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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월간 참여사회</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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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nguage>ko</language>
		<pubDate>Mon, 12 May 2008 16:48: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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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월간 참여사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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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이제훈이 만난 사람]통속의 최고봉 꿈꾸는, 곰삭은 김치 맛 배우</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972</link>
			<description>&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배우 박철민&lt;BR&gt;&lt;BR&gt;&lt;/STRONG&gt;&lt;/FONT&gt;&lt;BR&gt;글 &amp;nbsp;&amp;nbsp; 이제훈 &amp;lt;한겨레&amp;gt;통일팀장&lt;BR&gt;사진 김영광&lt;BR&gt;&lt;BR&gt;&lt;BR&gt;배우 박철민. 많은 이들이 그를 ‘명품 조연’이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다. ‘정성껏 차린 밥상의 김치 같은 배우’라고. 김치가 그 밥상의 주연인지 조연인지는 별로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이 좀 든 한국인 가운데 김치 없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lt;BR&gt;&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center&quot;&gt;&lt;IMG height=750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271670124.jpg&quot; width=500&gt;&lt;/DIV&gt;
&lt;P class=바탕글&gt;봄볕 좋던 4월 16일 낮 참여연대 4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1시간 30분 남짓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방 안의 많은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고, 참 많이 웃게 했다. 인터뷰와 관계없는 참여연대 활동가 몇몇이 끝까지 앉아 그의 얘기를 들었던 걸 보면, 그가 스타임에는 분명하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 대목에서도 박철민이 누구인지 가물가물한 이들은 자신이 대중문화와 담 쌓고 사는 사람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가끔은 영화도 보고 텔레비전 드라마도 보고 사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영화 &amp;lt;화려한 휴가&amp;gt;와 드라마 &amp;lt;뉴하트&amp;gt;에 그가 나왔다. 더 이상은 설명 사절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5월호에 왜 배우 박철민을 초대했냐고? 올 들어 계속 하드보일드로 질러댔으니, 좀 부드럽게 쉬어가고 싶은 맘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박철민에게 광주는 탯줄과도 같은 그 무엇이다. 배우로서도, 그저 한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도. 이 얘기는 좀 뒤에 하기로 하고, 이제 시작하자. &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한방으로 승부하지 않는다&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그와의 말문을 연 첫 질문은 ‘돈’에 관한 것이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요즘 소주 광고하시더라고요. 돈 좀 버셨겠어요. 광고는 많이 들어오나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대답이 장관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각 업종에서 일단 입질이 들어와요. 어떤 업종이든 맘에 들어요. 머니가 생기니까. 다다익선, 일단은 양으로! 광고는 투입대비 산출이 높아요. 대중노출 빈도도 높고. 하지만 광고 섭외는 100건 가운데 한 두 건만 성사돼요.”&lt;/P&gt;
&lt;P class=바탕글&gt;이번엔 그에게 ‘어떤 작품을 계기로 대중스타로 떴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수많은 배우들이 한 작품으로 결정 나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 작품이 필요하죠. 영화에선 &amp;lt;목포는 항구다&amp;gt;로 인정받았고, &amp;lt;화려한 휴가&amp;gt;로 떴죠. 드라마에선 &amp;lt;불멸의 이순신&amp;gt;의 김완 장군으로 인정을 받았고, &amp;lt;뉴하트&amp;gt;로 이름을 알렸죠. 요즘은 사람들 만나면 ‘뒤질랜드 좀 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삶이 로또도 아니고, 한방에 뭔가를 해보려는 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지당하신 말씀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자기 강제성 기부 공개선언&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스타로 떴으니 돈도 많이 벌었을 거 같아 물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돈 많이 버셨냐? 돈을 엄청 많이 벌게 된다면 뭘 하고 싶으신가?” &lt;/P&gt;
&lt;P class=바탕글&gt;직답은 없었다. 복잡한, 하지만 진지한 답변이 나왔다. &lt;BR&gt;&lt;BR&gt;“무명 연극배우 시절 삼겹살에 소주, 치킨에 맥주를 맘껏 먹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제가 사인할 때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고 적어요. 그렇게 사는 건 아니고, 살고 싶어서죠. 참여연대 등 몇 군데 기부하고 있는데, 아직은 부족하죠. 사치를 해도 남을 만큼 벌 수 있다면 모아지기 전에 수입의 몇 %는 기부하고 싶어요. 올해 안에 적절한 기회를 봐서 대중들한테 ‘수입의 몇 %는 기부하겠다’고 약속할 생각이에요. 아름다운 기부는 소리 소문 없이 하는 거라지만 전 속물이라 동네방네 소문내며 할 거에요. 실은 대중과 약속이라는 자기강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술 마시고는 20만 원 기부해야지 마음먹었다가 다음날 술 깨고 나서는 정작 5만원만 기부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lt;/P&gt;
&lt;P class=바탕글&gt;개봉박두. 또 한명의 ‘기부 마니아’가 아름답게 등장할 날이 머지않았다.&lt;BR&gt;&lt;BR&gt;&lt;STRONG&gt;“느자구 없는 연기, 그게 삶이다”&lt;BR&gt;&lt;BR&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center&quot;&gt;&lt;IMG style=&quot;CURSOR: pointer&quot; onclick=&quot;open_img(&#039;/attach/19/1123434672.jpg&#039;); return false;&quot; height=247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123434672.jpg&quot; width=376&gt;&lt;/DIV&gt;&lt;/STRONG&gt;
&lt;P class=바탕글&gt;배우를 만났으니 작품과 연기에 대해 묻는 게 예의. 다시 돌아가자. 배우 박철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걸쭉한 입심과 화려 찬란한 애드리브다. 그래서 물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왜 좋아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용수철처럼 답변이 돌아왔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느자구 없는 연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느자구 없다’는 ‘철없다, 속없다’의 남도 말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뭔가 흐트러진, 불안하고 불균형한, 틀린 답안 같은, 하지만 친숙한, 그런 캐릭터라 좋아하는 거 같아요. 한데 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곰삭은 김치 맛 나는 대답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텔레비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선 종종 그를 ‘애드리브의 대가’로 묘사한다. 정작 그는 다소 조심스럽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애드리브 잘하는 게 자랑은 아니에요. 씌어 있는 대사를 멋지게 소화하는 게 최고배우죠. 애드리브를 싫어하는 작가나 감독님도 많아요. 그래서 애드리브 잘한다는 평가가 좀 부담스러워요. 한데 저한테 주어진 배역이 대체로 웃음을 유발하고, 쉬었다 가는 이완의 효과를 주는 게 많아요. 맛깔스럽고 찰지고 걸쭉하고 구성진 대사를 찾다보면 애드리브를 하게 되지요. 제가 하는 애드리브의 60~70%는 주어진 대사의 여백을 고민하며 만들어낸 거예요. 즉흥적인 애드리브는 없어요. 대본을 수백 번씩 읽으며 캐릭터를 파고들고 그렇게 새로운 비유와 은유를 찾아내는 거지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입심은 당근 그가 성장기를 보낸 남도의 선물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고향에 가면 한 집안에 한두 명 정도는 구성지게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산과 들이 많고 물산이 풍성해서 그런가, 옛적부터 유배가 많아 글쓰기 말하기에 능한 분들이 많아서 그런가….” &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대중예술로 나누고 싶은 역사, 광주&lt;/STRONG&gt;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center&quot;&gt;&lt;IMG height=450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327122693.jpg&quot; width=300&gt;&lt;/DIV&gt;&lt;BR&gt;&lt;BR&gt;그의 말투나 어휘 선택이나, 말의 내용 어디를 봐도 남도, 광주의 흔적이 느껴진다. 광주는 그가 초중고 시절을 보낸 곳이다. 1980년 5월 그 광주 때 그는 광주에 있었다. 중학생이었다. 
&lt;P class=바탕글&gt;그에게 ‘광주’에 대한 소회를 묻고 싶었다. ‘광주’의 무게감 탓인가, 질문이 정연하게 나오지 않았다. 하여튼 나는 뭔가 물었고, 그는 말했다. &lt;BR&gt;&lt;/P&gt;
&lt;P class=바탕글&gt;“광주라는 단어 자체가 설레고 살아 있고 보기 싫고 밉고 감추고 싶고, 한마디로 뭐라 말하기 어려운 복합적 감정이죠. 80년 광주 때의 6·25보다 지금 광주는 훨씬 멀지만 저한텐 바로 옆, 앞, 속에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한테 광주는, 저한테 6·25나 다를 바 없을 거예요. 그런 광주가 되어버렸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역사란 그런 거잖아요. 동학도 그렇고. ‘왜 광주에 관심이 없느냐’ 물을 수는 없는 일이죠. 그래서 영화 &amp;lt;화려한 휴가&amp;gt;가 의미 있고 남달랐어요.”&lt;/P&gt;
&lt;P class=바탕글&gt;영화 &amp;lt;화려한 휴가&amp;gt;는 1980년 5월 17일부터 5월 27일까지의 광주를 주인공 남녀의 사랑이야기에 버무려 정면으로 다뤘다. 750만의 관객이 들었다. 광주의 무게가 엄청난 만큼 당연히 찬반 의견이 엇갈렸다. 광주를 ‘값싼 사랑’에 빗댄 ‘대중적 통속적 상업적 영화’라거나, ‘이건 진정한 광주가 아니다. 왜곡됐다’는 비판도 있었다. 박철민은 목울대를 떨며 말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80년 5월 광주엔 실제 값싼 사랑도, 값싼 인생도 많았어요. 대중적 통속적 상업적 영화라 자랑스럽고 훌륭한 영화라 생각해요. 더 깊은 얘기는 책 보면 되는 거죠. 영화에 모든 걸 요구해선 곤란하죠. 영화 &amp;lt;화려한 휴가&amp;gt;가 극장에 걸린 뒤에 네이버에 운동이란 검색어를 치면 광주가 1위로 올라왔어요. 살빼기 운동이 아니라. 광주를 몰랐던 요즘 젊은이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거죠. 전 생각했죠. 나누고 싶은 역사는 예술로 만나는 게 좋겠다고.”&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amp;lt;태백산맥&amp;gt;의 염상구와 &amp;lt;전국노래자랑&amp;gt; 사회자&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사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광주를 다룬 첫 장편 극영화인 &amp;lt;부활의 노래&amp;gt;다. 이경영이 주연을 맡아 서울에서는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장사는 안 됐다. 그는 그 영화에 ‘시민 K&#039;라는 단역으로 나왔다. 제작진으로 있던 지인이 “사우나 값이나 벌어봐라”고 해서 출연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출연작도 광주를 다뤘다. &amp;lt;화려한 휴가&amp;gt;에 이어 개봉한 &amp;lt;스카우트&amp;gt;. 스카우터로 분한 임창정이 당대의 최고 투수 선동열을 끌어가려고 애쓰는 얘기다. 그는 여주인공 엄지원을 짝사랑하는 동네 주먹 곤태 역을 맡았다. 임창정의 코미디와 선동열의 스포츠를 앞세웠지만, 실은 광주 얘기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아시는가. 1982년 전두환의 ‘3S&#039;라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과거사를. 그때 왜 전국 각지의 남도 사람들이 해태타이거즈를 열화같이 응원하며, &amp;lt;목포의 눈물&amp;gt;을 목 놓아 불렀는지를…. 영화는 관객이 35만 명밖에 들지 않아, 박철민 말로는 “개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평론가들이 최고의 영화로 꼽은 이 작품에서 그는 광주를 새삼 느꼈고, ‘배우 박철민’의 다른 색깔을 보일 수 있어서 좋았단다. 궁금한 분들은 한번 보시길.&lt;/P&gt;
&lt;P class=바탕글&gt;대중스타 박철민이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조정래의 &amp;lt;태백산맥&amp;gt;에 나오는 염상구 역을 맡아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송해 선생님의 뒤를 이어”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를 맡아보는 일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전국노래자랑은 가장 통속적이고 대중적이고 상업적이죠. 전 전국노래자랑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통속의 최고봉이 되고 싶어요.”&lt;BR&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CLEAR: both; TEXT-ALIGN: center&quot;&gt;&lt;IMG height=450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391721468.jpg&quot; width=300&gt;&lt;/DIV&gt;&lt;BR&gt;&lt;BR&gt;박철민은 1967년생이다. 전주 외가에서 다섯 살 때까지 살다가 광주로 옮겨와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깡패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조대부고(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에서 연극반 생활을 했다. 책은 읽기보다는 팔아먹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늘 “언제 공부할래? 이 썩을 놈아”라고 하소연하셨다. 최소한 대학은 들어가는 게 자식 된 도리다 싶어 1985년 중앙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경영학 공부는 하지 않았다. 대신 연극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김지하의 &amp;lt;금관의 예수&amp;gt; &amp;lt;밥&amp;gt; 등을 공연하다,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87년엔 얼결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 노릇도 했다. 대학 4학년 때 ‘노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공연하는’ 극단 &amp;lt;현장&amp;gt;에 들어갔다. 4~5년 거기서 지내다, 그만두고 나와 트럭을 몰며 과일 장사를 2년 정도 했다. 그리곤 이후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고, 충무로에서 영화를 찍었고, 최근엔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광고도 찍으며 산다. 한마디로 ‘떴다.’ 연극무대는 배우 박철민의 수구초심의 발원지다. &lt;/FONT&gt;&lt;/STRONG&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결혼은 숙명여대 연극반 출신인, 극단 &amp;lt;현장&amp;gt;의 동료와 1991년에 했다. 딸이 둘 있다. 특히 중3인 큰 딸은 ‘저렇게 공부하는 게 좋을까, 저 아이가 내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만날 “제발 잠 좀 자라”고 한다. &lt;/FONT&gt;&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뿌듯할 땐 생맥주를 마신다. 잘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답답하고 고민스럽고 ‘이제 배우 그만 해야겠다’ 싶을 땐 치과의사 노릇을 하는 친한 형과 소주를 마신다. 안주는 번데기탕. 30대 초반까지는 가게 술 다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지금은 소주는 한 병, 맥주는 1500cc 정도 마신다. 담배는 3년 전에 끊었다. &lt;/FONT&gt;&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중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박철민은 “한국사회가 모든 사안에서 너무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균형을 좀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대선과 총선을 치르며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고 한다.&lt;/FONT&gt;&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BR&gt;&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object width=&quot;400&quot; height=&quot;345&quot; classid=&quot;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quot; codebase=&quot;http://fpdownload.macromedia.com/pub/shockwave/cabs/flash/swflash.cab#version=9,0,28,0&quot; id=&quot;V000192613&quot;&gt;&lt;param name=&quot;movie&quot; value=&quot;http://play.tagstory.com/player/TS00@V000192613@S000000001&quot; /&gt;&lt;param name=&quot;allowScriptAccess&quot; value=&quot;always&quot; /&gt;&lt;param name=&quot;allowFullScreen&quot; value=&quot;true&quot; /&gt;&lt;param name=&quot;quality&quot; value=&quot;high&quot; /&gt;&lt;embed src=&quot;http://play.tagstory.com/player/TS00@V000192613@S000000001&quot; width=&quot;400&quot; height=&quot;345&quot; name=&quot;V000192613&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quality=&quot;high&quot; type=&quot;application/x-shockwave-flash&quot; pluginspage=&quot;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quot;&gt;&lt;/embed&gt;&lt;/object&gt;&lt;/DIV&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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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acham)</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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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9 May 2008 20:04:31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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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제훈이 만난 사람_통속의 최고봉 꿈꾸는, 곰삭은 김치맛 배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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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class=바탕글&gt;&lt;BR&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6699 size=5&gt;&lt;STRONG&gt;통속의 최고봉 꿈꾸는, 곰삭은 김치 맛 배우&lt;BR&gt;&lt;/STRONG&gt;&lt;/FONT&gt;&lt;FONT color=#8e8e8e&gt;&lt;BR&gt;&lt;STRONG&gt;배우 박철민&lt;BR&gt;&lt;BR&gt;&lt;/STRONG&gt;&lt;/FONT&gt;&lt;BR&gt;글 &amp;nbsp;&amp;nbsp; 이제훈 &amp;lt;한겨레&amp;gt;통일팀장&lt;BR&gt;사진 김영광&lt;BR&gt;&lt;BR&gt;&lt;BR&gt;배우 박철민. 많은 이들이 그를 ‘명품 조연’이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다. ‘정성껏 차린 밥상의 김치 같은 배우’라고. 김치가 그 밥상의 주연인지 조연인지는 별로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이 좀 든 한국인 가운데 김치 없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lt;BR&gt;&lt;BR&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271670124.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750&quot; width=&quot;500&quot; /&gt;&lt;/div&gt;&lt;/P&gt;
&lt;P class=바탕글&gt;봄볕 좋던 4월 16일 낮 참여연대 4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1시간 30분 남짓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방 안의 많은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고, 참 많이 웃게 했다. 인터뷰와 관계없는 참여연대 활동가 몇몇이 끝까지 앉아 그의 얘기를 들었던 걸 보면, 그가 스타임에는 분명하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이 대목에서도 박철민이 누구인지 가물가물한 이들은 자신이 대중문화와 담 쌓고 사는 사람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가끔은 영화도 보고 텔레비전 드라마도 보고 사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영화 &amp;lt;화려한 휴가&amp;gt;와 드라마 &amp;lt;뉴하트&amp;gt;에 그가 나왔다. 더 이상은 설명 사절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5월호에 왜 배우 박철민을 초대했냐고? 올 들어 계속 하드보일드로 질러댔으니, 좀 부드럽게 쉬어가고 싶은 맘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박철민에게 광주는 탯줄과도 같은 그 무엇이다. 배우로서도, 그저 한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도. 이 얘기는 좀 뒤에 하기로 하고, 이제 시작하자. &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한방으로 승부하지 않는다&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그와의 말문을 연 첫 질문은 ‘돈’에 관한 것이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요즘 소주 광고하시더라고요. 돈 좀 버셨겠어요. 광고는 많이 들어오나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대답이 장관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각 업종에서 일단 입질이 들어와요. 어떤 업종이든 맘에 들어요. 머니가 생기니까. 다다익선, 일단은 양으로! 광고는 투입대비 산출이 높아요. 대중노출 빈도도 높고. 하지만 광고 섭외는 100건 가운데 한 두 건만 성사돼요.”&lt;/P&gt;
&lt;P class=바탕글&gt;이번엔 그에게 ‘어떤 작품을 계기로 대중스타로 떴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수많은 배우들이 한 작품으로 결정 나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 작품이 필요하죠. 영화에선 &amp;lt;목포는 항구다&amp;gt;로 인정받았고, &amp;lt;화려한 휴가&amp;gt;로 떴죠. 드라마에선 &amp;lt;불멸의 이순신&amp;gt;의 김완 장군으로 인정을 받았고, &amp;lt;뉴하트&amp;gt;로 이름을 알렸죠. 요즘은 사람들 만나면 ‘뒤질랜드 좀 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삶이 로또도 아니고, 한방에 뭔가를 해보려는 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지당하신 말씀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자기 강제성 기부 공개선언&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스타로 떴으니 돈도 많이 벌었을 거 같아 물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돈 많이 버셨냐? 돈을 엄청 많이 벌게 된다면 뭘 하고 싶으신가?” &lt;/P&gt;
&lt;P class=바탕글&gt;직답은 없었다. 복잡한, 하지만 진지한 답변이 나왔다. &lt;BR&gt;&lt;BR&gt;“무명 연극배우 시절 삼겹살에 소주, 치킨에 맥주를 맘껏 먹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제가 사인할 때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고 적어요. 그렇게 사는 건 아니고, 살고 싶어서죠. 참여연대 등 몇 군데 기부하고 있는데, 아직은 부족하죠. 사치를 해도 남을 만큼 벌 수 있다면 모아지기 전에 수입의 몇 %는 기부하고 싶어요. 올해 안에 적절한 기회를 봐서 대중들한테 ‘수입의 몇 %는 기부하겠다’고 약속할 생각이에요. 아름다운 기부는 소리 소문 없이 하는 거라지만 전 속물이라 동네방네 소문내며 할 거에요. 실은 대중과 약속이라는 자기강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술 마시고는 20만 원 기부해야지 마음먹었다가 다음날 술 깨고 나서는 정작 5만원만 기부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lt;/P&gt;
&lt;P class=바탕글&gt;개봉박두. 또 한명의 ‘기부 마니아’가 아름답게 등장할 날이 머지않았다.&lt;BR&gt;&lt;BR&gt;&lt;STRONG&gt;“느자구 없는 연기, 그게 삶이다”&lt;BR&gt;&lt;BR&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123434672.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247&quot; width=&quot;376&quot; /&gt;&lt;/div&gt;&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배우를 만났으니 작품과 연기에 대해 묻는 게 예의. 다시 돌아가자. 배우 박철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걸쭉한 입심과 화려 찬란한 애드리브다. 그래서 물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왜 좋아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용수철처럼 답변이 돌아왔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느자구 없는 연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느자구 없다’는 ‘철없다, 속없다’의 남도 말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뭔가 흐트러진, 불안하고 불균형한, 틀린 답안 같은, 하지만 친숙한, 그런 캐릭터라 좋아하는 거 같아요. 한데 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곰삭은 김치 맛 나는 대답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텔레비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선 종종 그를 ‘애드리브의 대가’로 묘사한다. 정작 그는 다소 조심스럽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애드리브 잘하는 게 자랑은 아니에요. 씌어 있는 대사를 멋지게 소화하는 게 최고배우죠. 애드리브를 싫어하는 작가나 감독님도 많아요. 그래서 애드리브 잘한다는 평가가 좀 부담스러워요. 한데 저한테 주어진 배역이 대체로 웃음을 유발하고, 쉬었다 가는 이완의 효과를 주는 게 많아요. 맛깔스럽고 찰지고 걸쭉하고 구성진 대사를 찾다보면 애드리브를 하게 되지요. 제가 하는 애드리브의 60~70%는 주어진 대사의 여백을 고민하며 만들어낸 거예요. 즉흥적인 애드리브는 없어요. 대본을 수백 번씩 읽으며 캐릭터를 파고들고 그렇게 새로운 비유와 은유를 찾아내는 거지요.” &lt;/P&gt;
&lt;P class=바탕글&gt;입심은 당근 그가 성장기를 보낸 남도의 선물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고향에 가면 한 집안에 한두 명 정도는 구성지게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산과 들이 많고 물산이 풍성해서 그런가, 옛적부터 유배가 많아 글쓰기 말하기에 능한 분들이 많아서 그런가….” &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대중예술로 나누고 싶은 역사, 광주&lt;/STRONG&gt; &lt;/P&gt;
&lt;P class=바탕글&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327122693.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450&quot; width=&quot;300&quot; /&gt;&lt;/div&gt;&lt;BR&gt;&lt;BR&gt;그의 말투나 어휘 선택이나, 말의 내용 어디를 봐도 남도, 광주의 흔적이 느껴진다. 광주는 그가 초중고 시절을 보낸 곳이다. 1980년 5월 그 광주 때 그는 광주에 있었다. 중학생이었다.&lt;/P&gt;
&lt;P class=바탕글&gt;그에게 ‘광주’에 대한 소회를 묻고 싶었다. ‘광주’의 무게감 탓인가, 질문이 정연하게 나오지 않았다. 하여튼 나는 뭔가 물었고, 그는 말했다. &lt;BR&gt;&lt;/P&gt;
&lt;P class=바탕글&gt;“광주라는 단어 자체가 설레고 살아 있고 보기 싫고 밉고 감추고 싶고, 한마디로 뭐라 말하기 어려운 복합적 감정이죠. 80년 광주 때의 6·25보다 지금 광주는 훨씬 멀지만 저한텐 바로 옆, 앞, 속에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한테 광주는, 저한테 6·25나 다를 바 없을 거예요. 그런 광주가 되어버렸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역사란 그런 거잖아요. 동학도 그렇고. ‘왜 광주에 관심이 없느냐’ 물을 수는 없는 일이죠. 그래서 영화 &amp;lt;화려한 휴가&amp;gt;가 의미 있고 남달랐어요.”&lt;/P&gt;
&lt;P class=바탕글&gt;영화 &amp;lt;화려한 휴가&amp;gt;는 1980년 5월 17일부터 5월 27일까지의 광주를 주인공 남녀의 사랑이야기에 버무려 정면으로 다뤘다. 750만의 관객이 들었다. 광주의 무게가 엄청난 만큼 당연히 찬반 의견이 엇갈렸다. 광주를 ‘값싼 사랑’에 빗댄 ‘대중적 통속적 상업적 영화’라거나, ‘이건 진정한 광주가 아니다. 왜곡됐다’는 비판도 있었다. 박철민은 목울대를 떨며 말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80년 5월 광주엔 실제 값싼 사랑도, 값싼 인생도 많았어요. 대중적 통속적 상업적 영화라 자랑스럽고 훌륭한 영화라 생각해요. 더 깊은 얘기는 책 보면 되는 거죠. 영화에 모든 걸 요구해선 곤란하죠. 영화 &amp;lt;화려한 휴가&amp;gt;가 극장에 걸린 뒤에 네이버에 운동이란 검색어를 치면 광주가 1위로 올라왔어요. 살빼기 운동이 아니라. 광주를 몰랐던 요즘 젊은이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거죠. 전 생각했죠. 나누고 싶은 역사는 예술로 만나는 게 좋겠다고.”&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amp;lt;태백산맥&amp;gt;의 염상구와 &amp;lt;전국노래자랑&amp;gt; 사회자&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사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광주를 다룬 첫 장편 극영화인 &amp;lt;부활의 노래&amp;gt;다. 이경영이 주연을 맡아 서울에서는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장사는 안 됐다. 그는 그 영화에 ‘시민 K&#039;라는 단역으로 나왔다. 제작진으로 있던 지인이 “사우나 값이나 벌어봐라”고 해서 출연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출연작도 광주를 다뤘다. &amp;lt;화려한 휴가&amp;gt;에 이어 개봉한 &amp;lt;스카우트&amp;gt;. 스카우터로 분한 임창정이 당대의 최고 투수 선동열을 끌어가려고 애쓰는 얘기다. 그는 여주인공 엄지원을 짝사랑하는 동네 주먹 곤태 역을 맡았다. 임창정의 코미디와 선동열의 스포츠를 앞세웠지만, 실은 광주 얘기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아시는가. 1982년 전두환의 ‘3S&#039;라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과거사를. 그때 왜 전국 각지의 남도 사람들이 해태타이거즈를 열화같이 응원하며, &amp;lt;목포의 눈물&amp;gt;을 목 놓아 불렀는지를…. 영화는 관객이 35만 명밖에 들지 않아, 박철민 말로는 “개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평론가들이 최고의 영화로 꼽은 이 작품에서 그는 광주를 새삼 느꼈고, ‘배우 박철민’의 다른 색깔을 보일 수 있어서 좋았단다. 궁금한 분들은 한번 보시길.&lt;/P&gt;
&lt;P class=바탕글&gt;대중스타 박철민이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조정래의 &amp;lt;태백산맥&amp;gt;에 나오는 염상구 역을 맡아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송해 선생님의 뒤를 이어”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를 맡아보는 일이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전국노래자랑은 가장 통속적이고 대중적이고 상업적이죠. 전 전국노래자랑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통속의 최고봉이 되고 싶어요.”&lt;BR&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391721468.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450&quot; width=&quot;300&quot; /&gt;&lt;/div&gt;&lt;BR&gt;&lt;BR&gt;박철민은 1967년생이다. 전주 외가에서 다섯 살 때까지 살다가 광주로 옮겨와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깡패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조대부고(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에서 연극반 생활을 했다. 책은 읽기보다는 팔아먹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늘 “언제 공부할래? 이 썩을 놈아”라고 하소연하셨다. 최소한 대학은 들어가는 게 자식 된 도리다 싶어 1985년 중앙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경영학 공부는 하지 않았다. 대신 연극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김지하의 &amp;lt;금관의 예수&amp;gt; &amp;lt;밥&amp;gt; 등을 공연하다,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87년엔 얼결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 노릇도 했다. 대학 4학년 때 ‘노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공연하는’ 극단 &amp;lt;현장&amp;gt;에 들어갔다. 4~5년 거기서 지내다, 그만두고 나와 트럭을 몰며 과일 장사를 2년 정도 했다. 그리곤 이후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고, 충무로에서 영화를 찍었고, 최근엔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광고도 찍으며 산다. 한마디로 ‘떴다.’ 연극무대는 배우 박철민의 수구초심의 발원지다. &lt;/FONT&gt;&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결혼은 숙명여대 연극반 출신인, 극단 &amp;lt;현장&amp;gt;의 동료와 1991년에 했다. 딸이 둘 있다. 특히 중3인 큰 딸은 ‘저렇게 공부하는 게 좋을까, 저 아이가 내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만날 “제발 잠 좀 자라”고 한다. &lt;/FONT&gt;&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뿌듯할 땐 생맥주를 마신다. 잘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답답하고 고민스럽고 ‘이제 배우 그만 해야겠다’ 싶을 땐 치과의사 노릇을 하는 친한 형과 소주를 마신다. 안주는 번데기탕. 30대 초반까지는 가게 술 다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지금은 소주는 한 병, 맥주는 1500cc 정도 마신다. 담배는 3년 전에 끊었다. &lt;/FONT&gt;&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중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박철민은 “한국사회가 모든 사안에서 너무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균형을 좀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대선과 총선을 치르며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고 한다.&lt;/FONT&gt;&lt;/STRONG&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월간참여사회</category>
			<author>(acham)</author>
			<guid>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971</guid>
			<comments>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971#entry20971comment</comments>
			<pubDate>Mon, 28 Apr 2008 22:36:36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이제훈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은 일본을 닮아가는가?_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17</link>
			<description>&lt;P&gt;&lt;STRONG&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6699 size=5&gt;&lt;br /&gt;대한민국은 일본을 닮아가는가?&lt;/FONT&gt;&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gt;&lt;FONT size=3&gt;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lt;/FONT&gt;&lt;br /&gt;&lt;/FONT&gt;&lt;/STRONG&gt;&lt;/P&gt;
&lt;P&gt;&lt;br /&gt;글 &amp;nbsp; &amp;nbsp; &lt;STRONG&gt;이제훈&lt;/STRONG&gt;&amp;lt;한겨레&amp;gt; 통일팀장 &lt;A href=&quot;mailto:nomad@hani.co.kr&quot;&gt;nomad@hani.co.kr&lt;/A&gt;&lt;br /&gt;사진&amp;nbsp; &lt;STRONG&gt;김영광&lt;/STRONG&gt; 사진가 &lt;A href=&quot;mailto:k-photo@hanmail.net&quot;&gt;k-photo@hanmail.net&lt;/A&gt;&lt;br /&gt;&lt;/P&gt;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370009975.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675&quot; width=&quot;450&quot; /&gt;&lt;/div&gt;&lt;br /&gt;&lt;br /&gt;&lt;FONT color=#006699&gt;&lt;FONT color=#000000&gt;“2006년 4월 이후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개인으로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변화가 너무 빨라 당혹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을 당시 일본에 있던 나는 기억하는데, 한국의 젊은이들은 모른다. 오히려 내가 그 시절 얘기를 해줘야 하는 그런 상황이 당혹스럽다.”&lt;/FONT&gt;&lt;br /&gt;&lt;/FONT&gt;&lt;br /&gt;서경식 도쿄게이자이(경제)대학 교수(현대법학부)는 한국에서 지낸 2년 가까운 생활의 소회를 이렇게 정리했다. 요약하자면, 한국사회의 ‘망각’은 당혹스럽고 두려운 변화다. 이 소회의 문맥은 깊고 넓다. 이제 그 갈피를 헤쳐보자(인터뷰는 1월 16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그의 아파트에서 이뤄졌다). &amp;nbsp; &lt;/P&gt;
&lt;P&gt;&lt;STRONG&gt;한국서도 일본서도 관찰자로 그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lt;/STRONG&gt;&lt;/P&gt;
&lt;P&gt;서경식(57세)의 거처는 일본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주류는커녕 온전한 ‘일원’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두 사회에 걸쳐 참여자이자 관찰자다. ‘마이너리티’(소수자)다. 한국과 일본을 묶고 가르는 ‘슬픈 역사’는 그를 세상에 내놓은 자궁이자 젖줄이었고, 현재이자 미래다. 대담집 「만남」을 서경식과 함께 펴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그를 ‘역사의 화석’이라고 불렀고, 그와의 대좌를 ‘역사와의 만남’이라고 했다.&lt;/P&gt;
&lt;P&gt;서경식은 중년에 접어든 뒤 스스로를 ‘코리안 디아스포라’(조선인 이산자)라고 규정한다. “20세기 국민국가 식민지시대를 거치며 원래 살던 공동체를 떠나야 했던 이들과 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삶은 예외적이지 않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현대 인류의 역사에서 오히려 보편적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부터 누군가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일단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lt;br /&gt;&lt;/P&gt;
&lt;P&gt;&lt;STRONG&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227094143.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333&quot; width=&quot;500&quot; /&gt;&lt;p class=&quot;cap1&quot;&gt;서경식 교수(오른쪽)와 필자 이제훈 기자(왼쪽)&lt;/p&gt;&lt;/div&gt;&lt;br /&gt;&lt;br /&gt;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이산자의 슬픔&lt;/STRONG&gt;&lt;br /&gt;&lt;br /&gt;‘디아스포라’(Diaspora). 원래 ‘이산&#039;(離散)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대문자로 쓰면,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이래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amp;nbsp; &lt;br /&gt;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 민족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lt;br /&gt;&lt;br /&gt;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이후 그곳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노예들, 북아메리카의 노예해방 이후 그 빈자리를 메우려고 등장한 중국인 노동자들(쿨리), 이스라엘 민족이 서아시아(이른바 중동)의 심장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는 사이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 등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와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모두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다.(거기엔 유대 시오니즘의 불행한 결과인, 팔레스타인 난민과 서아시아의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이라는 역설 또한 존재한다. 진실은 복잡하다) &lt;br /&gt;그래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약소민족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외세의 침략에 짓밟힌 약소민족의 힘없는 민중들의. &lt;br /&gt;&lt;br /&gt;&lt;STRONG&gt;진실은 모든 타자와의 대화 거쳐 조금씩 다가가는 것&lt;/STRONG&gt;&lt;br /&gt;&lt;br /&gt;서경식의 ‘디아스포라’는 신화로 덧칠된 유대인의 그것보다는, 20세기 중반 이후 ‘고난 받는 소수 민족’의 상징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그것에 가깝다. 하여, 서경식의 삶과 정신에서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중요하다.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맞섰던 사이드는 ‘저항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67년(제3차 중동전쟁) 이후 어느 시점에서 나는 ‘소집’당했다. 팔레스타인 투쟁은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의 승산이 없었지만 계속 진실을 설파하려는 의지의 문제였다.” 그리고 서경식은 말한다. &lt;br /&gt;&lt;br /&gt;“(사이드의 대답은) 현대 지식인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 사람인 나 또한 사이드가 남긴 말을 잊지 않고 진실을 계속 이야기해가려 한다.”(「시대를 건너는 법」, 한겨레출판) &lt;br /&gt;&lt;br /&gt;그에게 진실이란 “모든 타자와의 대화를 거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 방법은 강자와 이른바 ‘선진국’들이 독점해온 ‘이것이 진실이라고 결정내릴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과 담론 지형을 바꾸려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amp;nbsp; &lt;br /&gt;&lt;br /&gt;&lt;STRONG&gt;숨 막히게 하는 일본, 약자에 대한 공감 잃어가는 한국&lt;/STRONG&gt; &lt;br /&gt;&lt;br /&gt;서경식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일본이라는 사회를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가는 지하실, 염천에 달궈져 지글지글 수분이 증발해가는 작은 웅덩이”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일본의 무엇이 그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일까? &lt;br /&gt;&lt;br /&gt;&amp;nbsp;“재일조선인은 식민지배의 소산으로, 곧 일본국가의 책임으로 일본에 살게 됐다. 하지만 대다수 일본 시민들은 그런 역사에 대해 지식도 없고 자각도 없다. 제도적, 사회적 차별은 심각하다. 일본에서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할 이들도 이런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없다. 나한테 ‘선생님은 언제 일본에 오셨어요? 일본말은 어디서 배우셨어요?’라고 묻곤 한다. 역사의 산물로서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가 일본 다수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인 셈이다. 이런 우경화 경향은 1990년대 이후 더 심해졌다. 폭력적 독재자가 시민사회를 억압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심각한 문제다. 일본 시민 다수가 자기 권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자유주의적 시민운동 등 좋은 일을 하던 사람들조차 생활보수주의에 빠져 일본국가가 나가고 있는 위험스런 방향에 저항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방향을 바꿔 좋아질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lt;br /&gt;&lt;br /&gt;지금 일본사회엔 저항의 거점도, 주체도 없다는 것이다. &lt;br /&gt;그렇다면 ‘조국’이라고 할 한국은? &lt;br /&gt;&lt;br /&gt;“대한민국은 (박정희)군정시절,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우던 시기엔 일본과 다른 의미로 살기 어려운 사회였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사람에 대한 공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공감의 바탕이 이 사회에 제대로 살아있는지 의심스럽다.”&lt;br /&gt;&lt;br /&gt;&lt;STRONG&gt;‘기억의 투쟁’의 지체와 우경화&lt;br /&gt;&lt;/STRONG&gt;&lt;br /&gt;서경식에게 ‘기억의 투쟁’은 숙명이자,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다. 이 점에서 한국사회가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건, ‘역사의 증언자’ 서경식에겐 걱정되는 사태 전개다.&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018172039.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300&quot; width=&quot;200&quot; /&gt;&lt;/div&gt;“한국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이후 군정시절을 포함한 역사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피해자로서 가해자인 일본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러나&amp;nbsp; 좀더 좋은 사회가 되려면 자기성찰, 내부투쟁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이번 대선의 결과로 기억의 투쟁이 지체될 것이라고 본다. 군정 독재정권이 복귀한다는 게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강국이 되려면 내부 갈등은 적당히 넘어가야 한다는 담론과 풍조가 고조될 것이다. 억울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억제될 것이고, 앞으로 그게 심각한 사회문제로 분출될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일본은 그런 목소리를 외면해왔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외침이 90년대에 분출된 것이고, 그 분출을 비합리적으로 억압하려고 하니까 우경화하는 것이다.”&lt;br /&gt;&lt;br /&gt;&lt;br /&gt;&lt;STRONG&gt;한국은 ‘베트남’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lt;/STRONG&gt;&lt;br /&gt;&lt;br /&gt;이 대목에서 서경식에겐 ‘한국(조선)-일본’의 역사가 ‘베트남-한국’의 역사와 겹쳐진다. &lt;br /&gt;&lt;br /&gt;“지난주 전남대에서 철학국제대회가 열렸을 때 베트남 철학교수의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 참석자 가운데 누구도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전쟁책임이나, 베트남 결혼 이민 얘기를 하지 않았다. 베트남 처지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본 한국 관계에 비유하면 알기 쉽다…. 어머니가 일본글을 못 읽는다. 어릴 때 학교에서도 좀 어려웠고, 그 이유를 몰라 많이 고민했다. (한국에 온 베트남)결혼 이민 자녀들이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 거다. 광주 전주 등에서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한국은 앞으로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이민자와 함께 사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지금 같은 식이라면 이 나라에 결혼이민자녀가 수만 명, 수십만 명 생겨날 것이다. 농촌에서 어머니는 외국인이고, 한국말 잘 못하고, 그 결과로 학습능력이 낮고…. 그런 집단이 대한민국에 소수자로 커 가면 인종차별, 계급차별이 고착화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엔 일관된 대책이 없다. 대책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건 ‘식민 지배를 받은 우리 조선민족이 겪은 고통을 이 사회의 성원으로 살아갈 사람에게 주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서경식은 어느 글에서 자신의 이런 ‘원칙’이 구현된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들의 모어와 문화를 대등한 것으로 존중하는 사회, 조선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그리고 언젠가는 베트남어도 공용어로 인정받고 유통되는 사회”라고 상상한 바 있다)&lt;br /&gt;&lt;br /&gt;&lt;STRONG&gt;가족의 역사, 분단의 역사를 정리하고 싶다&lt;br /&gt;&lt;/STRONG&gt;&lt;br /&gt;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글쟁이로서 인생의 남은 큰 과제가 두 개 있다”며, 홍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하나는 어머니 오기순을 중심으로 가족의 역사를 그려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분단 역사에 대한 생각을 잠정적으로 정리할 ‘북’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다. &lt;br /&gt;&amp;nbsp;그는 3월이면 서울에서 지낸 2년에 걸친 안식년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다. &lt;br /&gt;&lt;br /&gt;&lt;FONT style=&quot;BACKGROUND-COLOR: #c1c1c1&quo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0000&gt;&lt;div class=&quot;imageblock left&quot; style=&quot;float: left; margin-right: 10px;&quot;&gt;&lt;img src=&quot;http://blog.peoplepower21.org/attach/19/1002390679.jpg&quot; alt=&quot;사용자 삽입 이미지&quot; height=&quot;333&quot; width=&quot;500&quot; /&gt;&lt;/div&gt;&lt;/P&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
&lt;P&gt;&lt;FONT style=&quot;BACKGROUND-COLOR: #e4e4e4&quo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gt;&lt;STRONG&gt;서경식&lt;/STRONG&gt;은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조선인 2세’다. 일제 강점기 피식민지 민족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서승춘과 오기순의 아들이다. 조국이 전화에 휩싸여 있던 195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노동자 마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스무 살 무렵 조국으로 유학 갔던 그의 두 형(서승, 서준식)이 ‘대학가에 침투한 재일교포 간첩단’이라는 조작 사건에 걸려 20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 시절 내내,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래도록 그는 형들의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청춘을 바쳤다. 1974년 와세다대학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했다. 지금 그는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1995년 자전적 에세이인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 상을 받았다. 2002년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시대의 증언자’의 상징이 된 프리모 레비를 다룬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문화원 마르코 폴로 상을 받았다. ‘역사의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이겨진 소수자의 외침을 세상에 전해온 문필가다. 「디아스포라 기행」 「시대를 건너는 법」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만남」 「나의 서양미술순례」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등 다수의 저작이 국내에 &lt;FONT style=&quot;BACKGROUND-COLOR: #e4e4e4&quot;&gt;소개돼 있다.&lt;/FONT&gt;&lt;/FONT&gt;&lt;/FONT&gt;&lt;/P&gt;&lt;/DIV&gt;
&lt;P&gt;&lt;br /&gt;&lt;br /&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gt;&amp;nbsp;※ 바로 잡습니다&lt;/FONT&gt;&lt;/P&gt;
&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gt;편집 과정에서 &amp;lt;이제훈이 만난 사람&amp;gt; 의 인터뷰이 서경식 교수님의 학교명 ‘됴쿄경제대’를 ‘됴쿄대’로 잘못 기재했습니다. 「참여사회」 표지와 기사의 인터뷰이 기재 부분에서 오류가 생겼고, 기사 본문에는 정확하게 기재되었습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님, 필자 이제훈 &amp;lt;한겨레&amp;gt;통일팀장, &amp;nbsp;「참여사회」독자 분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참여사회」편집부 드림&lt;br /&gt;&lt;/FONT&gt;&lt;br /&gt;&lt;/FONT&gt;&lt;/P&gt;</description>
			<category>2008년 02월</category>
			<author>(acham)</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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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2 Feb 2008 11:24:05 +0900</pubDate>
		</item>
		<item>
			<title>[칼럼] 시민의 쓴소리에 귀기울여야</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8</link>
			<description>&lt;P&gt;&lt;FONT size=3&gt;&lt;STRONG&gt;[칼럼]&lt;/STRONG&gt;&lt;/FONT&gt;&lt;br /&gt;&lt;br /&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6699 size=5&gt;&lt;STRONG&gt;시민의 쓴소리에 귀기울여야&lt;br /&gt;&lt;/STRONG&gt;&lt;/FONT&gt;&lt;br /&gt;&lt;br /&gt;&lt;br /&gt;&lt;STRONG&gt;박영선&lt;/STRONG&gt;「참여사회」 편집위원장 &lt;A href=&quot;mailto:baram@pspd.org&quot;&gt;baram@pspd.org&lt;/A&gt;&lt;/P&gt;
&lt;P&gt;새해 벽두부터 한국 사회의 속도가 무척 빨라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나도 잠을 자야 하니 새벽 1시부터 4시까지는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다지요. 그야말로 불철주야 일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국민성공시대’를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당선자의 모습은 부지런함으로 이해되고 있겠지요.&amp;nbsp; ‘거지도 부지런하면 더운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옛말처럼 부지런함은 미덕입니다. 그런데 김 선생, 이 당선자를 부지런하다고 하는 게 맞는 걸까요? &lt;br /&gt;&amp;nbsp; &lt;br /&gt;철없던 시절 얘기지만, 일찍 일어나는 게 너무도 싫어 차라리 자다가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이 당선자의 행보는 불가능한, 솔직히 말하면 불가사의해 보입니다. (사방팔방에서 제가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 알겠다는 손가락질과 연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군요) 사람의 심리를 잘 꿰뚫고 있는 김 선생은 주눅 든 제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잘 알겝니다. 반감이지요. 저는 새벽 1시에 업무 점검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그의 업무 스타일이 왜 박수를 받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사리에 맞지 않는 밀어부치기식의 업무 스타일이 추진력 강한 지도자의 필수 리더십 요소로 둔갑하는 것은 더더욱 납득할 수 없구요. 공공연히 그를 좇으라는 분위기에 어깃장을 놓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설령 제 푸념이 성공신화를 위한 무한질주 대오에 끼지 못한 ‘시대의 걸림돌’들이 내뱉는 것으로 치부되더라도 말입니다.&amp;nbsp; &lt;/P&gt;
&lt;P&gt;새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자꾸 어기대고 싶은 가장 큰 까닭은 ‘참여’가 실종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참여’란 말에 김 선생이 기겁을 하는 모습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김 선생,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참여’는 ‘참여정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참여정부가 출범한 후 많은 이들이 참여연대가 참여정부 탄생의 주역인 것처럼 오도하며 시민단체가 권력화되었느니 어쩌니 하며 참여연대에 헤살을 놓던 게 생각납니다. 아, 과거의 일이 아니군요. 1월 내내 심심하면 한 번씩 주요 언론의 사설이나 칼럼에 시민운동단체를 비난하는 글이 실렸는데, 모두 보셨겠지요. 지난 대선 결과를 두고 시민운동단체가 국민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던 한 신문은 시민운동단체를 아예 ‘양 머리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상인(양두구육 羊頭狗肉)’에 비유했더군요. 그들의 상상력은 무한하여 시민운동단체가 새로이 등장한 이명박 정부 하에서 권력을 빼앗겨 절치부심하고 있다고도 썼더군요.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적 시민운동단체들이 대선 직후 한자리에 모여 10년 만의 정권 창출을 자축하며 건배를 들고, 이명박 당선자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힘을 보태겠다는 결의를 다졌다는데, 그동안 민주주의를 위한 공치(거버넌스)나 파트너십을 애써 모른 체하던 그들이 과연 뭐라고 할지 지켜볼 일입니다. 어쩜 대선 결과가 나오기도 전부터 용비어천가를 불러대던 그들이니 지켜보고 말고 할 일도 없을 거 같긴 합니다. &amp;nbsp;&amp;nbsp; &lt;/P&gt;
&lt;P&gt;이야기가 샛길로 새어버렸군요.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라는 물음에 골몰하고 있는 김 선생은 참여는 구호만으로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요. 저는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를 제대로 이끌어내는 가장 바른 방법은 먼저 귀를 여는 것이라고 봅니다. 귀를 열어야 시민들의 입이 열리고 맘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반도 대운하, 정부조직개편, 대학입시개편안 등 국가적으로 매우 막중한 문제를 다루는 새 정부의 움직임은 막무가내처럼 보입니다. 국민들이 국가지대사를 두고 한마디씩 하는 것을 두고 불평분자로 폄훼하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입니다. 아무리 그동안 앞으로 내달리지 못했던 게 못마땅했어도 그리 앞으로 달려가는 것에만 급급해서 천천히 달리자, 좀 쉬었다 가자는 목소리,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함께 달리자는 하소연, 그렇게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안 된다는 아우성, 우리가 갈 길이 그 길이 아니라는 절규를 모른 체해선 안 되지요.&lt;/P&gt;
&lt;P&gt;‘참여’는 때때로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 거치적거리는 요소가 되지요.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참여’에 들인 시간과 비용만 계산하려 하고, 그 과정이 빚어낸 감동의 순간과 빛나는 결과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걸까요?&amp;nbsp; 아름다운 참여의 신화가 지금도 태안에서 이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왜 결과 지상주의에만 매몰되어 있는 걸까요?&amp;nbsp; 김 선생은&amp;nbsp; ‘국민성공시대’가 되고,&amp;nbsp; ‘대한민국747’ 공약이 실현된다면 행복하실 것 같으세요? 저의 이런 물음은 비난받을 게 뻔할 테지요. 그래서인지 모처럼 김 선생께 속마음을 털어놨는데도 씁쓸하기만 합니다. &lt;/P&gt;
&lt;P&gt;고작 한 달에 한 번 띄우는 편지인데, 정담을 나누기는커녕 불순한 기운만 잔뜩 내뿜고 말았군요. 나랏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에서 나온 한탄이라고 이해해주십시오. 다음 편지에는 상큼한 봄기운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창 매운 맛을 보여주는 추위에 건강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2008년 02월</category>
			<author>(acham)</author>
			<guid>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8</guid>
			<comments>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8#entry20828comment</comments>
			<pubDate>Tue, 05 Feb 2008 20:23:18 +0900</pubDate>
		</item>
		<item>
			<title>[김재명의 평화 이야기] 세계로부터 고립된 팔레스타인의 한숨과 눈물</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7</link>
			<description>&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 size=3&gt;&lt;STRONG&gt;[김재명의 평화 이야기]&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6699 size=5&gt;&lt;STRONG&gt;세계로부터 고립된 팔레스타인의 한숨과 눈물&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STRONG&gt;&lt;FONT color=#8e8e8e size=3&gt;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정책으로 고통 극심&lt;br /&gt;&lt;/FONT&gt;&lt;/STRONG&gt;&lt;/P&gt;
&lt;P&gt;&lt;br /&gt;&lt;br /&gt;글·사진&lt;STRONG&gt; 김재명&lt;/STRONG&gt; &amp;lt;프레시안&amp;gt; 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lt;A href=&quot;mailto:kimsphoto@hanmail.net&quot;&gt;kimsphoto@hanmail.net&lt;/A&gt;&lt;/P&gt;
&lt;P&gt;이스라엘 관문인 텔아비브 국제공항 활주로에 내리면, 공항 건물 벽면에 ‘이스라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대형 간판이 눈에 띈다. 그러나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취재기자들이다. 1967년 6일 전쟁 뒤 40년 넘게 불법적으로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실상을 취재하려는 외국 취재진을 반기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을 전 세계 언론의 ‘취재 사각지대’로 남겨두려는 것이 이스라엘 정부의 희망사항이다.&lt;/P&gt;
&lt;P&gt;여러 차례 중동을 다녀오면서 ‘고문’에 가까운 공항 보안요원의 심문을 받다보면 아무리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라도 짜증이 극에 달한다. 왜 왔느냐, 누굴 만나려느냐, 어디에서 묵을 예정이냐 등등 보안요원의 질문이 30분쯤 이어지면, 결국은 화가 나기 십상이다. 지난번 중동 방문길도 그랬다. 택시비를 아끼자고 공항에서 시내로 나가는 택시를 함께 타기로 한 스웨덴 배낭족 여인 둘은 필자를 기다리다 못해 손을 흔들고 가버렸다. 이스라엘 정부의 외국 취재기자들에 대한 괴롭힘은 갈수록 심해지는 느낌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고통, 즉 이스라엘이 바깥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억압과 공포의 무게에 비례해서일 것이다. &lt;/P&gt;
&lt;P&gt;&lt;STRONG&gt;발전소 가동 중단, 추위와 어둠에 떠는 가자지구&lt;/STRONG&gt;&lt;/P&gt;
&lt;P&gt;이즈음 들려오는 또 다른 슬픈 소식은 지중해변에 자리 잡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더욱 악랄해진 봉쇄정책으로 그곳 사람들이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로 통하는 검문소들을 모두 폐쇄, 의약품이나 연료 등 일상생활에 쓰이는 필수품들을 실은 트럭마저 발을 묶었다. 그런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가자지구에 단 하나 있는 발전소에 연료 공급이 끊겨 발전기계의 작동이 멈출 수밖에 없게 됐다. 전기가 끊어지자, 가자지구는&amp;nbsp; 암흑천지로 바뀌었고, 가자지구 주민 150만 명 가운데 80만 명이 추위와 어둠에 떤다는 소식이다. &lt;/P&gt;
&lt;P&gt;예루살렘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쯤 달리면 가자 지구로 들어서는 길목에 에레즈 검문소가 보인다. 유럽지역 국경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검문소다. 2000년9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제2차 인티파다(intifada, 봉기)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예루살렘, 텔아비브, 하이파 등 이스라엘 쪽으로 일하러 가는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검문소에서 일하는 이스라엘 병사들을 빼고 인적이 드물어 썰렁한 느낌마저 든다. &lt;/P&gt;
&lt;P&gt;지중해를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들어설 때마다 ‘회색(灰色)지대’란 말이 떠오른다. 집들은 대체로 색깔이 여린 회색에다 낡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군의 오랜 경제봉쇄로 사람들은 가난에 찌든 모습들이다. 세계은행 통계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업률이 50%를 넘고, 하루 2달러의 수입으로 먹고사는 절대빈곤에 내몰린 사람들이 60%다. 가자지구는 상대적으로 서안지구보다 더 상황이 심각하다. &lt;/P&gt;
&lt;P&gt;가자지구는 지중해를 따라 길게 직사각형(길이 40km, 폭 10km)으로 뻗은 360㎢의 좁은 회랑이다.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이집트 관할이었다. 2005년8월 가자지구 21개 정착촌에 살던 유대인들이 떠나가기 전까지는 지구상에서 가자지구만큼 생활공간의 배분이 불평등하게 이뤄진 곳은 없었을 듯하다. 14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자지구의 3분의 2에 몰려 사는 반면, 불과 8,500명의 유대인 정착민들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살았다. 1인당 점유 면적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 &lt;/P&gt;
&lt;P&gt;이집트와 국경을 맞댄 라파 난민수용소를 비롯해, 가자지구 곳곳에는 난민촌들이 들어서 있다. 그곳 주민들 대부분은 1948년 이스라엘의 이른바 ‘독립전쟁’ 과정에서 대대로 살던 집과 농토를 버리고 떠났던 난민들이다. 이들이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팔레스타인 정파는 반이스라엘-반미 강경노선을 걸어온 하마스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지도자로 하는 파타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타협적인 온건노선을 걷는 까닭에 가자지구에선 인기가 없다. 이스라엘이 같은 팔레스타인이라도 서안지구보다는 특히 가자지구를 압박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lt;/P&gt;
&lt;P&gt;&lt;STRONG&gt;밭 갈아엎고 집 무너뜨려도 눈물조차 말라버린 팔레스타인&lt;/STRONG&gt;&lt;/P&gt;
&lt;P&gt;가자지구를 다녀보면 곳곳에서 이스라엘 군이 저지른 만행들을 볼 수 있다. 탁 트인 시계를 확보한답시고, 그곳 농민들의 생업인 올리브 밭을 불도저로 갈아엎고 난민촌 주택들을 허물어뜨리는 일이 너무나 흔하다. 이들 난민들을 돕는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관(UNRWA) 관계자들조차 “이스라엘 군의 강압조치가 해도 너무 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UNRWA 대변인은 “난민촌을 파괴하고 점령지역의 민간인들을 강제 이동시키는 강압조치들은 제네바협정의 규정을 위반하는 뚜렷한 전쟁범죄 행위”라고 이스라엘 정부를 대놓고 비난했다.&lt;/P&gt;
&lt;P&gt;이스라엘군의 불도저에 밀려 집을 잃은 한 50대 후반의 여인은 “내 평생 동안에 이런 험한 일들을 하도 여러 번 겪어놔서 눈물도 안 나온다”고 했다. 그 여인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일제 식민지 시절 눈물과 한숨의 세월을 보냈을 우리 어머니들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amp;nbsp; 팔레스타인 민초들의 슬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lt;/P&gt;
&lt;P&gt;지난 일제 식민지 시절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동양척식회사나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 이주민들에게 대대로 살던 땅을 빼앗기고 만주 벌판으로 떠나가야 했다. 조상들의 고달팠던 삶과 오늘날 팔레스타인 민초들이 겪는 고단한 삶이 본질에선 같다. 우리 한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지배를 체험했다. 팔레스타인 민초들이 겪는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곧 한반도 평화는 물론 지구촌 평화사랑의 길이기도 하다.&lt;br /&gt;&lt;/P&gt;</description>
			<category>2008년 02월</category>
			<author>(acham)</author>
			<guid>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7</guid>
			<comments>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7#entry20827comment</comments>
			<pubDate>Tue, 05 Feb 2008 20:07:21 +0900</pubDate>
		</item>
		<item>
			<title>[북리뷰] 민주주의를 공부하자</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5</link>
			<description>&lt;br /&gt;
&lt;P&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6699 size=5&gt;&lt;STRONG&gt;민주주의를 공부하자&lt;br /&gt;&lt;br /&gt;&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STRONG&gt;홍성태&lt;/STRONG&gt;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상지대 교수 &lt;A href=&quot;mailto:rayhope@chol.com&quot;&gt;rayhope@chol.com&lt;/A&gt;&lt;br /&gt;&lt;/P&gt;
&lt;P&gt;&lt;br /&gt;오늘날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상식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있듯이 민주주의는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이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주화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며, 또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의 이론과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lt;/P&gt;
&lt;P&gt;아무리 뛰어난 외국의 학자라도 한국의 학자보다 더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주의에 대해 잘 알 수는 없다. 외국 학자의 이론은 결코 보편적 교본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살펴보기 위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생들조차 우리의 연구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는 세계적인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는데도 그렇다. 이제 우리의 연구를 공부하고 토론하고 실천하자. &lt;/P&gt;
&lt;P&gt;민주주의를 올바로 공부하기 위해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첫째, 보편적 민주주의의 개념이다. 민주주의라고 하면, 흔히 고대 그리스의 얘기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는 노예제사회였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극히 협소한 차별적 민주주의의 전형적 사례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직접민주주의이건 간접민주주의이건 간에 보편적 인권의 개념을 전제로 한 보편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를 민주주의의 전형처럼 얘기하는 것은 잘못이다.&lt;/P&gt;
&lt;P&gt;둘째, 민주주의의 방식과 내용에 대한 구분이다. 민주주의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강제력을 행사하는 체제이다. 그 방식은 크게 참여와 대의로 나뉜다. 그런데 어떤 대의도 선거라는 참여를 통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참여야말로 민주주의의 초석이다. 그런데 강제력의 행사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구현하는 사회적 내용은 더욱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사상, 신체, 활동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경제적 권리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로, 그리고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생태민주주의로 발전해왔다. &lt;/P&gt;
&lt;P&gt;민주주의 공부는 이론과 운동으로 크게 나뉠 수 있다. 먼저 민주주의 이론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소개한다. 다양한 민주주의론에 대해서는 전자민주주의, 생태민주주의 등도 다루고 있는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정상호, 주성수, 아르케, 2006)가 좋은 참고문헌이 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에 따라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이에 대한 평가로는 최장집 교수의 좥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좦(후마니타스, 2002)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 대한 비판적 독서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강문구 교수의 「한국 민주화의 비판적 탐색」(당대, 2003)을 함께 읽는 것도 좋겠다. 이 책은 한국이 민주화에 대한 사회경제적 평가와 새로운 과제들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또한 강원택 교수의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인간사랑, 2005)는 정치제도의 차원에서 한국의 민주화가 이룬 성과와 안고 있는 과제를 탐구한다. 따라서 정치제도의 면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lt;/P&gt;
&lt;P&gt;다음으로 운동에 관해 몇 권의 책을 소개한다. 사실 앞의 책들도 모두 운동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이론과 민주주의 운동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직접적으로 민주주의 운동을 다룬 책들이 있다. 먼저 「한국 민주화운동사 연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가 있다. 2001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우리의 민주주의 운동과 관련된 많은 활동을 펼쳤다. 「연표」는 1954년부터 1992년까지 민주화운동에 관한 각종 자료들을 발췌해서 만든 기초자료로서 대단히 유용하다. 1945년에서 최근까지를 포괄할 수 있도록 서둘러 개정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의 민주화에서 1980년대는 가장 치열하고 역동적인 시대로 기억되고 있다.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이에 대해 김귀옥 교수가 진행한 「1980년대 민주화운동 참여자의 경험과 기억」(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은 여러 귀중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우리가 과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조희연 교수가 진행한 「민주화 세계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 체제 모형을 찾아서」(함께읽는책, 2006)는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탐구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lt;/P&gt;
&lt;P&gt;사실 우리의 운동사는 논쟁사이기도 했다. 여러 연구자와 운동가들이 저마다 다른 주장을 제기하고 논쟁을 진행하며 실천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이 치열한 운동사와 논쟁사를 탐구한 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서구 학자들의 이론을 ‘이론은 서구, 사례는 한국’이라는 학문의 식민성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서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다가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는 식의 연구는 잘못이다. 더 나아가 식민, 전쟁, 분단, 독재, 성장, 재벌, 노동뿐만 아니라 토건국가, 투기사회, 학벌사회, 징병제도 등 한국의 국민적 문제를 올바로 다루는 쪽으로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lt;/P&gt;
&lt;P&gt;올해는 ‘민주공화국’ 수립 60주년의 해이다. 그러나 헌법의 ‘민주공화국’이 현실로 구현되기까지 40년에 걸친 치열한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있었다. 이 역사에 관한 설명을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이론의 새 장을 쓰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민주화에 대해 잘 모르는 후세에 대한 민주주의 교육에 힘을 쏟아야 한다. 서구의 이론에 바탕을 둔 연구서들은 많지만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가르치기 위한 민주주의 교재는 단 하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총연맹’이 한국을 대표하는 ‘민주시민교육기관’으로 변신해서 매년 100만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민주시민교육’을 행하고 있다. &lt;/P&gt;
&lt;P&gt;‘민주시민교육’이 이미 확립된 공식개념이다. 이 개념을 제목으로 제시한 책들도 많이 발간되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연구와 운동을 주도한 학자들 중에서 민주주의의 교육이라는 중대한 과제에 깊은 관심을 쏟은 사람은 전혀 없다. 이에 관한 연구는 이미 초미의 과제이다. 기존의 연구들을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훌륭한 교재가 조만간 발간되기를 바란다.&lt;br /&gt;&lt;br /&gt;&lt;br /&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lt;STRONG&gt;※ 「참여사회」 2월호의 오류를 바로 잡습니다&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참여사회 2월호 p37 두 번째 단락 두 번째 문단에서 &quot;사실 우리의 운동사는 논쟁사이기도 했다. 여러 연구자와 운동가들이 저마다 다른 주장을 제기하고 논쟁을 진행하며 실천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이 치열한 운동사와 논쟁사를 탐구한 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서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다가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는 식의 연구는 잘못이다. 더 나아가 식민, 전쟁, 분단, 독재, 성장, 재벌, 노동뿐만 아니라 토건국가, 투기사회, 학벌사회, 징병제도 등 한국의 국민적 문제를 올바로 다루는 쪽으로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quot; 부분에서 필자 홍성태 교수의 중요한 학문 연구 이론 문장이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어 아래와 같이 바로 잡습니다.&lt;br /&gt;&lt;br /&gt;&quot;사실 우리의 운동사는 논쟁사이기도 했다. 여러 연구자와 운동가들이 저마다 다른 주장을 제기하고 논쟁을 진행하며 실천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이 치열한 운동사와 논쟁사를 탐구한 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lt;STRONG&gt; 여기에는 &#039;이론은 서구, 사례는 한국&#039;이라는 학문의 식민성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lt;/STRONG&gt;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서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다가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는 식의 연구는 잘못이다. 더 나아가 식민, 전쟁, 분단, 독재, 성장, 재벌, 노동뿐만 아니라 토건국가, 투기사회, 학벌사회, 징병제도 등 한국의 국민적 문제를 올바로 다루는 쪽으로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quot;&lt;br /&gt;&lt;br /&gt;필자 홍성태 교수님과「참여사회」독자 분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며,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참여사회」편집부 드림&lt;br /&gt;&lt;/FONT&gt;&lt;/P&gt;</description>
			<category>2008년 02월</category>
			<author>(acham)</author>
			<guid>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5</guid>
			<comments>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5#entry20825comment</comments>
			<pubDate>Tue, 05 Feb 2008 20:04:16 +0900</pubDate>
		</item>
		<item>
			<title>[기획]  시민단체의 권력화 논란</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4</link>
			<description>&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 size=3&gt;&lt;STRONG&gt;[기획]&lt;/STRONG&gt;&lt;/FONT&gt;&amp;nbsp; &lt;/P&gt;
&lt;P&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6699 size=5&gt;&lt;STRONG&gt;시민단체의 권력화 논란&lt;br /&gt;&lt;br /&gt;&lt;br /&gt;&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STRONG&gt;신광영&lt;/STRONG&gt;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lt;A href=&quot;mailto:kyshin@cau.ac.kr&quot;&gt;kyshin@cau.ac.kr&lt;/A&gt;&lt;/P&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gt;최근 보수세력의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진보진영에 대한 비방과 왜곡이 계속되고 있다. 「참여사회」는 이런 현상의 흐름을 짚어보고 몇 가지 쟁점 중 보수세력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시민운동의 권력화’와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시민단체의 역할에 대해 신광영 교수(중앙대 사회학)에게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lt;/FONT&gt;&lt;/DIV&gt;
&lt;P&gt;한국의 시민운동은 1987년 민주화 투쟁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87년 전두환 정권의 6·29 선언이 있기까지, 오랫동안 전개된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은 무수한 희생을 동반했다. 폭압적 탄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고 심지어 살해도 되었다. 제3세계 군사정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무자비한 탄압은 87년 6·10 민주화항쟁이 성공하면서 점차 수그러들었다.&lt;/P&gt;
&lt;P&gt;민주화 이행이 시작되면서 두 가지 사회운동이 등장했다. 하나는 노동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민운동이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이루어진 노동탄압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저항이 87년 여름 전국적 파업으로 나타났다.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이 약화되면서,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 파업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lt;/P&gt;
&lt;P&gt;다른 하나가 시민운동이었다. 시민운동은 노동운동과 달리 더 많은 직접 민주주의의 요구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감시 및 저항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정치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국민의 삶의 질, 환경파괴적인 산업화에 대한 비판, 개인의 인권, 여성의 권리와 소비자 권리 등 다양한 요구와 활동을 통하여 시민의 권리를 확대시키고자 했다. 투표권 이외의 다차원의 시민권 확보를 통하여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lt;/P&gt;
&lt;P&gt;&lt;STRONG&gt;시민운동세력의 정치 진출과 권력화&lt;/STRONG&gt;&lt;/P&gt;
&lt;P&gt;1990년대는 시민운동의 시대였다. 시민운동은 전통적인 민주화 투쟁도, 노동운동도 이루지 못했던 시민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시민운동의 특징은 규제나 구속이 없이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공적인 시민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혜택은 일반 시민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공공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lt;/P&gt;
&lt;P&gt;1997년 2002년 두 차례 야당의 집권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1987년 이후에도 두 차례 선거를 통해서 집권에 성공했던 권위주의 정치세력이 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던 정치세력이 집권에 성공하면서 시민운동의 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시민운동의 요구가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국민의 정부보다 참여정부 초기 이러한 분위기가 더 강했다. 더 나아가 시민운동 인사들이 참여정부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lt;/P&gt;
&lt;P&gt;그러나 두 차례의 민주세력의 집권은 시민운동 단체들에게는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첫째로 시민단체 활동가들 일부가 정치권으로 진출하면서, 시민운동이 정치권으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 활동처럼 일반 시민들에게 비쳤다. 모두 개인적인 결정이라고 말하지만, 시민단체 활동가가 특정 정당의 정치인이 되는 것은 시민운동의 진정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낳았다. 정치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현실에서 정치권을 비판해왔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스스로 정치에 몸을 담게 되면서 생긴 역설이었다. &amp;nbsp; &lt;/P&gt;
&lt;P&gt;둘째로 시민운동의 독립성이 훼손되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시민단체가 참여하면서 정부와 시민단체의 긴장관계가 약화되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권위주의 시대 관변단체 재정 지원 방식을 바꿔 모든 시민단체들을 대상으로 경쟁을 통해 프로젝트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었다. 관변단체들이야 애초부터 독립성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도 문제가 될 여지도 없었지만, 정부 정책을 비판해온 시민단체들이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문제였다. 이러한 정책에 재정이 취약한 시민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고, 결과적으로 정부와 시민단체의 관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참여연대와 같이 애초부터 정부의 재정 지원을 거부한 단체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단체들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였다. 국민의 세금을 관변단체가 독점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타당한 논리였지만, 시민단체의 독립성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lt;/P&gt;
&lt;P&gt;셋째로 여러 시민단체들이 주도한 낙천낙선 운동과 같은 정치개혁운동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운동으로 시민단체의 권력화 문제가 제기되었다.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정치개혁운동과 탄핵반대 운동은 보수정당으로 하여금 시민단체들과 집권 여당이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지역주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해온 부패 정치인과 무능 정치인 퇴출 운동이 한나라당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시민단체들과 집권 여당의 관계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시민단체의 권력화 의혹은 시민단체들이 탄핵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형성된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이 되었다.&amp;nbsp; &lt;/P&gt;
&lt;P&gt;&lt;STRONG&gt;대선 이후 가시화되는 보수 단체의 권력화&lt;/STRONG&gt;&lt;/P&gt;
&lt;P&gt;2002년 선거와 2004년 대통령 탄핵에 실패한 보수세력은 과거의 관변단체들과 보수적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보수 시민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2002년부터 만들어진 이들 단체들을 보수 언론이 대대적으로 홍보해주면서 보수 시민단체들이 언론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수 시민단체 조직운동은 탄핵 실패 이후 활성화되었다. 2005년 11월에는 참여정부를 좌파 정부, 시민단체들을 좌파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보수를 내세우며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보수적 시민단체의 등장으로 시민사회가 이념적으로 양분되었다. &lt;/P&gt;
&lt;P&gt;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면서 보수 시민단체의 권력화가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많은 보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2008년 총선에 출마하려 한다는 기사들은 보수 시민단체들의 권력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보수 시민단체들의 일부 대표들이 한나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활동하면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 활동가들이 총선에 많이 출마하여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은 이전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여당에 입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민단체의 권력화 의혹을 낳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이 정치권으로 진출하기 위한 과정이 되면서 모든 활동은 정치적으로 ‘출세’하기 위한 활동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경력을 이용하여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활동가는 시민단체의 존재위기를 야기하게 된다. &amp;nbsp; &lt;/P&gt;
&lt;P&gt;&lt;STRONG&gt;돈과 권력 아니라 공익 추구해야 시민단체&lt;/STRONG&gt;&lt;/P&gt;
&lt;P&gt;여기에서 시민단체 혹은 NGO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는 사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도,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도 아니다. 시민단체의 존재 이유는 바로 시장과 국가에 의해 보장되지 못하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다. &lt;/P&gt;
&lt;P&gt;시장에서의 사익 추구는 기업조직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기업은 매년 결산을 통해서 경영실적을 평가받고, 주식시장에서 기업의 가치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최고경영자들은 1년을 단위로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노력한다. &lt;/P&gt;
&lt;P&gt;정당은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조직이다. 3~5년 주기로 치러지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정당의 주된 활동목표이다. 특히 서구 정당들의 그림자 내각처럼 준비된 정책이 없는 한국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최우선적인 목표가 된다. 더욱이 일반 국민들의 정당 참여가 저조하기 때문에 정당 운영에서 일반 당원의 당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극히 낮다. 그리하여 정당들은 기업의 정치후원금에 의존하게 된다. 한국에서 정치조직이 국민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을 더 앞세우게 되는 구조적인 요인이 여기에 있다. &lt;/P&gt;
&lt;P&gt;반면 시민단체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윤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시민적 권리의 확대와 공공성 확보이다. 시민단체들은 시장과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되었을 때만, 공공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시민단체가 이익이나 권력을 추구한다면 더 이상 시민단체가 아니다. 단지 시민단체의 외피를 쓴 기업이거나 정치조직이다. 시민단체 활동의 핵심은 공익의 추구이기 때문에, 기업의 무제한적인 이익 추구로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생태계 파괴가 일어나거나 정부가 기업의 이익만을 앞세울 때 충돌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시민단체 활동은 민주주의의 확장과 심화에 기여한다. &lt;/P&gt;
&lt;P&gt;&lt;STRONG&gt;정치 바람에 흔들리는 시민단체의 독립성과 자율성&lt;/STRONG&gt;&lt;/P&gt;
&lt;P&gt;세계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다양하고 자발적인 시민단체들이 등장했다. 환경, 인권, 여성, 장애인, 소비자 등 각 분야의 단체들이 국내에서도 활동하고 있고, 국제적인 차원에서 활동하는 국제 NGO(INGO)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세계화가 낳고 있는 사회적 배제와 빈곤에 대처하는 반세계화 운동도 이러한 국제적인 NGO 활동의 하나이다. 이러한 운동은 세계화가 선진국의 초국적 기업의 이익만을 앞세우며 다수의 세계인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세계화가 공공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lt;/P&gt;
&lt;P&gt;1987년 이래 한국의 정치와 사회도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운동의 성장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른바 주권자인 시민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권위주의 정치 유산을 청산하는 데 많이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들은 기업과 정당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기 힘든 경제적 정치적 상황도 경험했다. 특히 시민사회의 정치화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시민사회가 정치에 과도하게 휘둘리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시민단체들의 독립성과 자율성 논란이 등장했던 것이다. &lt;/P&gt;
&lt;P&gt;시민단체의 권력화는 공공성을 강화하고 공익성을 추구하는 자발적 시민운동의 근본적인 속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시민단체가 하나의 정치권력으로 둔갑하는 순간 시민단체는 정당의 외곽조직이나 연계조직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은 진보적인 시민단체나 보수적인 시민단체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리하여 인적 차원이나 조직적 차원에서 시민단체와 정당간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과 같이 각종 연줄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중요하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lt;/P&gt;
&lt;P&gt;&lt;STRONG&gt;개방적 민주사회로의 이행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lt;/STRONG&gt;&lt;/P&gt;
&lt;P&gt;지난 20년간의 역사적 경험이 주는 교훈은 자발적 시민참여에 기초한 시민단체가 시장과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유지할 때만, 시민운동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시민운동을 통한 사회발전이 기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돈과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진정한 시민단체 활동의 시작이자 끝이다. 시민단체가 돈과 권력이 아닌 제3의 가치인 공공성을 추구하지 않을 때, 시민단체의 존재 가치는 사라진다. 이러한 점은 진보 시민단체이건 보수 시민단체이건 모두에게 적용된다. &amp;nbsp; &lt;/P&gt;
&lt;P&gt;최근 보수 세력의 시민단체에 대한 공격이 늘어나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아직도 민주화 수준이 낮은 한국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정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시민단체들은 재계, 언론계, 정계, 종교계, 관계의 문제들을 비판해왔고, 이에 대한 보수 집단의 반발이 시민단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lt;/P&gt;
&lt;P&gt;한국사회가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집단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기존의 이득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부정과 파행을 계속하려는 보수 집단과 이를 바꾸기 위해 비판하는 집단 간의 힘겨루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누가 한국사회를 시민 모두가 높은 삶의 질을 영위할 수 있는 선진사회로 바꿀 수 있는가? 세계화, 사회양극화, 고령화, 저출산, 다인종 다문화화 등 새로운 변화 속에서 미래의 한국사회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인가? 그것을 위해 현재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 과거 지향적인 정치적 이념의 과잉 속에 가려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집단만이 미래의 한국을 책임질 수 있다.&lt;/P&gt;
&lt;br /&gt;</description>
			<category>2008년 02월</category>
			<author>(acham)</author>
			<guid>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4</guid>
			<comments>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4#entry20824comment</comments>
			<pubDate>Tue, 05 Feb 2008 19:59:0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이슈] 경부대운하에 대한 분석과 대안 모색</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3</link>
			<description>&lt;P&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6699 size=5&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 color=#000000 size=3&gt;&lt;STRONG&gt;[이슈]&lt;br /&gt;&lt;/STRONG&gt;&lt;/FONT&gt;&lt;br /&gt;&lt;STRONG&gt;경부대운하에 대한 분석과 대안 모색&lt;br /&gt;&lt;br /&gt;&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STRONG&gt;변창흠&lt;/STRONG&gt; 세종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lt;A href=&quot;mailto:changbyeon@sejong.ac.kr&quot;&gt;changbyeon@sejong.ac.kr&lt;/A&gt;&lt;br /&gt;&lt;STRONG&gt;&lt;br /&gt;개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이중성&lt;/STRONG&gt;&lt;/P&gt;
&lt;P&gt;우리 사회에서 개발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이중적이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국토 공간 개발은 경제성장을 지원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되면서 개발은 기존 공간을 파괴하고 새로운 구조물을 건설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개발은 보전(conservation)과 상충하고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개발이 지닌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근래 각 기관들은 이름에서 ‘개발’자를 떼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다. 한국토지개발공사는 한국토지공사, 한국수자원개발공사는 한국수자원공사로 변경하였으며, 국토개발연구원은 국토연구원, 교통개발연구원도 한국교통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달았다. &lt;/P&gt;
&lt;P&gt;그렇다고 개발 자체가 배척되거나 선호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참여정부 기간 동안에도 주택공급 확대, 지역균형발전 정책, 기업경쟁력 제고와 일자리 창출, 투자활성화 등을 목적으로 다양한 개발 사업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왔다. 수도권의 신도시, 행복도시, 혁신도시, 지역발전특화지구, 경제자유구역특별법, 평택지원특별법, 미군공여구역주변지역지원특별법 등 각종 특별법에 의한 개발 사업이 그 실례이다. &lt;/P&gt;
&lt;P&gt;&lt;STRONG&gt;개발 이익 좇아 신도시 27개 추진 중&lt;/STRONG&gt;&lt;/P&gt;
&lt;P&gt;이처럼 ‘개발’이라는 용어는 싫어하지만 개발 사업을 선호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대규모 개발 사업이 추진되는 경우 개발예정지나 주변지역은 대부분 확실하게 이익을 보지만, 비용은 거의 부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규모 토목사업이라고 비판을 하고 반대하지만, 막상 추진되는 경우 지자체나 주민, 정치인들은 환호할 것이다. 원주민과 토지소유자는 지가가 상승하고, 막대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며, 새로운 도시편익시설이 설치되기 때문에 반길 것이다. 지방자치단체 입장에서도 재정적인 추가 부담 없이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도시기반시설이 확충되고, 지방세수가 증대되며, 민원사업들을 일시에 해결할 수도 있다. 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지방의원, 관료들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지역개발을 통해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고, 자신의 역량을 과시할 수 있으며,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행정조직도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건설업체는 수주 물량이 확대되고, 부대사업으로 도시개발을 수행하는 경우 개발이익을 독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잔뜩 기대하고 있다. &lt;/P&gt;
&lt;P&gt;국가재정과 국민경제 전체에 미치는 효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규모 개발 사업이 당장은 재정적인 부담을 수반하지 않는다. 용도변경과 지가상승을 통해 발생하는 개발이익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자 유치로 추진하는 경우 재정 부담이 거의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개발사업의 직간접인 파급효과로 고용을 창출하고 건설관련 산업을 활성화하며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lt;/P&gt;
&lt;P&gt;개발 사업이 갖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전국적으로 엄청난 물량으로 추진되고 있다. 수도권에서는 연간 공공부문만 900만 평 이상의 택지개발을 계획하고 있고 판교, 동탄, 송파, 검단을 비롯한 10개의 신도시가 건설 중에 있다. 개발제한구역 해제로 1,500만 평, 인천경제자유구역 6,300만 평, 황해권경제자유구역 2,000여 만 평, 평택국제평화신도시 528만 평, 미군공여지 및 주변구역 15억 평 등이 추진되고 있다. 지방에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외에도 수도권에서 이전할 175개 공공기관을 수용하기 위한 10개의 혁신도시, 6개의 기업도시가 추진 되고 있다. 대표적인 신도시만도 전국에 걸쳐 27개가 동시에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lt;/P&gt;
&lt;P&gt;&lt;STRONG&gt;경제적 타당성 없는 경부운하 어떻게 민자유치하나&lt;/STRONG&gt;&lt;/P&gt;
&lt;P&gt;경부운하 사업을 단순한 개발 사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업자체가 경제적 타당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인수위는 민자유치 방식을 도입하는 것으로 경제적 타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즉, 정부가 운하건설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자체적으로 사업성을 분석해서 신청을 하면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전체적인 비용-편익의 크기를 비교하여 사업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경제성 분석과 사업 자체의 현금흐름을 통해 현금 유입과 현금유출의 크기를 비교하는 재무적 타당성 분석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경제적 타당성은 있으나 재무적 타당성은 없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인 경우가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lt;/P&gt;
&lt;P&gt;그동안 추진되어 온 민자유치사업은 당초 민간의 창의성을 활용하여 공공부문의 효율성을 제고하겠다는 공언과는 달리 민간부문의 영리성을 충족시켜주며 결과적으로 공공부문이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로 변질되어 왔다. 민간부문은 사업자체의 운영수입보다는 시공이윤을 확보하는 데만 관심 갖게 되었고, 운영수입의 부족은 국가재정을 통해 보전해 왔다. 2006년 민자유치사업에서 수익성이 부족한 부분을 공공이 재정을 통해 메워주던 운영수익보장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이미 준공된 인천신공항고속도로 등과 같은 민자유치사업에 대해서는 국가가 매년 수백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lt;/P&gt;
&lt;P&gt;타당성이 없는 경부운하에 어떻게 민자유치사업이 가능할까? 경부운하를 물류수송용으로 쓰든 관광용으로 쓰든 좁은 국토에 KTX와 고속도로망, 연안항만이 발달되어 있는 교통체계 하에서는 분명히 운영수입으로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다. 결국 민간개발사업자에게 주변지역의 도시개발권을 주고 개발이익을 통해 수익을 보전하는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미 폐지된 민자유치사업의 운영수익보장 제도를 재도입할지도 모른다. 민자유치사업의 운영수익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경우 사업초기에 일시에 지불할 사업비를 수십 년에 걸쳐 분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lt;/P&gt;
&lt;P&gt;&lt;STRONG&gt;고용 생산 부가가치 유발 숫자놀음 의미 없어&lt;/STRONG&gt; &lt;/P&gt;
&lt;P&gt;경부운하를 국운을 상승시키는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추진하는 측에서는 경부운하의 건설이 엄청난 파급효과를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경부운하는 수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며 수도권 동부, 경북북부내륙지방이나 경남 내륙지방의 지역개발을 촉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lt;/P&gt;
&lt;P&gt;우선, 경부운하는 엄청난 고용창출효과, 생산유발효과, 부가가치 유발효과를 초래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각종 유발효과는 투입되는 사업비에 일정한 계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계산한다. 생산유발효과는 한국은행이 작성한 산업연관표에 나온 생산유발계수를 적용하며, 해당사업비에 건설산업 생산유발계수(2003년 기준 1.980)를 곱하면 된다. 부가가치유발효과도 동일하게 사업비에 건설산업 부가가치 유발계수(2003년 기준 0.837)를 곱하여 산출한다. 고용창출효과는 금액당 고용유발계수를 곱해서 계산하는데 2003년 기준으로는 10억 원당 11.1명이었다. &lt;/P&gt;
&lt;P&gt;이러한 방식으로 운하사업의 유발효과를 계산한다면 사업비용이 클수록 유발효과가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땅을 팠다가 다시 메워 원래 상태로 만드는 데 수십조 원이 투입되었더라도 동일한 파급효과가 나오게 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수치상의 파급효과와 유발효과의 크기가 아니라 사업내용이 얼마나 지식기반 경제에서 생존할 수 있으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가이다. 토목경제가 지식기반산업 시대에 생존력을 지닐 수 없으며 운하사업을 통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높이거나 수출산업으로 육성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lt;/P&gt;
&lt;P&gt;&lt;STRONG&gt;물류비용 절감 효과도 없어&lt;/STRONG&gt; &lt;/P&gt;
&lt;P&gt;다음으로 경부운하는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까? 2006년 국가교통 DB에 따르면 서울에서 출발하는 화물자동차 중 부산, 경남, 울산에 도착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하고 대구와 경북을 포함하더라도 2.8%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화물자동차 목적지의 87.2%가 서울, 경기, 인천과 같은 수도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산에서 출발하는 화물자동차의 경우도 수도권을 목적지로 하는 비율은 2.3%에 불과하다.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겠다고 하지만 물동량이 전체화물 수송량의 5%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 물량이 모두 운하로 이동한다고 할지라도 전체 물류비용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lt;/P&gt;
&lt;P&gt;운하를 통해 물류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었다면 이미 운하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물류비용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적어야 한다. 경부운하가 벤치마킹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물류비용은 2000년 기준으로 15.3%로 우리나라의 12.5%보다 오히려 높다(한양대 홍종호 교수, 2007). 운하는 다른 교통수단을 보완하는 수단일 뿐 이것이 국가의 물류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편한다거나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는 수단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또한 기업 입장에서는 물류가 비용이지만, 국가전체로 보면 물류도 산업의 일종이고 물류산업에는 수많은 인력이 고용되어 있다. 따라서 물류비용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물류산업의 일자리와 생산액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lt;/P&gt;
&lt;P&gt;마지막으로 경부운하의 건설이 낙후지역에 획기적인 개발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개발에 대한 기대심리 때문에 이 지역의 부동산은 이미 3배에서 10배까지 상승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지방자치단체와 건설업체, 그리고 주민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운하가 통과하는 항구에 대규모 개발 사업이 일어날 만큼의 물동량과 유동인구가 있을까?&lt;/P&gt;
&lt;P&gt;하루에 많게는 30여 척, 적게는 12척의 바지선이 통과하는 내륙 항구는 지방도시의 고속버스터미널이나 화물터미널에 비해 물동량이 결코 많을 수가 없다. 지방도시의 여객터미널이나 화물터미널 인근에 몇 개의 식당과 편의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시설이 없는 점을 고려하면 그보다도 물동량이나 유동인구가 적은 내륙 항구가 운하 개통을 통해 활성화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미 지방은 주택보급률이 120%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택지개발사업은 기존 도심을 죽이고 기존 주택을 빈집으로 남겨두게 될 것이다.&lt;/P&gt;
&lt;P&gt;&lt;STRONG&gt;한건주의 버리고 국가 전략·성장 산업 알차게 육성해야&lt;/STRONG&gt;&lt;/P&gt;
&lt;P&gt;지구온난화와 이를 방지하기 위한 교토의정서 준수 의무, 에너지 자원 고갈 위기와 에너지 가격의 급등 등을 고려할 때 현재와 같은 자동차 위주의 물류체계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신속성이 경쟁력인 물류문제를 느림의 특성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은 올바른 대안이 될 수 없다. 남북 간 화해와 협력, 동남아시아와 시베리아, 유럽으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교통물류 네트워크를 고려한다면 철도가 오히려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국내에서도 포항에서 태백, 강릉까지, 서울에서 강릉, 양양까지 연결되지 못한 철도를 연결하고 기존 철도를 복선화한다면 철도가 물류비용을 줄이고 에너지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lt;br /&gt;경부운하에 투자하고자 하는 막대한 재원은 그것이 국가예산이든 민간재원이든 국가의 전략산업, 성장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단기적인 사업성, 개발이익을 활용한 수익성에 치중하여 사업추진 여부를 결정할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고려할 때 가장 바람직한 산업, 안정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에 재원이 집중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국가적으로,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산업이 현재에는 수익성이 부족하다면 국가가 재정을 투입하여 보조하더라도 사업화, 산업화해야 한다.&lt;/P&gt;
&lt;P&gt;경부운하와 같이 대규모 개발 사업에 기대는 지역개발방식은 결코 성공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지속성을 유지할 수도 없다. 경부운하 500여㎞를 따라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난개발이 발생할 경우 우리 국토의 양호한 경관은 사라지게 되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자원이 파괴될 수 있다. 리조트법, 테크노폴리스법 등을 통해 단기간의 부동산 붐에 기대하여 개발에 치중했던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이 거품이 꺼지고 난 이후 흉물로 남은 구조물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외부의 투기자본에 의존하는 개발이 아니라 지역의 내생적인 자원을 활용해 지역 특성에 기반을 두어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개발 모델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lt;/P&gt;</description>
			<category>2008년 02월</category>
			<author>(acham)</author>
			<guid>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3</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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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5 Feb 2008 19:56:48 +0900</pubDate>
		</item>
		<item>
			<title>[특집] 인터뷰_“보상 문제로 주민들 마음이 황폐해져 속상합니다”</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2</link>
			<description>&lt;P&gt;&lt;br /&gt;&lt;STRONG&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size=5&gt;&lt;FONT color=#006699&gt;“보상 문제로 주민들 마음이 황폐해져 속상&lt;br /&gt;&lt;br /&gt;&amp;nbsp;합니다”&lt;br /&gt;&lt;/FONT&gt;&lt;br /&gt;&lt;/FONT&gt;&lt;FONT color=#8e8e8e size=3&gt;인터뷰&amp;nbsp; 최광용 &amp;lt;태안시대&amp;gt; 대표기자&lt;/FONT&gt;&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참여사회」 편집부&lt;/STRONG&gt; &lt;A href=&quot;mailto:acham@pspd.org&quot;&gt;acham@pspd.org&lt;/A&gt;&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 color=#006699&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
&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 color=#006699&gt;“조심해서 오십시오. 태안, 이곳 분위기는 더 험악해지고 있습니다.”&lt;/FONT&gt;&lt;/P&gt;
&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 color=#000000&gt;참여사회 편집부가 지역주간신문인 &amp;lt;태안시대&amp;gt;의 최광용 대표기자를 만나러 가는 중에 그로부터 받은 문자메시지다. 마침 라디오에서는 태안군민궐기대회에서 분신을 기도해 중태에 빠진 지창환 씨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터라 태안의 심각한 분위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 color=#000000&gt;기름유출 사고가 난 지 한 달여 만에 태안지역주민 세 명이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었다. 사고 책임자 삼성은 사고발생 45일이 지나서야 신문광고를 통해 사과문이랍시고 사실상 ‘홍보’를 했다. 사고발생부터 지금까지 언론에서 보고 듣지 못했던 ‘삼성’이란 이름을 생각하면, 삼성의 언론 장악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삼성’을 찾기도 힘들었지만, 삼성을 보호하는&amp;nbsp; 보도 행태도 놀라웠다.&lt;/FONT&gt;&lt;/P&gt;
&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 color=#000000&gt;사회 이슈와 흐름을 주로 언론을 통해 알게 되는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언론은 새로운 사실이나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알리기보다 돈과 권력의 시녀 노릇에 충실한, ‘무늬만 언론’이다. 이런 가운데도 피해지역을 취재하면서 사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태안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2개 중 하나인 &amp;lt;태안시대&amp;gt;의 최광용 기자를 통해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거나 잘못 보도된 태안 사고의 진실에 대해 들어보았다.&lt;/FONT&gt;&lt;/P&gt;&lt;/DIV&gt;
&lt;P&gt;&lt;/FONT&gt;&lt;STRONG&gt;피해지역에 법률소송 설명회 펼침막이 많이 걸려 있다. 주민들의 반응은 어떤가?&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006699&gt;사건이 터지자마자 법률사무소들이 분주하게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설명회를 빙자한 행사를 많이 했다. 피해 주민들은 위기감이 들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 아니겠는가. 심각한 문제다. 과거 여수 씨프린스호 경우도 법률소송 비용이 엄청나서 보상을 받고도 남는 게 없었다. 주민들의 피해보상이나 배상문제의 협상주체, 즉 창구가 단일화되면 법률 비용을 줄일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lt;/FONT&gt;&lt;/P&gt;
&lt;P&gt;&lt;STRONG&gt;군의회 등에서 조정을 하지 않나?&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006699&gt;군의회는 현재 식물상태다. 인수위를 찾아간다든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다든지 언론의 조명을 받는 행위는 한다. 주민들 간 대립과 갈등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장이라도 마련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을 것이다.&lt;/FONT&gt;&lt;/P&gt;
&lt;P&gt;&lt;STRONG&gt;주민 간에 합의가 되지 않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006699&gt;알다시피 아직 보상 기준이나 보상액 등이 설정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수협에서 어업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대책위를 구성하니까 비어업인들의 보상 문제가 남게 되고 여기에서 제각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요식업, 숙박업 이런 식으로는 가능한데, 아무런 객관적 자료가 없는 ‘무면허 맨손업’에 해당하는 사람이 태안군 전체에서 80%가 넘는다. 호소할 통로도 없고 방법도 모르니 불안감은 증폭되고, 그런 중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고…. 결국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를 가장 크게 본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형 참사의 형태 아닌가.&lt;/FONT&gt;&lt;/P&gt;
&lt;P&gt;&lt;STRONG&gt;오염 방제시스템에 관련된 논란이 많지 않았나?&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006699&gt;방제업체와 주민이 갈등을 빚은 사례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주민들은 오염이 확대될수록 초조해지는데, 방제업체는 태업수준인 것이다. 전국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를 동원해서 방제업체가 해야 할 일을 시켜 주민들이 반발했던 사례가 있다. 또 방제업체가 업무에 대한 증빙자료를 제출하기 위해 빈 통을 갖다놓고 작업하는 것처럼 사진 찍는 것이 발각 되어 자술서를 받아냈는데, 이런 것을 해경이 묵인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해경의 확인절차 없이 방제업체가 오염물질을 수거했다는 증빙자료만 가져오면 현장에서 서명해주고 확인해서 나중에 방제비용을 청구하는 것이다. 이건 부당이득 아닌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보니까 여수 때도 방제업체 사장과 해경 고위간부가 구속되거나, 국회의원과의 유착 등 지저분한 관계가 있었다.&lt;/FONT&gt;&lt;/P&gt;
&lt;P&gt;&lt;STRONG&gt;이곳이 고향이라 사고에 대한 느낌이 남다를 것 같다. 주민들을 만난 느낌은 어땠나?&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006699&gt;한마디로 극심한 눈치 보기다. 큰 틀에서 보면 이 사고로 군민전체가 연쇄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맞다. 바닷가에서 시작된 피해가 읍내 수산물시장에까지 여파를 미치는 등 지역경제 전체가 침체됐다. 그래서 누구나 다 피해자니까 비어업인, 농업인까지 보상, 배상 신청하겠다고 하니 ‘보상병 환자다’, ‘보상병에 오염됐다’고 서로 손가락질을 한다. 사고 터지기 전까지 조용하고 살기 좋던 이 동네가 갈가리 찢겨져 주민들 삶이 황폐화된 게 가장 속상하다.&lt;br /&gt;&lt;br /&gt;&lt;/FONT&gt;&lt;STRONG&gt;100만 자원봉사자의 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006699&gt;자원봉사자의 노동력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번 기회에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본다. 물론 무상노동의 제공자인 자원봉사자들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그 무상노동으로 인해 대가를 얻는 사람이 있다. 대표적으로 가해자가 자원봉사자들의 무상노동 결과물을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명백한 부당이득 아닌가. &lt;br /&gt;&lt;/FONT&gt;&lt;FONT color=#006699&gt;&lt;br /&gt;자발적 참여에 의한 무상노동의 결과가 사취되는 게 아니라 그 결과가 사회 속에 쌓이도록 하는 ‘사회적 공적기금’을 축적해야 한다. 자기의 무상노동이 예기치 않은 사회적 재난이 닥쳤을 때 공적기금으로 축적되도록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공중으로 사라질 수 있는 자기 활동의 결과물이 사회기금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축적될 수 있다면 그분들로서도 더 보람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lt;br /&gt;&lt;br /&gt;&lt;br /&gt;&lt;FONT face=굴림 color=#8e8e8e&gt;&lt;STRONG&gt;&amp;nbsp;※ 「참여사회」 2월호의 오류를 바로 잡습니다&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face=굴림 color=#8e8e8e&gt;편집 과정에서 인터뷰이 &#039;최광용&#039; 대표기자의 이름을 &amp;nbsp;&#039;최종영&#039;으로 잘못 기재했습니다. 최광용 기자님, &amp;nbsp;「참여사회」독자 분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참여사회」편집부 드림&lt;br /&gt;&lt;br /&gt;&lt;/FONT&gt;&lt;/P&gt;&lt;/FONT&gt;</description>
			<category>2008년 02월</category>
			<category>대형 참사</category>
			<category>무상노동</category>
			<category>방제</category>
			<category>배상</category>
			<category>법률소송</category>
			<category>보상 기준</category>
			<category>보상병</category>
			<category>비어업인</category>
			<category>사회기금</category>
			<category>사회적약자</category>
			<category>오염</category>
			<category>자발적 참여</category>
			<category>자원봉사</category>
			<category>최광용</category>
			<category>최종영</category>
			<category>태안</category>
			<category>협상주체</category>
			<author>(acham)</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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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2#entry20822comment</comments>
			<pubDate>Tue, 05 Feb 2008 19:31:30 +0900</pubDate>
		</item>
		<item>
			<title>[특집] 기름 방제에 이어 태안에 부는 법률자원봉사 바람</title>
			<link>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20821</link>
			<description>&lt;P&gt;&lt;br /&gt;&lt;FONT face=&quot;&#039;Batang&#039;, Serif&quot; color=#006699 size=5&gt;&lt;STRONG&gt;기름 방제에 이어 태안에 부는 법률자원봉사&lt;br /&gt;&amp;nbsp;&lt;br /&gt;바람&lt;br /&gt;&lt;br /&gt;&lt;/STRONG&gt;&lt;/FONT&gt;&lt;STRONG&gt;박경신&lt;/STRONG&gt;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고려대 법과대학 교수 &lt;A href=&quot;mailto:kyungsinpark@korea.ac.kr&quot;&gt;kyungsinpark@korea.ac.kr&lt;/A&gt;&lt;/P&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e4e4e4&quot;&gt;
&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gt;끔찍한 환경재앙인 태안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하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은 하나 둘 인터넷 카페로 모여들었고 태안으로 함께 달려가 절망에 빠진 검은 바다를 희망의 바다로 일구어냈다. 생태계와 지역 주민들의 삶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 자발적인 시민참여에 의한 새로운 시민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gt;물론 이번 태안 자원봉사가 자발적 시민참여운동의 첫 사례는 아니다. IMF 당시 범국민적 금모으기 운동, 여중생 미군장갑차 압사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 탄핵을 규탄하는 촛불시위 등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 사회에 희망의 빛을 비춰주었다. 반면 황우석 사건과 같이 진실과 정의가 사라진 시민 집결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는 고민으로 남는다.&lt;/FONT&gt;&lt;/P&gt;
&lt;P&gt;&lt;FONT face=&quot;&#039;Gulim&#039;, Sans-serif&quot;&gt;태안 사고의 책임주체인 삼성과 정부는 훼손된 태안 주민들의 삶의 터전 복원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도 여전히 모르쇠와 늑장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변호사, 사법연수원생, 대학생 등으로 이루어진 법률봉사단이 피해주민을 위한 공익법률상담소를 현지에 열어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내면서 한국사회에 부족한 전문가의 사회참여 본보기가 되고 있다. 건강한 시민들의 단결이 단발성에 머물지 않고 폭넓은 사회적 영역으로 꾸준히 퍼져나가 보다 다양하고 진일보한 사회참여로 승화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lt;/FONT&gt;&lt;br /&gt;&lt;/P&gt;&lt;/DIV&gt;
&lt;P&gt;참여연대 공익법센터는 2008년 1월말 현재 법대생, 대학원생, 예비연수원생, 연수원생 등 180여 명(싸이월드 등록자 기준)으로 이루어진 법률자원봉사단을 조직하여 태안 현지에서 공익법률상담소를 1월 5일부터 운영해오면서 이번 사태의 올바른 법률적 해결방안에 대한 주민 대상 홍보와 피해입증의 다양한 방법에 대한 개별적인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공익법센터가 현지에 상담소를 개소하기 이전에 이미 여러 법무법인들이 현지에서 설명회나 개별접촉 등을 통해 피해주민들로부터 사건을 수임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이들 법무법인들은 거의 모두 기존 어업권 소송의 관행을 따라 인지대와 감정비용이 주축이 되는 소송비용을 자신들이 대신 납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임료 역시 사건이 해결된 후에 받는다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피해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었다. 자금력과 전문성을 갖춘 다수의 법무법인들이 사건을 맡기 위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험도, 자금력도 없는 법률자원봉사단 공익법률상담소는 어떤 일을 하겠다는 것일까? &lt;/P&gt;
&lt;P&gt;&lt;STRONG&gt;완전 배상, 완전 복구, 가해자 책임 지켜져야&lt;/STRONG&gt;&lt;/P&gt;
&lt;P&gt;참여연대 공익법센터가 공익법률상담소 및 법률봉사단을 통해 주민들에게 홍보하고 있는 ‘올바른 법률적 해결방안’의 3원칙은 완전한 배상, 완전한 복구, 가해자 책임이다. 언뜻 읽어보면 거창해보이지만 이 3원칙은 일반적인 민사사건에서 적용되는 원칙이다. 가해자가 과실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면 그 피해를 완전하게 보상하거나 복구할 책임을 진다는 원칙이다. &lt;/P&gt;
&lt;P&gt;이 원칙을 사상 최대의 사고라고 말할 수 있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에서 실현하는 것은 공익법센터의 장기적인 목표인 법치주의 실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피해보상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억울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온전한 피해보전을 받지 않으면 그 사람은 법질서에 대한 신뢰나 법치주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건전한 자긍심을 포기하려는 유혹에 강하게 노출되어 위법 행위에 대한 경계심이나 권리의식이 약화되고 장래의 부정부당에도 침묵하게 된다. 남에게 억울한 피해를 준 사람 역시 피해보상을 강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피해를 방지하려는 동기가 사라질 것은 당연하다. &lt;/P&gt;
&lt;P&gt;그리고 피해보상을 올바르게 이루려는 노력 속에서 우리 전체의 자산인 환경의 복원작업도 책임 있게 이루어질 수 있다. 환경자원에 대한 장래피해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대한 피해는 피해보상의 일환으로 사고를 일으킨 자가 복원을 하도록 함으로써만 보전될 수 있다. 정부가 1차적으로 환경복원작업을 하겠지만 이것이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이 된다면 국민 전체와 국토 전체를 위해 예산을 균형 있게 운영해야 하는 정부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부담은 가해자들로부터 반드시 보전 받는다는 약속이 있을 경우 환경복구작업은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amp;nbsp; &lt;/P&gt;
&lt;P&gt;&lt;STRONG&gt;피해주민이 올바로 알고 요구하고 적극 입증해야&lt;/STRONG&gt; &lt;/P&gt;
&lt;P&gt;그렇다면 누군가 법률자원봉사를 통해 노력하지 않더라도 올바른 피해보상이 이루어질까? 1만 2,000톤의 기름을 유출한 태안사고보다 유출량이 적었던 (5,000톤 정도) 95년도 씨프린스호 사고 당시에도 법무법인 등 기존의 법률전문가들이 사건 해결에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실제 재산상 손해는 1,500억 원에 달했지만, 여러 가지 입증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국제기금에 실제 청구된 어장피해 액수는 735억 5,400만 원이었다. 이 중에서 증거수집 미비로 실제 배상액은 150억 원 수준에 그쳤으며 방제비용까지 합쳐도 502억 2,700만 원에 그쳤다(연합뉴스 2007년 12월 10일자). &lt;/P&gt;
&lt;P&gt;1989년 인구밀도가 훨씬 낮은 미국 알래스카에 일어난 3만 5,000톤 가량의 유출 사고에 대해서 엑슨 정유사가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실손해액 약 5,000억 원 및 징벌적 손해배상 약 2조 원 (미확정) 그리고 정부에게 환경복구비용 및 환경피해배상조로 지급한 1조 원 등 총 4조 원에 비하면 씨프린스호 사고에서의 보상액수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다. &lt;/P&gt;
&lt;P&gt;자발적인 방제작업에 있어서도 95년부터 97년 사이의 방제작업에 대해 GS칼텍스는 207억 원만을 지출했다. 반면 알래스카 유출사고에 대해 엑슨사는 3년간의 방제비용으로 그 100배가 넘는 2조 2,000억 원 가량을 지출했다고 주장한 것에 비하면 여수에서 과연 적정한 방제노력이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럽다. &lt;/P&gt;
&lt;P&gt;이 당시에도 법무법인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소송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결국 씨프린스 사태가 처리된 방식대로 이번 사태가 처리된다면 실제 발생한 손해에 대한 민사적인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충분한 환경정화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실제 책임을 져야 할 가해자는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lt;/P&gt;
&lt;P&gt;‘올바른 피해보상’이 이루어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피해자들 스스로가 바로 서야 한다. 피해자들 스스로가 법적 권리와 절차에 대해 올바로 알고 실제로 이 절차를 대리하여 밟아줄 법무법인들에게 올바른 요구를 하고 스스로 피해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