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신화 사이에 피어나는 전복의 꿈


작년에 어느 출판사의 판타지 문학상 심사를 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응모자들은 십대였고, 빼어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글을 쓴다기보다는 자신의 글 속에서 초인이 되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줄거리 속에서 대리만족과 글쓰기의 즐거움을 느끼며 쓴 습작들이 많았다.

재미있는 점은, 상당수의 시대 배경이 왕조와 귀족이 있는 봉건적 신분제 국가가 신분이 없는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기 직전의 정세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생물학자 헤켈의 말대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십대들은 자신의 처지가 부모와 교사 밑에서 평민 노릇을 하는 신분제 사회에서 성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공화제 사회로 옮겨가는 이행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 하나의 정체(政體)를 뒤엎었던, 미래를 설계해 나갈 수 있는 스스로의 힘을 믿었던 그 기억을 대체할 만한 더 강렬한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혁명의 기억과 그 후 짧은 시기의 무한한 낙관은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더 예민하고 팔팔한 십대들이 환상으로, 소설로 그 시기를 형상화하면서 가슴 벅차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의 해석을 취하든 간에, 젊음의 피는 반역의 피다.



“인문학적 SF” 읽기


혁명이 계몽주의와 인간 개체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이라면, 아마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신화와 서사시일 것이다. 공동체와 공동체의 체현인 영웅을 찬양하고, 신 앞에서 인간의 초라함과 부질없음을 말하는 신화와 서사시는 우주 전체의 삶과 죽음을 말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미망에 지나지 않음을 설파한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은 희한하다고나 말해야 할까. 과학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신화와 과학기술, 인간의 왜소함과 위대함은 하나로 융합해 버렸다. 신화를 소재로 한 무수한 과학소설이 나와 있고, 그 중에는 문학적으로 보아도 걸작인 것이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는 단연코 신화를 차용한 SF의 백미에 속한다.

처음 책장을 펴드는 독자는 아마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인도어 마하사마트만(Mahasamatman)과 전형적인 미국식 이름 샘(Sam)을 연결짓는 희한한 상상력에서부터 어리둥절하게 될 것이다. 주인공 샘은 또한 마이트레야, 즉 이 소설의 원제인 ‘빛의 왕’(Lord of Light) 미륵(彌勒)이며, 타트하가타(여래)이다. 그와 함께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죽음의 신 야마와 칼리, 밤의 여신 라트리, 브라흐만과 비슈누, 시바 등 모두 힌두 신화의 신들이다. 그들은 신들이면서 동시에 신을 사칭한 인간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머나먼 옛날 멸망한 세계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한 이주자들, 그 중에서도 과학 기술자였던 승무원들이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추방할 뿐 아니라 점차 늘어나는 그들의 자손마저 지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채택하고 포교한 종교가 바로 힌두교다. 하기야 힌두교 자체가 아리안 족과 드라비다 족 투쟁의 산물이며, 카스트 제도를 정당화하는 교리를 품고 있다는 점, 그리고 힌두교의 신격들이 브라흐만과 비슈누, 시바라는 삼대 신격을 앞에 내세운 느슨한 귀족 과두정치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힌두교를 지배체제로 선택한 그들의 판단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최선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뻔한 답이 보이는, 하지만 뻔한 과정이 아닌


SF 작가 젤라즈니의 재능이 빛나는 곳은 바로 이 부분부터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신이라고 사기치는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다. 육체와 육체를 드나들고 인간의 의식을 조사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그들은 실제로 신과 같은 삶을 누린다. 사람의 의식을 조사하고 ‘카르마’에 맞는 새 육체를 주어 ‘환생’시킬 수 있는 힘, 마음 내키는 만큼 온갖 육체적 향락과 권세를 누리며 원할 때까지 살아갈 수 있는 힘, 실제 자신의 성격과 우주의 속성을 일치시켜 자연력을 뒤흔들고, 자신의 교도들에게 공물과 숭배를 받으며 인간 이상의 존재로 군림하는 그들은 이미 단순한 인간의 한계는 넘어서 있다. 인간이 신화를 이용한 만큼, 신화도 인간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신화로 그려내지 않고, 어디까지나 기술과 인간의 힘에 의한 것으로 그리기 때문에 젤라즈니는 과학소설 작가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선주민인 라카샤(羅刹)에 대해 “그들이 강대한 힘과 긴 수명을 가졌으며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초자연적이든 아니든 간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등장인물 탁에게 답하는 죽음의 신 야마의 말이 젤라즈니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것은 미지와 불가지의 차이, 과학과 공상의 차이인 것이다―이것은 본질의 문제이다. 나침반의 네 방향이 논리, 지식, 지혜, 그리고 미지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하자. 어떤 자들은 마지막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다른 자들은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 이 방향을 보고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다른 세 방향을 시야에서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미지의 존재에 복종할지도 모르지만, 불가지한 것에는 절대로 복종하지 않는다. 이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자는 성인 아니면 바보이다….”

그리고 계속 기술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한다. 주인공 샘이 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결국 기술을 누가 소유할 것인가의 문제 때문이다. 소수의 신들이 원래 신화의 신들처럼 “상징적인 부모” 역할을 하며 기술을 독점하고 신앙심을 고취시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과거 우리의 승객이었던 자들, 그리고 우리의 많은 육체에서 난 자손들”이 널리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리도록 해야 하는가? 아직 호황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던 1960년대 미국에서, 더구나 <과학 소설>이라는 젊은 장르에서 씌어진 소설임을 감안하고 보면 답은 뻔해 보인다. 그러나 그 뻔한 답으로 가는 과정은 결코 뻔하지 않다. 특히 주인공 샘과 죽음의 신 야마, 원주민 라카샤 중 가장 강한 자인 타라키, 죽음의 여신 칼리의 심부름꾼 릴드 등 주인공에서 단역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들의 압도적인 개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를 즐겁게 한다.

이 책이 처음 한국에 번역된 때는 1993년이었고, 그때 이 책은 “인문학적 SF”라는 카피를 들고 나와 그 당시 국내에 번역된 SF로서는 처음으로 재판을 찍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문학적 SF”라는 낯설었던 카피도 카피지만, 소련 붕괴 후 많은 사람들이 문화와 예술에 눈을 돌리고, 그러면서 지금까지 주의하지 않았던 사소하고 새로운 것들을 갈망하던 그때 당시의 뒤숭숭한 분위기도 이 책의 판매고에 한몫 했던 것 같다. 이제 십 년이 지나 다시 재간된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역시 십 년 전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반역과 전투, 영광과 모험의 꿈이 책갈피마다 숨쉬고 있음을 느끼고 왠지 몸이 후끈해지는 기분이다. 어떨까, 콱콱 조여오기만 하는 세상사를 잠시 잊고 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 없었던 십대의 마음으로 돌아가, 점점 무더워지는 여름 한나절을 이 꿈속에 한번 빠져들어 보는 것은?

송경아 소설가
2003/06/01 00:00 2003/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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