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어떻게 사는가? 박정희의 고도성장을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데, 그것은 과연 어떤 ‘기적’이었는가? 그 ‘기적’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지금 가난했던 30년 전보다 과연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크게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우리가 재화가 넘쳐나는 ‘풍요사회’에서 살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게 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은 ‘척박한 풍요의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삶인가?

‘척박한 풍요’란 우선 자연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많은 재화를 생산해서 이룬 풍요를 뜻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약하디 약한 존재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을 없애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자연을 없앤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없앤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연 속의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강의 기적’은 ‘한강의 경악’이었다. 박정희가 이룬 ‘한강의 기적’은 한강을 파괴하고 이룬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적’은 무서운 결과를 낳았다. 이 사회는 자연을 파괴하고 경제의 성장을 이루는 자연파괴형 사회가 되었고, 사람들은 시나브로 이 자연파괴형 사회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또한 ‘척박한 풍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관계로 만들고 이룬 풍요를 뜻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는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빈인빈 부익부의 풍요’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진 부자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자가 이 땅에서 함께 살고 있다. 서로 가까이 붙어산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웃이지만, 사회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결코 이웃일 수가 없다. 모든 것을 가진 부자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자는 값싼 소모품이거나 자신의 너그러움을 과시할 대상일 뿐이다. ‘빈익빈 부익부’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잘못된 제도의 산물이다. 이 사회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는 ‘빈인빈 부익부’의 수레바퀴를 멈추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척박한 풍요’는 정신과 물질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고 이룬 풍요이다. 우리는 분명 물질적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물질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먹지 못하면 죽고마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 점에서 우주보다도 고귀한 존재일 수 있다. 따라서 참으로 풍요로운 삶은 정신과 물질의 균형 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태에서는 정신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없게 마련이며, 당연하게도 자신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쉽다. 거꾸로 물질적 부를 쌓는 데에만 골몰하는 사람도 돈의 악취에 젖어서 사람의 향기를 잊어버리게 되기 쉽다. 사회안전망이 약한 사회에서는 부자는 부자대로 빈자는 빈자대로 이렇듯 물질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된다.

한국 사회가 이런 꼴을 갖추게 된 것은 박정희의 ‘파괴적 개발’을 통해서이다. 그의 통치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려서 애썼고, 그 결과 한국 사회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룬 것은 바로 ‘척박한 풍요’였다. 이것은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사회적 상태이다. 우리는 하루빨리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휘황한 불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그냥 벗어나자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척박한 풍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그런 ‘자원’이 있는가? 물론, 있다. 우리가 안고 있는 큰 문제는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원’을 올바로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한국은 아주 작은 나라이다. 작은 나라일 뿐만 아니라 공업화에 필요한 자원의 부존량도 아주 적다. 현대 사회는 석유공업사회라고 불릴 정도로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석유가 단 한방울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국내총생산으로 따져서 세계 11위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분명히 작은 나라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이미 큰 나라, 그것도 세계 220여개국들 중에서 1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엄청나게 큰 나라이다. 그러나 삶의 질과 관련된 지표들을 보자면, 참담하다고 해야 좋을 정도이다. 이 점에서 ‘척박한 풍요’란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는 삶의 질을 뜻한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선진화’이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 곧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이룬 부를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척박한 풍요’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참된 풍요’의 삶을 살 것인가? ‘참된 풍요’의 삶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정신과 물질의 균형을 추구하는 삶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의미에서 사람답게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이런 삶을 부정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삶을 부정할 뿐더러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아직 삶의 질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망가질대로 망가진 자연을 살리기 위한 환경규제에 반대하고, 모두가 어울려 잘 살기 위한 사회안전망의 확충에 반대한다. 또한 그들은 이렇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치꾼들에게 뒷돈을 대주고 입법부를 손에 넣었다. 그 결과 정치꾼들이 뒷돈을 받는 것이 당연시되는 ‘정경유착’의 구조화가 이루어졌다. 이 나라의 최대정당이 ‘차떼기당’이 되어서 ‘정치개악’의 선봉에 선 것은 이 때문이다. 정경유착과 지역정치야말로 ‘차떼기당’의 모태이므로, 어떻게 해서든 정치개혁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정치가 올바로 서야 나라가 올바로 선다. 우리나라가 이른바 ‘만달러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정치가 올바로 서지 않아서 정경유착으로 대표되는 낡은 구조가 개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의 구조를 개혁해야 비로소 ‘척박한 풍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우리가 쌓은 부는 우리가 정말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이 사회를 바꾸는 데 써야 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만달러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꾼들에게 상납할 돈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가야 할 돈을 빼돌리고, 자연을 돌보는 데 써야 할 돈을 빼돌리는 것이 지금 한국의 실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하게도 대다수 사람들이 ‘척박한 풍요’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척박한 풍요’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있다. 그러나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길을 막고 있는 자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 자들을 물리치고 정치개혁을 이루어서 자연을 돌보고 이웃과 함께 사는 ‘참된 풍요’의 삶을 찾아서 나아가자.
홍성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상지대 교수
2003/12/29 10:12 2003/12/2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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