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기자에게.

그 동안 잘 지냈는지요. 세상일에 지치고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찾아가는 곳이 있는지요. 제게 그곳은 경주입니다. 이 천년고도는 사실 저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남들처럼 수학여행 때 처음 가본 게 유일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때인가 이 놀라운 고도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이후 드문 드문 경주를 방문해서 이곳 저곳을 헤매곤 했습니다. 80년대 후반 이국 땅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늦가을 남산의 풍광을 담은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그곳에 돌아가기를 꿈꾸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로 향합니다. 수원과 천안과 대전을 지나서 추풍령을 넘습니다. 성하(盛夏)로 치닫고 있는 이 땅의 산하가 가깝게 그리고 멀리 펼쳐져 있습니다. 김천을 지나고 대구를 지나면 기차는 경부선에서 벗어나 경주로 향합니다. 끝없이 이어진 벌판과 낮은 구릉, 그리고 이름 모를 야산들, 이 땅 어디를 가더라도 언제나 정겨운 풍경들입니다.

스물 세 살의 고독

오래 전 스물 세 살의 늦가을, 이 길로 혼자서는 처음으로 경주를 찾아왔을 때가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우연히 읽게 된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장소들이 정말 그곳에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었습니다. 서울역에서 오후 1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경주역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곧바로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어두워지는 반월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왼편에 첨성대를, 오른편에 계림을 바라보면서 반월성에 올랐습니다. 반월성은 본래 석탈해의 집이 있던 곳이자 신라의 왕궁이 있던 곳입니다. 반월성 낮은 구릉 위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메마른 향기를 날리고,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소멸되고 있었습니다. 반월성 아래 남천을 건너서 추수를 마친 논둑 길 옆 어둠 속에서 인용사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이 있는 길 위에 올라서서 저편 서쪽 끝에 있는 천관사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말의 목을 자르고 돌아서야 했던 젊은 시절 김유신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바로 그 때 어둠 속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스물 세 살의 고독, 그것은 젊은 시절에 누구나 갖게 되는 마음 한구석이 시리면서도 다소 달착지근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983년이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제가 대면했던 고독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로, 공장으로, 감옥으로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교정에 혼자 남아 있게 되었을 때, 제가 읽던 추상적인 책들과 담론들로부터 갖게 되는 그 어떤 거리감이었습니다. 더없이 황량한 현실 속에서 진리에의 길은 여전히 낯선 세계로의 여행이었으며, 그 세계의 문턱에서 망설이고 서성거리는 제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시절 이 곳 경주에서 제가 발견한 두 명의 지식인은 원효와 최치원입니다. 신라의 중기와 말기에 활동했던 이 두 명의 지식인은 제게 많은 것을 생각케 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국내파와 해외파의 상징적인 인물들일 것입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으로 태어난 이들은 각각 불교와 유교를 선택해 지식인의 길을 걷습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다가 돌연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고 경주로 돌아와 포교활동을 벌이는 원효의 삶이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해 문명을 떨치고 조국 신라로 돌아와 개혁에 몰두하는 최치원의 삶은 당대 지식인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길을 보여줍니다.

최치원의 호는 고운(孤雲)입니다. 저물어가는 신라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결국 외로운 구름이 되어 속세를 등지게 됩니다. 가야산 해인사의 홍류동에는 그가 남긴 시가 남아 있습니다. “물이 미친 듯 휩쓸어가니 지척간인들 말소리가 듣기 어렵구나. 그러나 사람의 시비소리는 귀에 이르니 끝닿는 데까지 흐르고야 마는 그 물에서 배워야 하겠네”라고 쓰여 있습니다. 시대와의 불화를 자각한 한 지식인의 좌절을 절감케 하는 동시에 이를 의연히 초월하려는 선생의 의지가 서려 있는 시입니다.

저 낮은 세계를 향하여

K기자, 경주역에 내려서 오늘은 분황사를 찾아갑니다. 이곳은 원효가 한 때 주석했던 곳이자 아들인 설총과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원효가 열반에 들자 설총은 아버지의 유해를 부수어 소상을 만들고 예배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을 하자 그 소상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놀라운 것은 『삼국유사』가 쓰여진 고려 후기까지 이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 남아 있었다고 일연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소상은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저는 내심 단언했습니다. 아들 설총이 보기에 아버지 원효가 남긴 것은 바로 그것. 다른 지식인들이 세상의 밝은 앞만 바라보았다면, 아버지 원효는 앞이 아니라 그 옆에 가리어진 세계를 바라보고, 그 속에 뛰어든 존재였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것은 한없이 낮은 세계이자 살아 있는 민중들의 세계입니다.

요석공주와의 사랑으로 파계한 원효는 소성거사를 자처합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며 ‘하나의 사상’과 ‘중생의 평등’을 노래불렀습니다. 걸인으로부터 큰 표주박을 하나 얻어 그것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힘없는 민중들에게 ‘모든 것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임을 설파했습니다. ‘모든 중생이 다 같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시대적 구속을 넘어선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자 당당한 포효입니다. 그러기에 원효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겨레의 스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아오는 기차를 기다리며 경주 시내를 할 일 없이 돌아다닙니다. 크지 않은 도심 한가운데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백화점과 카페와 컴퓨터 게임방,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빠른 랩뮤직 사이로 풍선을 든 아이들이 해맑은 웃음소리를 남기며 달려갑니다. 한 상점에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악다구니 쓰는 소리도 들립니다. 저편 골목 사이로 봉황대가 보이고 이 고도에도 초여름 어둠이 엷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모든 시간의 저녁들이 공존하는 이곳 경주, 그 한가운데서 오랜만에 감상에 젖습니다. 원효대사가 거침없이 걸어갔던 길은 바로 저 낮은 세계, 해맑은 웃음소리와 악다구니 소리가 들리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K기자가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때로는 감상도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손을 내미는 또 하나의 용기를 가슴에 담으며 돌아오는 기차에 올라섭니다. 내내 건강하길 바랍니다. 다음 달에 다시 소식 드리지요, 그럼.

김호기 본지 편집위원장,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2003/07/01 00:00 2003/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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