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窓> 돌아보지 마라!
칼럼과 기고/홍성태칼럼 :
2004/09/03 10:21
1965년 밥 딜런은 공연을 위해 런던에 3주간 머물렀다. 펜네베이커는 그때 밥 딜런의 생활이며 공연 모습 등을 기록하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967년에 발표된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돌아보지 마라'이다. 교육방송에서 8월 30일부터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이라는 대단히 과감한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이 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거의 끝나갈 때에 보게 되어서 너무 아쉬웠지만, 23살의 천재 밥 딜런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밥 딜런은 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작사, 작곡, 편곡에 모두 능한 전방위 음악가이다.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와 함께 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예술가로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다. 팝아트의 개척자로 알려진 워홀은 소비사회의 특징을 포착하는 데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밥 딜런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 그런가?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뛰어난 록 그룹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영화 '접속'에서 사용된 'Pale Blue Eyes'라는 노래가 국내에서 뒤늦게 히트치면서 이 그룹이 새삼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그룹의 리더는 루 리드라는 사람이다. 1993년에 열린 밥 딜런의 데뷔 30주년 기념 헌정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던 이 사람도 역시 천재 음악가이다. 그리고 밥 딜런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 음악가이기도 하다.
'돌아보지 마라'를 보면서 다시 그 시대를 돌아보게 되었다. 낡은 전쟁세력에 맞서서 젊은 반전세력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그 뜨거운 시대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의 현실과 미국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왜 이다지도 엉망이란 말인가? 오래 전에 밥 딜런이 노래했듯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대포밥이 되어야 세상에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인가? 우리의 노력은 정녕 쓸모없는 것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명백히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보면서 더욱 더 비감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그 뿌리에서부터 위협하는 반인권법인 국가보안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판결을 다른 곳도 아닌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반인권세력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서다니 이 나라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란 말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이 나라를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시대로 돌려놓으려고 하는가?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에 '돌아보지 마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은 50년대의 메카시즘과 60년대의 베트남전쟁을 일으킨 낡은 질서와 가치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메카시즘은 찰리 채플린과 같은 예술가로 하여금 영원히 미국을 등지게 하였고, 베트남전쟁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영원히 나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았다. 밥 딜런은 런던에서 이렇듯 반인권적인 낡은 질서로부터 떠날 것을 노래로 호소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의 끝은 낡은 질서의 힘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한다. 공연이 끝나고 젊은 밥 딜런은 승용차를 타고 공연장을 떠난다. 뒷자리에 같이 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밥 딜런에게 런던의 신문에서 밥 딜런을 '아나키스트'라고 불렀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밥 딜런은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대꾸를 못하다가 '공산주의자라고 하지는 않냐'고 묻는다. 이어서 런던은 참 이상한 곳이라고 뇌까린다.
전쟁에 반대하고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런던에 온 밥 딜런이었건만 '아나키스트'라는 신문의 평가에 이렇듯 움츠러들고 말았다. 무엇 때문일까? 미국에서 사상의 자유를 거의 질식시켰던 매카시즘의 악령이 젊은 밥 딜런의 무의식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밥 딜런조차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그 몹쓸 악령이 스며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열렬하기로 유명한 미국의 애국주의라는 것도 결국 매카시즘의 악령과 동전의 양면인 것은 아닐까?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이 설파했듯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그것은 헌법 위에 군림하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밥 딜런의 경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너무도 크다. 국가보안법은 일찍이 매카시즘이 그랬듯이 시민을 독재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많은 시민이 오랫동안 싸움을 벌여서 비로소 이 악법 중의 악법을 폐기하고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의 반석 위에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팔을 걷고 나서서 우리에게 뒤를 돌아볼 것을 강요한다. 대체 무엇을 돌아보라는 것인가? 우리에게 인권침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반인권세력의 권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인가? 돌아보았기 때문에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하데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다시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를 떠올린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의 신에게 영원히 빼앗기게 된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우리는 돌이 되고 만다.
밥 딜런은 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작사, 작곡, 편곡에 모두 능한 전방위 음악가이다.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와 함께 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예술가로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다. 팝아트의 개척자로 알려진 워홀은 소비사회의 특징을 포착하는 데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밥 딜런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 그런가?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뛰어난 록 그룹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영화 '접속'에서 사용된 'Pale Blue Eyes'라는 노래가 국내에서 뒤늦게 히트치면서 이 그룹이 새삼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그룹의 리더는 루 리드라는 사람이다. 1993년에 열린 밥 딜런의 데뷔 30주년 기념 헌정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던 이 사람도 역시 천재 음악가이다. 그리고 밥 딜런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 음악가이기도 하다.
'돌아보지 마라'를 보면서 다시 그 시대를 돌아보게 되었다. 낡은 전쟁세력에 맞서서 젊은 반전세력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그 뜨거운 시대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의 현실과 미국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왜 이다지도 엉망이란 말인가? 오래 전에 밥 딜런이 노래했듯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대포밥이 되어야 세상에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인가? 우리의 노력은 정녕 쓸모없는 것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명백히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보면서 더욱 더 비감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그 뿌리에서부터 위협하는 반인권법인 국가보안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판결을 다른 곳도 아닌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반인권세력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서다니 이 나라가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란 말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이 나라를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시대로 돌려놓으려고 하는가?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에 '돌아보지 마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은 50년대의 메카시즘과 60년대의 베트남전쟁을 일으킨 낡은 질서와 가치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메카시즘은 찰리 채플린과 같은 예술가로 하여금 영원히 미국을 등지게 하였고, 베트남전쟁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영원히 나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았다. 밥 딜런은 런던에서 이렇듯 반인권적인 낡은 질서로부터 떠날 것을 노래로 호소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의 끝은 낡은 질서의 힘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한다. 공연이 끝나고 젊은 밥 딜런은 승용차를 타고 공연장을 떠난다. 뒷자리에 같이 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밥 딜런에게 런던의 신문에서 밥 딜런을 '아나키스트'라고 불렀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밥 딜런은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대꾸를 못하다가 '공산주의자라고 하지는 않냐'고 묻는다. 이어서 런던은 참 이상한 곳이라고 뇌까린다.
전쟁에 반대하고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런던에 온 밥 딜런이었건만 '아나키스트'라는 신문의 평가에 이렇듯 움츠러들고 말았다. 무엇 때문일까? 미국에서 사상의 자유를 거의 질식시켰던 매카시즘의 악령이 젊은 밥 딜런의 무의식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밥 딜런조차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그 몹쓸 악령이 스며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열렬하기로 유명한 미국의 애국주의라는 것도 결국 매카시즘의 악령과 동전의 양면인 것은 아닐까?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이 설파했듯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그것은 헌법 위에 군림하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밥 딜런의 경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너무도 크다. 국가보안법은 일찍이 매카시즘이 그랬듯이 시민을 독재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수많은 시민이 오랫동안 싸움을 벌여서 비로소 이 악법 중의 악법을 폐기하고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의 반석 위에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팔을 걷고 나서서 우리에게 뒤를 돌아볼 것을 강요한다. 대체 무엇을 돌아보라는 것인가? 우리에게 인권침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반인권세력의 권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인가? 돌아보았기 때문에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하데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다시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를 떠올린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의 신에게 영원히 빼앗기게 된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우리는 돌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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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되 거기에 머물지 마라
홍성태 교수님의 글 '돌아보지 마라'의 대의에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저는 1992년에 "국가보안법의 논리적 근거결여와 폭력성" 등의 주제 아래 국가보안법 문제를 근원적으로 분석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졸저 '그리움의 횃불'[전예원, 2003], '11. 국가보안법 문제'[571-82쪽] 참조; 이 글은 인터넽 '이경숙의 구름카페'[-> 개인게시판 '새벽']에 올려져 있음).
국보법 문제에 대한 논의를 우리가 21세기가 4년째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조차 한치의 전진도 없이 제자리걸음하며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 한이 없습니다.
홍 교수님의 글 제목은 물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글의 마감부분에서 그 제목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듯 합니다. 과거의 문제를 오늘 우리가 되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만 그 문제점을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돌아보고 거기에 안주해버리는 데 있습니다. 돌아봄은 첫째 사실규명, 둘째 규명된 사실에 대한 평가(가치판단), 셋째 과오의 인정과 시정조치의 단행을 내포하는 미래지향적인 것이라야만 그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지금 한참 정치권에서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과거사 규명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되 거기에 머물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홍 교수님께서 잘 지적하셨듯이 한국의 법규범 바로잡기의 최고 기관인 이른바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까지도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있으니 한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 국가기관의 존재이유가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지나간 과오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비판적 자기성찰의 능력을 결여한 나머지 오늘과 내일에도 같은 과오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입니다. 헌법재판소 등이 과연 언제 잘못된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매우 걱정됩니다. 깨인 국민들이 그들을 잠에서 깨어나도록 충격을 주어야겠습니다. '참여정부'는 그 이름답게 이러한 새로운, 더 바람직한 국가의 재건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격려,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위하는 법
보안법은 인권탄압을 목적으로 제정된 법이 아니고 체제를 달리 하는 분단조국의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보위할 목적으로 제정된 특수한 법이다. 이 법이 일부 반이념단체나 친북활동세력에 인권의 측면에서 남용, 과용된 측면이 없지 않고 또 반정권활동세력의 탄압에 오용된 적도 있으나 이것도 7차에 걸쳐 개정되는 과정에서 많이 해소되었고 문민정부이후 지금까지 그 폐해가 매우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권이 국가와 체제와 시간을 초월하여 가장 우선적이란 것은 분명하지만 절대다수의 인권을 위하여 일부의 인권을 일부 제한하는 것은, 특히 국가안보를 이유로 제한하는 것은, 세계 모든 나라에 있어 공통이다. 말하자면 세계보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끊임없이 인권을 신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보안법과 같은 인권제한적 요소가 있는 법은 갈수록 페지되어야 하지만 정세변화에 맞추어 나라의 안보를 위협함이 없도록 하면서 개정해 나가는 것이 사려깊은 접근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