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연대를 위하여
2003/2003년 08월 :
2003/08/01 00:00
K 기자에게.
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는지요. 잠시 짬을 내 시원한 팥빙수나 한 그릇 함께 하고 싶지만 쉽게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휴가는 다녀왔는지요. 방학을 맞이했지만 그 동안 밀린 일로 오늘도 연구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창밖에 매미들은 쉼 없이 울어대고 한적한 캠퍼스에는 오가는 학생들의 활기찬 목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제 연구실 문에는 작은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습니다. 지난 9·11 테러 당시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 포스터들이 어지럽게 나붙어 있는 뉴욕의 골목길 구석에 한 소녀가 앉아 작은 곰인형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끔직한 테러와 해맑은 소녀가 대비되는 이 사진에는 평화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6월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서늘한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원인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있든 아니면 미국의 근본주의에 있든 폭력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그 일차적인 희생자는 다름 아닌 사회적 약자임을 상징적으로 증거하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문명이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공존에의 열망
오늘은 바로 이 사진을 선물한 친구를 만나 학교 앞 신촌으로 갑니다. 얼굴만 봐도, 말이 없어도 언제나 마음이 푸근해지는 친구와 함께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신촌은 제가 태어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의실 밖 세미나와 여가의 공간이었던 이곳 신촌의 골목 골목에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수많은 기억과 추억들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거리의 사회학도를 자처하면서 토론과 논쟁으로 숱한 밤을 보낸 곳도, 입대하는 친구들과 마지막 밤을 지새운 곳도, 김광석과 안치환과 동물원의 노래들을 들은 곳도 바로 여기 신촌입니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눕니다.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주변 동료들의 소식을 전하고 지나간 삶과 다가올 삶을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친구의 유쾌한 이야기 속에는 말로 전달되지 않는 어떤 외로움이 스며 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으로부터 문득 벗어났을 때 만나게 되는 이 외로움은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갈수록 형식화되는 삶이 가져다주는 황량함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는, 타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는 어떤 열망이기도 합니다. 친구의 외로움에는 그냥 미소로 답합니다. 친구 역시 제 외로움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관계와 공존에의 열망은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냥 미소로 답할 뿐입니다.
친구를 먼저 보내고 혼자 걷습니다. 자정이 넘어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신촌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넘쳐흐릅니다. 도시는 문명의 상징입니다. 문명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안락함을 안겨줬지만 동시에 또 다른 폭력과 소외를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로터리 쪽으로 걸어가다 현대백화점 옆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습니다. 이곳은 신촌의 유일한 야외 쉼터입니다. 몇몇 젊은 친구들은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조용히 속삭이고 또 다른 이들은 술 취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모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사회학에서 진정한 스승은 텍스트가 아니라 바로 이 동시대인들입니다. 단절의 벽을 넘어서 동시대인들 사이의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을 여는 것이 우리 시대에 부여된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찬란한 문이 되는
K 기자, 언젠가 제가 라스베이거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는지요. K 기자도 가본 적이 있겠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가다 15번 프리웨이를 갈아타고 한 네 시간 정도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모하비사막을 건너가야 합니다. 북쪽 끝에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이어지고 동쪽 끝에는 콜로라도강이 흐르는 모하비사막에는 거친 모래 바람 속에 메마른 풀들만 드문드문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불야성, 그곳이 바로 라스베이거스입니다. 아마도 이곳만큼 자연과 문명이 극적으로 공존하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라스베이거스는 우리 시대 자본주의 문명의 한 상징입니다. 20세기 초 다섯 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1940년대에는 8500명으로 늘어났고, 그러다 1980년에는 50만 명이 되었으며, 최근에는 125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일보다는 놀이가, 노동보다는 여가가 넘쳐흐르는 도시가 라스베이거스입니다. 그러기에 이 도시에는 밤이 없습니다. 낮과 밤이 뒤바뀐, 가장 허구적이면서도 더없이 현실적인 공간이 다름 아닌 라스베이거스입니다. 차를 세워 두고 화려한 호텔들의 네온사인 밀림 속으로 이어진 스트립을 혼자 걸어갑니다. 여피를 대표하는 가수 스팅은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이 도시를 외롭고 오래된 도시라고 노래 부른 적이 있습니다. 자본과 욕망이 만들어낸 놀라운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는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정작 만나게 되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문명이 고도화하면 할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에 맞서는 소통입니다. 타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소통은 우리 삶의 거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통을 통해 이루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존은 진정한 연대의 출발입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연대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 나가야 할 가치일 것입니다. 시인 김준태 선생이 노래하듯이 사람은 ‘벽이 아니라 문’입니다. 그 앞에 서성거릴 게 아니라 용기를 갖고 ‘열고 들어가야 할 찬란한 문’입니다. 고독과 외로움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에게 찬란한 문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진정 꿈꾸는 사회일 것입니다. 폭력과 소외의 문명을 평화와 연대의 문명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통의 문을 열 수 있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지만 소중한 ‘삶의 정치’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를 오늘 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새 노래를 부르던 젊은 친구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속삭이던 이들이나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 모두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촌 구석의 작은 공원에서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리고 친구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가 서로에게 찬란한 문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합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내내 건강하길 바랍니다. 그럼 다시 소식 드리지요.
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는지요. 잠시 짬을 내 시원한 팥빙수나 한 그릇 함께 하고 싶지만 쉽게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휴가는 다녀왔는지요. 방학을 맞이했지만 그 동안 밀린 일로 오늘도 연구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창밖에 매미들은 쉼 없이 울어대고 한적한 캠퍼스에는 오가는 학생들의 활기찬 목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제 연구실 문에는 작은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습니다. 지난 9·11 테러 당시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 포스터들이 어지럽게 나붙어 있는 뉴욕의 골목길 구석에 한 소녀가 앉아 작은 곰인형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끔직한 테러와 해맑은 소녀가 대비되는 이 사진에는 평화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6월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서늘한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원인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있든 아니면 미국의 근본주의에 있든 폭력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그 일차적인 희생자는 다름 아닌 사회적 약자임을 상징적으로 증거하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문명이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공존에의 열망
오늘은 바로 이 사진을 선물한 친구를 만나 학교 앞 신촌으로 갑니다. 얼굴만 봐도, 말이 없어도 언제나 마음이 푸근해지는 친구와 함께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신촌은 제가 태어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의실 밖 세미나와 여가의 공간이었던 이곳 신촌의 골목 골목에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수많은 기억과 추억들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거리의 사회학도를 자처하면서 토론과 논쟁으로 숱한 밤을 보낸 곳도, 입대하는 친구들과 마지막 밤을 지새운 곳도, 김광석과 안치환과 동물원의 노래들을 들은 곳도 바로 여기 신촌입니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눕니다.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주변 동료들의 소식을 전하고 지나간 삶과 다가올 삶을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친구의 유쾌한 이야기 속에는 말로 전달되지 않는 어떤 외로움이 스며 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으로부터 문득 벗어났을 때 만나게 되는 이 외로움은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갈수록 형식화되는 삶이 가져다주는 황량함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는, 타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는 어떤 열망이기도 합니다. 친구의 외로움에는 그냥 미소로 답합니다. 친구 역시 제 외로움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관계와 공존에의 열망은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냥 미소로 답할 뿐입니다.
친구를 먼저 보내고 혼자 걷습니다. 자정이 넘어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신촌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넘쳐흐릅니다. 도시는 문명의 상징입니다. 문명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안락함을 안겨줬지만 동시에 또 다른 폭력과 소외를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로터리 쪽으로 걸어가다 현대백화점 옆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습니다. 이곳은 신촌의 유일한 야외 쉼터입니다. 몇몇 젊은 친구들은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조용히 속삭이고 또 다른 이들은 술 취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모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사회학에서 진정한 스승은 텍스트가 아니라 바로 이 동시대인들입니다. 단절의 벽을 넘어서 동시대인들 사이의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을 여는 것이 우리 시대에 부여된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찬란한 문이 되는
K 기자, 언젠가 제가 라스베이거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는지요. K 기자도 가본 적이 있겠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가다 15번 프리웨이를 갈아타고 한 네 시간 정도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모하비사막을 건너가야 합니다. 북쪽 끝에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이어지고 동쪽 끝에는 콜로라도강이 흐르는 모하비사막에는 거친 모래 바람 속에 메마른 풀들만 드문드문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불야성, 그곳이 바로 라스베이거스입니다. 아마도 이곳만큼 자연과 문명이 극적으로 공존하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라스베이거스는 우리 시대 자본주의 문명의 한 상징입니다. 20세기 초 다섯 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1940년대에는 8500명으로 늘어났고, 그러다 1980년에는 50만 명이 되었으며, 최근에는 125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일보다는 놀이가, 노동보다는 여가가 넘쳐흐르는 도시가 라스베이거스입니다. 그러기에 이 도시에는 밤이 없습니다. 낮과 밤이 뒤바뀐, 가장 허구적이면서도 더없이 현실적인 공간이 다름 아닌 라스베이거스입니다. 차를 세워 두고 화려한 호텔들의 네온사인 밀림 속으로 이어진 스트립을 혼자 걸어갑니다. 여피를 대표하는 가수 스팅은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이 도시를 외롭고 오래된 도시라고 노래 부른 적이 있습니다. 자본과 욕망이 만들어낸 놀라운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는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정작 만나게 되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문명이 고도화하면 할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은 고독과 외로움에 맞서는 소통입니다. 타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소통은 우리 삶의 거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통을 통해 이루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존은 진정한 연대의 출발입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연대야말로 우리가 소중히 간직해 나가야 할 가치일 것입니다. 시인 김준태 선생이 노래하듯이 사람은 ‘벽이 아니라 문’입니다. 그 앞에 서성거릴 게 아니라 용기를 갖고 ‘열고 들어가야 할 찬란한 문’입니다. 고독과 외로움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에게 찬란한 문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진정 꿈꾸는 사회일 것입니다. 폭력과 소외의 문명을 평화와 연대의 문명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통의 문을 열 수 있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지만 소중한 ‘삶의 정치’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를 오늘 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새 노래를 부르던 젊은 친구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속삭이던 이들이나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 모두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촌 구석의 작은 공원에서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리고 친구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가 서로에게 찬란한 문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합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내내 건강하길 바랍니다. 그럼 다시 소식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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