입하도록 되어 있다.
반면에 칠레의 공산품 양허안을 보면 냉장고, 세탁기에 대한 관세 철폐는 예외로 하고 자동차, 기계류, 컴퓨터, 핸드폰 등 한국의 주요 수출품들에 대해 관세를 단계적으로 철폐해 나가기로 하였다. 양허안만 보면 한국 농업보호와 공산품 수출을 맞바꾼 것으로 보인다. 정부 양허안을 관통하는 기조는 공산품 수출로 전체 국익을 증대하려면 농업의 희생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한-칠레 협정의 체결로 당장 내년부터 수천 개의 농축산물 품목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농업이 입을 피해액은 연간 수조 원이 넘는다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특히 포도의 경우, 정부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포도가 생산되지 않는 11월부터 4월에 저관세를 부과할테니 피해가 없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값싼 칠레산 포도는 감귤과 사과 소비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 자명하다.
또 다른 문제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의 체결로 인해 미국 등 WTO 회원국의 개방압력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후 모든 협상에서 다른 국가들도 한-칠레 FTA 이상의 조건으로 개방을 요구할 것은 자명하다. 특히 미국, 호주 등 농산물 수출국들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WTO DDA(새로운 무역협정을 위한 다자간 협상, 도하개발아젠다) 농업협상에서 칠레와 수천 가지 품목의 농산품관세철폐를 협약한 한국정부가 농업개방 최소화를 주장한다면 얼마나 명분이 서겠는가. 결국 2004년에 진행될 쌀 전면개방에 관한 재협상에도 불리한 위치가 될 것이다.
결국 이익은 고스란히 미국의 다국적기업으로
칠레는 과수농업이 세계 3위 안에 꼽히는 농업수출 강대국이지만 속내는 텅 비어 있다. 미국 다국적기업이 농업 전반을 장악해 칠레 농업노동자들을 고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는 플랜테이션 형태의 농업국가인 것이다. 결국 FTA가 갖는 의미는 우리의 이익이 칠레를 거쳐 결국에는 미국의 다국적기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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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위험성은 지금 방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서 드러났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방미중인 5월 14일 미 경제계 인사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추진에서 한국 농업이 장애가 되고 있으며 소수의 농민만 남기는 농업 구조조정을 통해 농업시장을 완전 개방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한-칠레 협정이 한국 정부의 ‘개방농정’의 기조 하에 앞으로 봇물 터지듯 밀려올 한-미, 한-중, 한-멕시코 등 농업 강대국들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수월히 하기 위해 본보기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반면 공산품 수출로 전체 국익이 증가한다는 정부의 주장을 살펴보자. 칠레는 인구가 우리나라의 32%, 1인당 GDP는 우리나라의 56% 수준으로 구매력이 우리의 18%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자동차와 전자제품은 이미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어 추가적인 수출여력이 크지 않고, 자동차 26%(2위), 냉장고 31%(2위), 전자렌지 69%(1위), 세탁기 65%(1위), 자동차 타이어와 배터리, 섬유, 엘리베이터, PVC 시장점유율도 이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칠레는 단일 관세체제를 갖고 있으며 2010년에 가면 대부분 품목에서 관세를 철폐할 예정이고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등 여러 나라와 FTA를 체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조달 등 이미 많은 분야가 개방되어 있어 우리가 FTA를 통해 특혜를 볼 수 있는 분야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칠레 정부와 농업계는 협정 체결로 인해 칠레 농산물들에 대한 높은 관세가 무관세 또는 저율관세로 전환되어 칠레는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환영하고 나서고 있다.
칠레 외무부의 마투스 양자간 경제국장이 “자동차나 휴대전화 등 한국제품의 수입관세는 6%가 0%로 떨어지는 것만으로 이러한 제품이 칠레 국내시장에서 과잉되지 않는다. 반면에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칠레 수출품에 대한 관세율은 현재 40∼100%에 달하며, 향후 관세철폐에 의한 수출증대효과는 크다”고 한 발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월간 『세계농업뉴스』 제28호, 2002년 12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폐농 부추기는 정부의 FTA특별법
정부가 내놓은 FTA특별법은 7년 동안 8000억 원 정도의 기금을 마련해 피해농가가 농사를 그만둘 경우 지원하는 폐농지원금과 다른 작물로 전환시 지급되는 전작지원금 제도, 피해농민 직업훈련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매년 수조 원의 피해를 입고 쓰러져가는 농업에 8000억 원을 투입해 농업을 살린다는 터무니없는 기만책에 불과하다.
또한 FTA특별법이 피해 농가의 소득보장 등 농민들을 위한 대책이 아니라 농업을 구조조정하고 농민을 농촌에서 내몰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농업은 농산물 생산뿐 아니라 사회안정, 일자리 제공, 환경보호, 전통문화 보전 등 수많은 부가가치와 공익적 기능을 수행해 그 이익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약 50조 원 정도라고 한다.(2001년 농업기반공사 발표 자료)
이러한 이유로 세계 각국은 WTO, FTA가 어떻게 굴러가든 간에 자국의 식량을 자급하고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EU(유럽연합)는 칠레와의 FTA 협상에서 관세철폐 예외 품목을 전체의 41%에 달하는 966개 품목이나 설정해 자국 농업을 보호하고 있다. 이는 농업협정의 대세가 개방이 아니라 자국 농업보호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정부는 무조건 ‘개방 대세’만을 앵무새처럼 읊을 것이 아니라 실패한 개방농정에서 180도 선회해 농업에 대한 새로운 철학을 수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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