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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결혼하면 각자가 읽던 책들도 합해진다는 의미로 <서재의 결혼>이라는 책도 나왔지만 아직 나의 서재는 완전한 합일에 이르지 못했다. 주인을 따라 나서지 못한 나의 책들 중에는 여전히 청춘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보듬고 친정에서 그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들이 꽤 있다. 그래서 지금도 부모님을 뵙고 오는 돌아올 적마다 가방 안에는 으레 한두 권의 책이 숨어 들어있다. 부모님 눈치 차리지 못하시게 책을 옮기는 나의 ‘비밀 공수작전’이다. 출가한지 십 몇 년이 지난 지금, 이제 와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여 텅 빈 집안에서 서가마저 비게 하는 것은 송구스런 일인듯 하여 드러나게 책을 안고 나오지 못한다.

신정 때에 가서는 시집 몇 권을 가지고 왔다. 이용악과 임화의 시집 두어 권이었다. 얇은 책 피의 시집들을 가방에 챙겨 넣으면서 이상하게도 버릇처럼 가슴이 졸여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는 누렇게 색까지 바랜 그 시집들은 대학시절 누구나 알지 못하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읽어야 했던 책들이었다. 소위 ‘월북시인’들의 작품들이지 않는가. ‘북한’이 금기시 되던 시대에 ‘월북’이라니, ‘접근금지’가 많기도 하던 시대였다. 자의든 타의든 ‘북한’으로 가버린 시인의 시들은 금지구역안의 열매들이었다. 하지만 울타리를 두른다고 과일의 향기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을 텐가. 그때 가슴 졸이며 읽던 그 시들이 발하던 빛은 얼마나 강렬하던지!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를 읽으며 나는 한껏 부풀게 돛을 올리고 바다를 가르는 배를 그리며 그 위에 나를 둥실 얹어 두었다. 백석, 정지용, 이용악, 임화....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던 그 공기의 서늘함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요즘 서점에 나가면 한때 내가 감추며 읽었던 시집들이 진열대에 ‘버젓이’나와 있다. 시인들의 얼굴도 전면으로 나와 있고 시집의 장정은 과분할 정도로 멋있다. <현대시 100년 총서> 시리즈에도 우리가 낙인찍었던 ‘월북시인’들이 자리를 떡하니 하나씩 잡고 앉아있다. 어쩌면 감격스러워야할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왠지 아리기만 하다. 내가 기억하는 그 광휘를 지금의 시집에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좋아져서’아무도 숨어서 시를 읽을 필요는 없게 되었다. 누구든지 원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들의 시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어쩌면 이제 그들은 다른 책들에 비하면 경쟁력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그저 한 권의 시집일 뿐이리라. 영어참고서나 대입 논술고사 준비서나 취업지침서나 그런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시집’인 것이다.

설사 같은 시집들의 반열에서 경쟁한다고 해도 글쎄,다. 읽기 쉽고 달콤한 시들이 지천인데 민족의 설움이나 분단의 고통을 살을 발라내듯이 노래해 놓은 그 시인들의 작품이 어떻게 지금의 감성에 다가올 수나 있을까? 잃어버린 귀한 것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건만 무심한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갈 뿐이다.

얼마 전 임화의 시가 몇 편 더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오늘도 또한 나 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임화의 ‘현해탄’ 중에서)

난리통인 조국의 형편 때문에 이리 찢기고 저리 갈라진 시인들의 시편들이 다시 귀퉁이를 맞춰 나오니 반가운 소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복원되는 시집의 권수와 그 책 부피가 두꺼워 질 때 마다 나는 여전히 가슴이 쓰리다. 아, 우리가 잃어버리고 산 ‘시대정신’이 저만큼이나 되는구나. 한 시대를 뭉텅 잘려 버린 채 우리는 자랐다. 아마도 그 결핍감은 영원히 다시 채워질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전념하는 시민운동의 진정한 목적은 그런데 있지 않을까. 작게는 한 시민이, 크게는 한 시대가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이나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

아직도 내게는 커 보이기만 하는 ‘월북시인’의 시집을 다시 열어본다.

‘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울어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이용악의 ‘오랑캐꽃’중에서).
권은정 (인터뷰전문기자, 번역문학가)
2004/01/13 13:34 2004/01/1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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