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여 더 뻔뻔해져라


스물아홉.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가슴이 불안한 나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싱글즈>는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스물아홉 두 여자의 삶을 그렸다. 또래 여자들의 이야기에 남자들이 할 말이 없을 리 없다. 소낙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후 두 남자가 만났다. 편집자 주

20대 후반 여자의 삶을 그린 영화 <싱글즈>가 나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스물아홉 살에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새로운 일을 찾아 자신을 던지고 거기에도 모자라 싱글맘의 삶을 택한 동미(엄정화 분). 디자이너의 환상을 접고 식당매니저라는 새 삶을 받아들이며 결혼을 미루고 친구가 낳을 아이의 ‘아빠’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한 나난(장진영 분). 인터넷 시사칼럼 사이트 ‘시대소리’ 운영위원 변희재(30세) 씨와 단편영화감독 김종관(29세) 씨가 두 여자, 그리고 스물아홉 남자들의 삶에 대해 논했다.

변희재(이하 변) : 문화방송 <옥탑방 고양이>를 보면 두 남녀가 동거하는 이유를 설정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동미(엄정화)와 정준(이범수)이 동거하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아 리얼리즘이 떨어지게 느껴진다. 원작(영화<싱글즈>의 원작은 일본 TV드라마 <29살의 크리스마스>다) 때문일까? 연인 사이의 동거는 많지만 섹스 없는 이성친구간의 동거는 보기 드물지 않는가.

김종관(이하 김) : 원작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영화를 어느 정도 관용적으로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불알친구 사이라 서로를 이성적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설정하지 않았나.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트렌드에 익숙한 세대 아닌가.

변 : 영화를 보니 내 친구들도 어딘가에서 저렇게 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잊고 지내던 대학친구들에게 모처럼 전화를 걸었다. 직장을 때려치우느냐 마느냐.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 우리 또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고 있다.

김 : <싱글즈>는 가볍게 보고 생각도 가볍게 해야 한다. 영화 자체가 균형이 잘 잡히고 포장도 잘 된 트랜드로 그 안에 스물아홉이 주는 위기감을 가볍지 않게 잘 얹혀놓은 영화이다. 끝까지 진지하지 않은 것도 좋았다. 쓴 약이 아니라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보양식 같은 영화다. 이 영화의 기능은 유쾌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으며 그러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화두를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변 : 나는 이 영화를 심각하게 봤다. 여고생이나 여대생은 모든 드라마에 다 나온다. 성공한 캐리어우먼도 나온다. 그러나 그 또래의 여자들의 삶은 방송과 영화에서 실종되어 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려주는 대중문화 코드가 없었다. 나는 일반직장을 다니는 경우가 아니라서 보편적인 남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회사를 다니는 남자친구들을 만나보면 여자친구들과 다를 게 없다. 다, 똑같이 산다. 결혼이냐, 싱글이냐를 저울질하고, 사표 쓴다고 큰 소리 치면서 직장상사에 대한 ‘뒷담화’를 벌이지만 실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김 : <싱글즈>를 보면서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아닌 것 같고 자신 앞에 놓인 현실 기반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는 영화라는 꿈꾸는 직업을 택했다. 어쩌면 나난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꿈꾸던 이십대 초반의 생각을 가지고 덜컥 서른을 맞으려고 한다. 서글픈 안정을 느끼는 친구들과 달리 난 여전히 꿈을 꾸지만 호주머니에 돈이 없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것은 아쉬움보다 어른 대접받는 것에 대한 기대가 큰데, 솔직히 30대는 두렵다.

변 : 나난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독신이다. 그게 이 영화의 주제다. 사실 서른이라는 나이에 성공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나. 우리나라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나가는 것, 그게 바로 성공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하고 싶은 일들이 다 비슷하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몇 가지만 성공이라고 가치부여를 한다. 영화관에서 보니 주변 여자들이 동미가 과장에게 복수할 때나 파격적인 욕을 할 때 정말 열광하더라. 그만큼 억눌려 있었다는 증거다. 내 친구가 미국에서 <말콤X>라는 영화를 봤는데 흑인들이 영화를 보다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고 했다. 흑인들이 억눌렸던 감정을 영화에서 푸는 것과 <싱글즈>에 대한 여자의 반응이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김 : <싱글즈>를 보면서 주인공들이 여자라고 해서 특별히 나와 분리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동미는 이상이고 나난은 현실이다. 난 현실이 좋다. 좋다기보단 정이 간다. 내 스물아홉의 위기감을 이 영화 속의 여자들에게서 찾았다. <싱글즈>에서는 네 인물이 나오는데 극을 위해 잘 포장된 남자들보다는 여자들한테 내 스물아홉의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현실 속의 남과 여

변 : 우리 집에 아들이 한 명만 더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나는 동미와 나난을 보며 오히려 여자라서 더 자유로운 면이 있다고 본다. 부모들은 딸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라도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두 여자는 가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명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김 : 나도 우리 집에서 독자에 맏아들이다. 나의 위치에 대해 서서히 부담이 생기고 있다. 동미와 나난이 가족에 대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남성과 여자가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변 : 나는 여성들이 사고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이 정말 좋으면 결혼을 할 때도 집안일 잘하고 자신을 잘 도울 수 있는 남자를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과 결혼하려고 한다. 그걸 깰 필요가 있다. 그런 남자와 결혼해서 동등한 사회적 위치를 위해 일하고 살림하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수퍼우먼이 될 수 없지 않는가.

동미의 선택은 옳았나

김 : 싱글맘이 되기로 한 동미의 결정과 결혼을 포기한 나난의 결정은 어떻게 생각하나?

변 : 나 같으면 결혼한다. 평생 미국에서 살 것이 아니라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남편을 붙잡고, 미국에서 공부하다 귀국해 자신의 일을 찾는 방법도 괜찮다. 그게 이상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난이 지배인이라는 현실의 일을 하며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찾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결혼이 곧 일의 포기라는 등식을 깨고, 여자들 입장에서 돈 많은 남편을 활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자도 똑같다. “1000만원 벌어다주면 집에 있을래?” 이것은 내가 받고 싶은 질문이다. 그리고 동미의 결론은 이해할 수 없다. 화려한 싱글에 임신이라니. 한국사회가 각 분야에서는 의식이 발전하고 있지만, 미혼모에 대한 의식은 전혀 변한 것 같지 않다. 동미처럼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사는 여자가 애를 덜컥 낳아버리다니 평소의 행동과 전혀 다르다.

김 : 작년에 낙태를 소재로 한 단편영화를 하나 만들었다. 고등학생 커플 사이에 아이가 생겼고, 결국 낙태를 결정하게 되는데 병원에 가서 수술을 위해 주사를 맞은 후 자궁이 벌어지는 시간동안 벌어지는 일을 영화로 담았다. 그 과정에서 낙태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실제로 닥치지 않는 이상 쉽게 그 상황에서 낙태를 했어야 옳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것은 임신한 여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다. 그것을 공감하는 여자관객들도 많았을 것 같다.

변 : 여자들의 우정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여자들의 우정은 결혼을 하면서 많이 변한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다. 영화 <친구>에서 남자들의 우정이 각별하다는 메시지를 던지지만, 실제로 각자의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게 마련이다. 성별보다는 각자의 계급, 주어진 환경에 따라 남자든 여자든 우정을 유지해 나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결혼한 여자친구와 결혼한 남자친구는 통하는 면이 많지만 둘 중 하나가 싱글이면 우정이 유지되기 힘들다. 나난과 동미의 우정도 그래서 더 각별하다.

김 : 결혼한 커플들과 싱글이 갈리면서 점점 더 자신의 문화권 안에 있는 사람만 만나게 된다. 여자들은 결혼한 이후 더 고립되는 것을 지켜봤다. 그게 안타깝고 두렵다.

변 : 남자들도 애정 없는 섹스, 배려 없는 섹스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동미와 섹스하라고 하면 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결혼에 관해서라면 비슷하다. 사랑하는 애인이 있다 하더라도 결혼에 대한 고민을 또래 남자들도 많이 한다. 특히 스물아홉살 정도라면 비슷한 나이끼리 만나는 경우 남자는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여자가 결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결혼의 적령기라는 것이 정해져있고, 여자가 더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김 : 그런 면에서 20대 후반은 악순환의 시기인 것 같다. <싱글즈>에 나오는 두 남자를 모두 동일시 할 수 없었다. 물론 두 배우 다 좋은 연기와 좋은 이미지를 보여줬지만 여자가 바라는 남자일 뿐이라서 리얼리티가 약하다.

변 : 수헌(김주혁)의 역할도 변형된 형태의 남성우월주의에서 나온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여자가 받는 사회적 불평등은 내가 해결해 주겠다는 심리다. 그게 80년대에 비해 좀더 세련되게 포장됐다는 것뿐이다. 남자들의 연애는 철저하게 목표 지향적이다. 업무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위한 전략을 짜고 때론 훌륭한 노예가 되고자 한다. 그것이 꼭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여자들이 그것을 제대로 알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 <싱글즈> 홈페이지(http://4singles.co.kr)에서 한 네티즌은 싱글을 날씨라고 정의했다. 싱글의 생활은 예측할 수 없는 날씨 같기 때문이다. 20대 후반도 그렇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도 만나고 있는 사람에도 확신이 없다. <싱글즈>의 여자들은 그 경우의 수들을 하나씩 줄여가고 있는 단계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고양이를 부탁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싱글즈>까지. 영화 속의 여자들은 더 이상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여자들이 동감을 표하며 무릎을 치게 하는 요소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나난이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쿨한 척하느라 그 자리에서는 깔끔하게 헤어졌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가슴에서 때가 나올 때까지 울고 소리를 지른다. 그렇지만 그 날로 바로 끝이다. 나난에게 중요한 것은 남자보다 생활비니까. 떠난 사람을 향해 울부짖으며 사는 것조차 사치라고 느껴지는 게 바로 20대 후반이다.

동미도 마찬가지다. 원룸에서 혼자 생활하는 나난과 단지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이 불편하게 같이 사느니 맘 편한 남자친구 범수와 동거를 시작한다. 남자로서도 매력 없고 남편으로도 능력없는 동준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혼자 키우고, 친구 나난에게 아빠 역할을 맡긴다. 그렇지만 두 남자는 동미와 나난에게 거는 기대가 더 큰 모양이다. <싱글즈>에 드러난 여자들의 억압을 안타까워하면서도 20대 후반의 남성이 겪고 있는 갈등과 고통도 동미와 나난이 직시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들 곁에 있는 남성이야말로 두 여자의 욕망이며 환상일 뿐임을 경고했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2003/08/01 00:00 2003/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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