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窓> 불쌍한 한국의 가로수들, 그리고 우리
칼럼과 기고/홍성태칼럼 :
2006/03/16 09:33
올림픽대교를 건너 동서울 터미널로 들어가는 버스의 창 밖으로 노란 꽃망울을 터트린 산수유가 보이네. 꽃샘이 제법 매섭게 몰아쳐도 봄은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 개나리, 목련, 진달래, 철쭉이 줄줄이 꽃을 피우고 세상은 온통 연두빛 물결로 아름답게 물들리라.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의 가로수들은 봄이 왔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왜 그런가? 바야흐로 잎을 틔우려는 가지들을 모두 잘라내기 때문이다. 시인 김광규가 오래 전에 ‘4월의 가로수’라는 시에서 읊은 참상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 숨막히게 답답하다” 서울은 그나마 조금 낫다. 서울에서는 지난 5-6년 전부터 적어도 줄기를 뭉텅 잘라내는 짓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지방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아예 줄기를 잘라내는 그야말로 무식한 가로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내 일터가 있는 원주시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다.
원주의 상지대 앞에는 제1군수지원사령부가 있다. 그 앞의 ‘북원로’는 영동고속도로 원주출입구에서 원주 시내로 드나드는 중요한 길이다. 제1군수지원사령부는 상당히 큰 군사기지이다. 예전에 그 앞의 보도에는 가로수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5-6년 전쯤에 수십 그루의 큰 나무들을 제1군수지원사령부에서 모두 잘라내는 바람에 대단히 삭막한 길이 되고 말았다. 철조망으로 장식된 낡은 블럭담장에서는 어떤 멋도 찾을 수 없다. 그저 ‘군사도시 원주’의 상식을 확인해 줄 뿐이다. 그런데 2-3년 전에 새롭게 전봇대 공사를 하면서 또 다시 그나마 남아 있던 가로수마저도 마구 가지를 잘리는 수난을 당했다. 그러더니 2-3주 전에는 아예 그 불쌍한 가로수들의 줄기를 모두 잘라내 버렸다. 상지대 주위 도로의 은행나무들도 모두 똑같은 꼴이다. 쉽게 웃자라는 버즘나무 만이 아니라 은행나무마저도 줄기를 모두 잘라내서 괴기한 통나무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상황은 비단 원주 만의 것이 아니다. 지난 2월 목포에서는 살아있는 가로수를 자르고 깍아서 ‘조각’을 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살아있는 가로수를 ‘조각’으로 만든 이 엽기적 '예술혼'은 많은 사람들에게 ‘개들의 지옥’ 못지 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를테면 나무와 장작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가로수 행정을 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이 ‘만행’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목포시는 문제가 된 가로수를 모두 싹뚝 잘라내는 것으로 무마하고자 했다. 가로수라는 생명에 가한 엽기적 만행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일절 없었다. 그 얼마 뒤에 광주에서는 몇 그루의 가로수가 하룻밤 사이에 심각한 훼손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에 신고하고 수사가 시작되었다. 곧 이어 ‘범인’이 경찰에 자수했는데, 그는 가로수가 간판을 가리는 것에 분개한 젊은 태권도장 사범이었다. 그가 태권도장의 이름을 ‘가로수 태권로’로 바꾸고, 제자들과 그 가로수 그늘 아래서 청소도 하고 시범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과연 가로수가 그의 ‘원수’였을까? 오히려 그가 가로수를 잘 가꿨다면, 그의 도장에 대해 사람들이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목포나 광주에서 일어난 일과 같은 것은 사실 우발적이고 국지적인 것에 불과하다. 원칙적으로 가로수를 함부로 자르거나 훼손하면 형사처벌을 당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식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가로수들은 불쌍하다. 왜 그런가? 합법적으로 대대적인 훼손을 늘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명목은 다름아닌 전깃줄 보호. 전깃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전은 이른 봄부터 초겨울까지 가로수를 합법적으로 훼손한다. 가지를 뻗고 잎을 틔워서 자라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가로수들은 대체로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 이 나라의 모든 도시 모든 거리가 서울 태능의 가로수 숲과 같은 울창하고 아름다운 가로수 숲을 이루고 있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한전의 후진적 전깃줄 보호정책 때문이다. 한전은 가로수의 적이요, 이 나라 도시의 적이요, 따라서 우리의 ‘삶의 질’의 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업혁명과 함께 탄생한 근대 도시는 반자연적 공간이었다. 그 결과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가로수다. 형식적으로 보도에 심어 놓고 괴롭히는 것이 가로수가 아니다. 가로수는 도시의 공기를 정화하고 도시 속에서 자연을 느끼게 한다. 가로수는 도시의 가장 중요한 자연이다. 살만한 도시를 만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가로수를 엽기적인 형태의 ‘통나무’로 만드는 잘못된 전깃줄 보호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궁극적인 대책은 모든 전깃줄을 지중화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동안에는 전깃줄과 가로수의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 가지와 줄기를 마구 잘라내지 않아도 전깃줄은 얼마든지 보호할 수 있다. 전깃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소중한 가로수를 마구 잘라내는 정책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가로수는 황폐한 도시에서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는 작은 안전망이다. 개미며 매미며 까치며 참새 등의 생명체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텃밭이기도 하다. 이런 곳을 뭉텅뭉텅 잘라내는 것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심각한 위험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지금의 한전은 이런 짓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전도 이제는 거듭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의 도시를 아름다운 곳은 아니어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한전도 이제 조금은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고압선 개폐기와 볼썽사나우며 보행을 방해하는 분전반과 전봇대-전깃줄을 그대로 방치하는 한, 한전이나 전력노조의 공공성 주장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핵발전이나 송전탑의 문제는 젖혀두더라도 그렇다. 한전은 매년 1조원입네, 2조원입네, 이익이 났다고 자랑한다. 개폐기 폭탄을 방치하고 분전반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로수를 못 살게 해서 그렇게 막대한 이익을 거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런 이익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어느 봄에야 한전이 가로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기업으로, 그렇게 해서 모든 국민의 복리를 위해 존재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될까? 전력노조도 경영진만 욕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로수를 지키고 개폐기 폭탄을 없애는 주체로 우뚝 서야 할텐데. 가로수 숲이 우거진 살만한 도시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이 봄에 여전히 슬프다. 국민 대다수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가로수를 지키는 것은 도시를 지키는 것이고,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지키는 것이건만, 자치체는 또 다른 가로수 훼손의 주범이다. 플라타너스의 시인 김현승이 세상을 떠나고 어느덧 31년이 지났다. 그러나 플라타너스는 오늘 더욱 슬프다. 잘못된 전깃줄 보호정책 때문에, 무자비한 가로수 훼손정책 때문에. 전봇대를 없애고 전깃줄을 묻자. 그것이 ‘선진국’의 길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의 가로수들은 봄이 왔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왜 그런가? 바야흐로 잎을 틔우려는 가지들을 모두 잘라내기 때문이다. 시인 김광규가 오래 전에 ‘4월의 가로수’라는 시에서 읊은 참상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 숨막히게 답답하다” 서울은 그나마 조금 낫다. 서울에서는 지난 5-6년 전부터 적어도 줄기를 뭉텅 잘라내는 짓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지방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아예 줄기를 잘라내는 그야말로 무식한 가로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내 일터가 있는 원주시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다.
원주의 상지대 앞에는 제1군수지원사령부가 있다. 그 앞의 ‘북원로’는 영동고속도로 원주출입구에서 원주 시내로 드나드는 중요한 길이다. 제1군수지원사령부는 상당히 큰 군사기지이다. 예전에 그 앞의 보도에는 가로수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5-6년 전쯤에 수십 그루의 큰 나무들을 제1군수지원사령부에서 모두 잘라내는 바람에 대단히 삭막한 길이 되고 말았다. 철조망으로 장식된 낡은 블럭담장에서는 어떤 멋도 찾을 수 없다. 그저 ‘군사도시 원주’의 상식을 확인해 줄 뿐이다. 그런데 2-3년 전에 새롭게 전봇대 공사를 하면서 또 다시 그나마 남아 있던 가로수마저도 마구 가지를 잘리는 수난을 당했다. 그러더니 2-3주 전에는 아예 그 불쌍한 가로수들의 줄기를 모두 잘라내 버렸다. 상지대 주위 도로의 은행나무들도 모두 똑같은 꼴이다. 쉽게 웃자라는 버즘나무 만이 아니라 은행나무마저도 줄기를 모두 잘라내서 괴기한 통나무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상황은 비단 원주 만의 것이 아니다. 지난 2월 목포에서는 살아있는 가로수를 자르고 깍아서 ‘조각’을 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살아있는 가로수를 ‘조각’으로 만든 이 엽기적 '예술혼'은 많은 사람들에게 ‘개들의 지옥’ 못지 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를테면 나무와 장작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가로수 행정을 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이 ‘만행’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목포시는 문제가 된 가로수를 모두 싹뚝 잘라내는 것으로 무마하고자 했다. 가로수라는 생명에 가한 엽기적 만행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일절 없었다. 그 얼마 뒤에 광주에서는 몇 그루의 가로수가 하룻밤 사이에 심각한 훼손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에 신고하고 수사가 시작되었다. 곧 이어 ‘범인’이 경찰에 자수했는데, 그는 가로수가 간판을 가리는 것에 분개한 젊은 태권도장 사범이었다. 그가 태권도장의 이름을 ‘가로수 태권로’로 바꾸고, 제자들과 그 가로수 그늘 아래서 청소도 하고 시범도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과연 가로수가 그의 ‘원수’였을까? 오히려 그가 가로수를 잘 가꿨다면, 그의 도장에 대해 사람들이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목포나 광주에서 일어난 일과 같은 것은 사실 우발적이고 국지적인 것에 불과하다. 원칙적으로 가로수를 함부로 자르거나 훼손하면 형사처벌을 당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식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가로수들은 불쌍하다. 왜 그런가? 합법적으로 대대적인 훼손을 늘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명목은 다름아닌 전깃줄 보호. 전깃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전은 이른 봄부터 초겨울까지 가로수를 합법적으로 훼손한다. 가지를 뻗고 잎을 틔워서 자라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가로수들은 대체로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 이 나라의 모든 도시 모든 거리가 서울 태능의 가로수 숲과 같은 울창하고 아름다운 가로수 숲을 이루고 있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한전의 후진적 전깃줄 보호정책 때문이다. 한전은 가로수의 적이요, 이 나라 도시의 적이요, 따라서 우리의 ‘삶의 질’의 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업혁명과 함께 탄생한 근대 도시는 반자연적 공간이었다. 그 결과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가로수다. 형식적으로 보도에 심어 놓고 괴롭히는 것이 가로수가 아니다. 가로수는 도시의 공기를 정화하고 도시 속에서 자연을 느끼게 한다. 가로수는 도시의 가장 중요한 자연이다. 살만한 도시를 만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가로수를 엽기적인 형태의 ‘통나무’로 만드는 잘못된 전깃줄 보호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궁극적인 대책은 모든 전깃줄을 지중화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동안에는 전깃줄과 가로수의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 가지와 줄기를 마구 잘라내지 않아도 전깃줄은 얼마든지 보호할 수 있다. 전깃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소중한 가로수를 마구 잘라내는 정책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가로수는 황폐한 도시에서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는 작은 안전망이다. 개미며 매미며 까치며 참새 등의 생명체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텃밭이기도 하다. 이런 곳을 뭉텅뭉텅 잘라내는 것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심각한 위험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지금의 한전은 이런 짓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전도 이제는 거듭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의 도시를 아름다운 곳은 아니어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한전도 이제 조금은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고압선 개폐기와 볼썽사나우며 보행을 방해하는 분전반과 전봇대-전깃줄을 그대로 방치하는 한, 한전이나 전력노조의 공공성 주장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핵발전이나 송전탑의 문제는 젖혀두더라도 그렇다. 한전은 매년 1조원입네, 2조원입네, 이익이 났다고 자랑한다. 개폐기 폭탄을 방치하고 분전반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로수를 못 살게 해서 그렇게 막대한 이익을 거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런 이익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어느 봄에야 한전이 가로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기업으로, 그렇게 해서 모든 국민의 복리를 위해 존재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될까? 전력노조도 경영진만 욕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로수를 지키고 개폐기 폭탄을 없애는 주체로 우뚝 서야 할텐데. 가로수 숲이 우거진 살만한 도시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이 봄에 여전히 슬프다. 국민 대다수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가로수를 지키는 것은 도시를 지키는 것이고,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지키는 것이건만, 자치체는 또 다른 가로수 훼손의 주범이다. 플라타너스의 시인 김현승이 세상을 떠나고 어느덧 31년이 지났다. 그러나 플라타너스는 오늘 더욱 슬프다. 잘못된 전깃줄 보호정책 때문에, 무자비한 가로수 훼손정책 때문에. 전봇대를 없애고 전깃줄을 묻자. 그것이 ‘선진국’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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