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석과 차 한잔 : 무용가 안은미
2003/2003년 06월 :
2003/06/01 00:00
살아있으므로 춤을 춘다
춤꾼 안은미를 아는가. 그는 이화여대 무용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6년 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 단원, 호암아트홀 주최 신인발표회 신인상, 24회 서울 무용제 연기상, 제1회 MBC 창작 무용경연대회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무용수로서 주목을 받았다. 1992년, 나이 서른 즈음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욕대학과 티스취(tischi)예술대학원 졸업, 주로 뉴욕에서 활동하며 “눈부신 상상력과 재치로 가득 찬, 마술 같은 환상을 주는 무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는 지금까지 모두 65편의 작품을 해냈는데 이런 경력은 그녀를 만나 도저한 열정을 맛보는 순간, 그 짧은 소개가 아쉬워진다.
그를 한번 만나본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도 다 있네’를 넘어 고개가 절로 휘둘러진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서 춤을 춘다”는 이 현대 무용가는 순간마다 뿜어대는 도발적인 열정과 솔직함 때문에 단번에 주위를 흡입해버린다. 그는 춤에 방해되어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닌다.
1998년 무덤 연작 시리즈로 국내 무용계에 일대 ‘타격’을 가했고, 2000년에는 은하철도 999가 아니라 <은하철도 000>, 2002년에는 <하늘 고추> 등에서 파격적인 안무와 열정적인 춤으로 ‘뜻있는’ 국내무용계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장본인. 사실, 현대무용이라면 ‘민간인’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뭔가의 장벽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무용 판에 안은미는 어디로 튈지 모를, 도발적인 상상력의 소유자로 각인되면서 많은 매니아들이 따라다닌다.
그가 2000년, 대구시립무용단의 단장으로 취임한 것은 의외였다. ‘옷 벗고 춤춘다’고 소문난 무용가가 보수적인 영남지방, 그것도 관료적인 공무원들의 등살을 이겨낼 수 있을까가 호사가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호사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2002년, 2년 임기의 단장직에 연임되었을 뿐 아니라 올해 8월에 열린 유니버시아드 대회 개폐막식 안무를 맡았다.
그녀는 오히려 대구 무용계의 보물이 되어버린 것.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우리 주위에 그어져 있는 넘지 못할 선들이 있다면 어디든지 찾아가 그것을 조롱하듯 훌쩍 넘어 버릴 듯한, 그리고는 넘었다는 것을 아주 즐겁게 납득시킬 삶의 실천가이기 때문이다.
무진장 바쁜 그를 잠실의 한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첫 만남에서도 그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시원시원한 웃음으로 주변을 환하게 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빡빡머리에 초록색 반짝이를 뿌렸고 초록색 귀걸이는 어깨까지 닿을 듯 주렁주렁했다. 거기에 초록색 티셔츠에 빨간 바지, 굽 높은 샌들까지. 보고 있기만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어제 너무 놀아서 목소리가 많이 쉬었다”고 양해부터 구한다. 이때 오늘의 만남을 어느 정도 예감했다. 그에게 춤은 일이나 남들이 쉽게 말하는 예술적 열정 때문이 아닌 ‘재미’와 ‘즐거움’이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재밌을 때 자신이 그것에 미쳐 있을 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노력하면 자신의 한계를 들키고 만다고 미치도록 좋아하라고 거듭 충고했다.
현재 대구시립무용단 단장, 뉴욕의 은미안 댄스 컴퍼니와 국내 자신의 무용단인 안스안스를 동시에 이끌어가고 있고, 6월에 공연할 <안은미의 춤-Please>와 유니버시아드 안무 준비, 바로 전날 22회 국제현대무용제(Modafe)의 일환으로
<하늘 고추>를 공연한 후라 경황이 없을 터인데도 피곤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인터뷰 도중 전화가 오자 마흔이 넘은 제자 안은미는 “떤쌩님 어제 즐거우셨죠? 떤쌩님 고맙습니다. 떤쌩님 사랑합니다”라며 애교를 떤다. 격식이나 주변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한 자신의 마음을 믿는 그의 춤은 인간관계에도 여지없이 적용되나 보다.
어제 밤 공연 어땠습니까.
“완전히 뒤집어 놨어요. 외국 애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치고 그랬습니다. 머리로 유리를 한번 박아주고 그랬더니 좋아하더라고요(웃음). 한국에도 이런 것이 있구나, 그러나 그보다 속이 시원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사실 감동이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때 옵니다. 예상될 때는 오질 않습니다. 일본 친구들은 특히 집에 안가고 줄줄 따라와서 파티에도 참석하고 그랬습니다. 그네들은 우리보다 더 절제하는 편이죠. 무의식적 차원을 보자면 스트레스도 더 심할 거예요. 그러니 예상 밖의 춤에 감동을 받은 모양입니다. 저는 중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집이라고나 할까요. 비유하자면 집의 모양은 유지하면서 중심부를 이동시키면서 다채롭게 보이도록 하는 일이 제 작업의 특징입니다. 그것을 놓치면 집이 허물어 질 수밖에 없죠. 그러한 면이 전문가들에게도 일반인에게도 저의 춤을 인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파격적인 무용을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늘 꽉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도무지 벗어날 가능성도, 또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그렇게 안 해도 살아지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저는 사실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검열이 심한 사회 아닙니까. 자기 검열도 심하고. 그러니 그런가보죠?
“아예 검열이 있는 사회에 들어가지 않는 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 딱히 매인 직장도 없고, 춤만 추니까. 한국을 벗어나 본 것도 좋았죠. 새로운 문화에 접하며 공부도 자기를 찾는 훈련도 했습니다. 검열을 즐기며 살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금기나 검열이란 필요해서 만든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라. 도둑질하지 마라 같은 검열은 문제도 없고 또 그것이 만들어진 이유도 있겠죠. 그런데 맹목이 되어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그걸 넘나들며 이겨내는 일, 그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검열이 없으면 재미가 없을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파격적으로 입은 옷을 보고 남자친구가 그냥 인정해 버리면 재미있을까요? 어머 너는 옷이 이게 뭐니. 속이 보인다 보여. 이렇게 잔소리 하고 그래야 세상이 재밌잖아요. 사람이 그 검열에 맹목적으로 빠져버리는 게 더 문제죠.”
무용계에도 벗어나야 할 그런 것들이 있겠지요?
“가령 음식을 왼쪽부터 먹어서 오른쪽까지 먹어야 하고 스프 먼저 먹고 차근차근 순서대로 먹어야 하고 하는 순서나 절차의 코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코드를 원래 익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수월했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 어떤 불편이나 불만이 있으면 꼭 작품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몸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에너지들이, 열정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안은미의 춘향> 공연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춘향의 해석은 어땠고 공연은 어땠는지?
“사실, 해석해서 대본 써주신 분은 박용구 선생님입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잘 아시니까, 너에 맞춰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춘향이는 자꾸 ‘무용’지물로 되어 가는 마흔 살 노처녀입니다. 월매는 술집을 하며 돈 되는 놈을 사위로 고르려하죠. 딸과 충돌할 수밖에 없죠. 결국 실패하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총각이 냇가에서 목욕하던 춘향을 엿보다 물에 빠지고 춘향이 건져 주면서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여기에 변학도가 나타나는데 변학도란 이런 저런 나쁜 일은 다하고 색을 밝히고 한국인의 부정적인 남성의 상징적 코드라 할 수 있습니다. 수청 들라는 변학도의 요구에 춘향이는 기생들을 선동하며 오히려 강력 대응하는 적극적인 여성입니다. 감옥에 투옥되지만 스스로 가는 거고 스스로 해보자는 거지 이몽룡이 와서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여성은 아닙니다. 춘향이는 지금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입니다. 판검사가 되어 돌아온 이도령도 춘향이를 구하러 왔다기보다는 나쁜 놈을 징계하러 온 것입니다. 이도령도 나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각자의 판단에 따라 살고 대등하게 사랑하는 일이 춘향전에서 보여준 거라 생각합니다.”
이 공연은 아방가르드한 안은미 씨를 관객들이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모든 판단이 비교급에서 비롯된다면 우리가 익히 생각해볼 수 있는 춘향전의 전통을 재해석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럴 터.
선생님의 작품에서 감동은 어디에서 온다고 보십니까.
“선물을 하나 할 때도 저는 정말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가령 일일이 자수를 놓아 편지를 쓴다든지 정말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해보곤 하죠. 마음과 마음이 직접 닿도록 사이에 낀 이물질을 없애고, 또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게 일부러 그래서 되는 건 아닙니다. 천성인 것 같아요. 그래서 즐겁습니다. 이런 즐거움은 조금 과장하자면 노력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좋아해야 해요. 그래야 이물질이 끼어 들질 않아요.
원시적인 몸짓 하나가 왜 섬뜩함을 준다거나, 아무 것도 아닌 듯한 몸짓 하나가 눈물이나 감동을 주는 건 그 근저에 이런 정신의 자세 때문이죠. 제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고 우스꽝스럽지만 사람들은 그때 눈물을 흘려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게 또 천성이고. 체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 체력의 바탕은 광기에 가까운 뭔가일 겁니다. 제정신이 아닌 수준이죠. 제자들이 그래요, 선생님은 왜 잠을 안자냐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동승 같다고도 그러고 보살 같다고도 그럽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며 정말 그는 타고난 춤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며 살아온 40년 삶이 모두 무용이라 생각하는 사람, 그 움직임에 이물질이 끼지 않게 신명을 다하는 그이기에 이런 자신감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다. ‘미친× 꽃다발처럼 놀아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힘은 이런 것과 관계가 있을 텐데, 사실, 그녀는 한 시간 남짓밖에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남긴 여운 무척이나 길었다.
예술인들 가운데 외국 유학이나 경험을 하면서 내국인들이 보기에 너무 이국적이 되어버린 분들도 있던데, 선생님께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드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미국에 가서 뭘 열심히 배워오겠다 이런 생각은 하질 않았어요. 다른 낯선 곳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탐색하러 갔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또 직업 없이 마음껏 일했습니다. 작품도 자유로워졌고, 또 스스로 많이 생각하다 보니 중심도 잡히고 진중해지면서 무게도 생겼다고 할까요? 언제나 큰 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소모적인가는 미국 가기 전에 이미 깨우치고 있었기 때문에, 놀고 영화보고 하고싶은 대로 다했어요. 9년 동안 살았는데 굶어죽지 않은 게 다행이죠.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굶어죽이긴 아깝다고. 공연활동 열심히 하면서, 오히려 그쪽을 바꾸고 왔어요. 공연 다닐 때 그곳 사람들이 저를 골치 아파했어요. 뭔가 동양인에게 기대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렇지 않으니, 애들은 이게 뭔가 하고 헤매고, 골치아파했죠. 그러나 난 나지 뭐야 하고 저대로 구애 없이 했습니다. 작업을 많이 인정받은 것이 제일 좋았고, 모든 게 재밌었어요. 잘 놀았지 뭐.”
그와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는 재미있었다는 말을 많이 썼다. 그러나 이 말이 관객을 위해 인공적으로 직조된 대중적 재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정말 춤을 추는 일이 재미있고, 더욱 새롭게 창조적으로 작품을 만들려고 며칠 밤을 새는 게 재미있고 그리하여 피곤한 줄 모르고 몰두하는 삶 자체가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재미는 열정적인 진지함, 예술에의 광기 어린 몰두와 동의어였다.
가족 중에 닮은 사람 있습니까.
“어머니가 많이 닮았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질 마라, 먼발치를 내다보자, 이런 걸 심어주셨어요. 저는 계획을 짜면 한 10년 정도를 봐요. 물론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서 하면 피곤하니까 10년쯤 후엔 이렇게 해야지 하고 열심히 살아요.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인 아버지였어요. 가족을 위해서 일하고 실패하고 성공하고 아이들 키우고. 어렸을 때부터 제가 제일 시끄러웠는데 그걸 어머니가 잘 봐주신 거 같아요. 어머니는 저에게 신뢰를 가지고 계셨어요. 제가 늦으면 얘가 분명 무슨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주셨지요. 어머니가 공연에 와보시고는 내가 네 엄마라 그런지 네가 제일 잘하는 것 같다고 자주 말씀하시지요. ‘잘하는 건 모르겠는데 연습실에서 제일 늦게까지 남아 연습하는 거 저 맞아요. 제일 열심히 해요’라고 대답했지요.”
여성들의 사회적인 처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니까.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서른에 결혼해도 일찍 간다고 생각하잖아요. 옛날에는 보따리 싸서 날려 버렸어요. 요즈음은 억압이 많이 줄었어요. 왜 시집 안 갔냐 물을 때, 짝이 없어요, 그러면 그냥 웃지 다르게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많아 졌고 대학 진학도 마찬가지구요. 사실 여성들의 힘이 대단해요. 6·25 지나고 우리 어머니들 대단했잖아요. 떡 팔아서, 애들 밥해 먹이고, 또 학교 보내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시키고 대단했잖아요? 그 체력하며 열정하며. 좀 멋있게 했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섭섭함도 있지만 아무튼 해낸다는 것이 대단해요. 후배들에게 그런 얘길 자주하죠. 말로만 불만을 토로하지 말아라. 그냥 니가 무엇인가를 보여줘라. 그럼 세상은 변한다.”
그의 공연을 보지 못하고 인터뷰를 하는 게 미안해서 그동안 봤던 무용공연 이야기를 두런 두런 꺼냈다. 춤에 관련된 잡지를 본 얘기도 해보고 무용가 최승희에 대해서도 몇 마디 늘어놓았다. 그는 “잡지 보지 마세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머리로 보고 해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고 즐기는 게 중요하다는 말인 것 같다.
이 말이 나오는 게 그리 쉽지 만은 않았을 것 같다. 지금이야 “칸트 몰라도 잘 살 수 있어”라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젊었을 때는 그게 부끄러웠을 때도 있었단다. 그렇지만 세상의 기준에 그는 집착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릴 때 좋아하던 공주옷을 어른이 되며 갑자기 싫어하는 척하는 이유도 모르겠단다. 그래서 그는 때로 그가 꿈꾸던 공주옷을 입고 거리를 나선다.
그가 원하는 성공은 ‘안은미’다. 안은미가 안은미답게 사는 게 성공이란다. 자신은 그냥 재밌어서 해본 영화에 관련 된 작업들에게 대해 “타 장르로 무용을 넓혔다”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개를 젓는다.
무용가에게 느껴지는 환상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옆집 언니가 비련을 겪으면 그게 비련으로 느껴지겠냐고 되묻는다. 어떤 질문에도 가장 쉽고 재미나면서 핵심을 놓치지 않는 대답을 하는 것도 그의 능력이다.
그는 돌려 말하지 않는다. 선물을 하고 나서도 “좋아? 좋아? 행복해? 행복해?”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어디에 가서도 기죽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따라하게 만든다.
짧은 인터뷰였지만 그녀는 삶과 예술, 미와 표현 사이의 갈등을 자기 자신의 절실한 문제로 체험해 본 사람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갈등을 홀연히 넘어 대단한 열정으로 무진장한 ‘자유’의 바다에 활개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가 조금 무서워 보였고 많이 부러웠다. 인터뷰가 아니라 한편의 공연을 본 듯하다. 그는 안은미라는 작품을 1시간 내내 그의 특유의 몸짓과 말로 우리에게 전했다.
마지막으로 무용을 한 지 몇 년이나 되었냐고 물었다. 우문현답이다.
“40년 됐죠. 태어나서부터 움직였으니까. 공연은 15년 동안 65개 했네요. 열심히 움직이고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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