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수십년만에 찾아온 지루한 봄 가뭄이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이 많은 우리 농민들의 가슴을 바짝바짝 타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하는 매우 어려운 시기입니다. 개혁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는데다 순항하던 남북관계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했던 가뭄까지 겹치니 시름도 더욱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어려운 조건에서 국정을 운영하시면서 밤낮으로 노심초사하실 대통령님의 모습이 눈에 선명합니다. 모쪼록 국민 모두가 원하는 장대비가 빨리 내려서 우리 모두의 근심을 덜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오늘은 정치개혁 중에서도 정당개혁에 대해 대통령께 간곡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평생을 정당인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통령님만큼 정당에 대해서 잘 알고 많이 생각하시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를 빌어 정당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정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정당이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개혁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 근대적 의미에서의 '대중정당'(mass party)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고 있는지, 있다면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대중정당으로서의 시민사회적 기초, 조직운영의 원리, 정당의 이념적 기초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긍정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당운영, 정치자금, 정책결정, 공천과정, 선거 및 국회운영 등 어느 것 하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실정입니다. 국민들이 정당을 극도로 불신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정치인에게는 딸을 주지 않는다"는 세간의 속설이나 정당인에 대한 직업선호도가 가장 낮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당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정당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달리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정당은 정부수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극히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권력을 창출하는 정당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사후적으로 피조된 정당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과거의 모든 집권여당은 독재권력에 의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야당의 경우에도 국민을 위한 공당이나 정치적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공조직이기보다는 정치지도자나 일부 정치인들을 위한 사조직처럼 기능했습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과거 대통령께서 몸담고 계셨던 여러 정당이나 지금의 민주당 역시 이름과는 달리 결코 민주적인 정당이라 할 수 없습니다. 권력에 의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정치지도자에 의해 급조된 정당, 권력과 지도자에 의해 움직이는 비민주적인 운영방식, 빈번한 이합집산, 선거 및 국회운영에서 나타나는 정당의 행태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 결과 우리 정당은 분단구조 하에서 경직된 이념체계로 구성된 보수정당, 정책대결은 말뿐이고 혈연과 지역주의 등 연고주의에 의존해서 연명하는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지역정당, 국민과 당원의 지지나 참여 없이 소수 당권파나 기득권층에 의해 운영되는 과두정당, 지도자 일인에 의한 정당의 사당화의 결과로 나타난 보스정당, 당내민주주의의 실종, 정당간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정치인의 무원칙한 당적이동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당에 국민이 참여하고 공정하게 경쟁하고, 정책대결을 전개하고, 그 결과로서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들은 이런 정당을 부정하고 싶지만 정당이 권력과 정치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통령님은 50년 이상을 정치권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우리 정치의 무엇이 문제인지, 특히 정당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알고 계신다고는 하더라도 현실정치적인 여건 때문에 어쩌지 못한 문제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겨운 정치역정을 거쳐 이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대통령으로, 나라의 지도자로 계신 이 시점에서 정당개혁의 물꼬를 터주십사 하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야당총재나 대통령으로서 기억될 뿐 아니라 우리 정당정치에서 근대정당의 기초를 형성하신 분으로, 또한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던 정당을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정당으로 탈바꿈하도록 애쓰신 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당이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두 가지로 줄여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드릴 말씀은 정당의 의사결정과정이 당헌과 당규에 따라 투명하게 운영되고 제도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제도화의 방식은 정당에서 판단하면 될 일이지만, 먼저 여당인 민주당의 경우 대통령님께서 민주당의 자율결정이 가능하도록 충분히 위임하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후에 공통적인 조치사항으로서, 정당구조 안에서 총재의 독단적 결정의 소지를 축소하는 것만으로도 정당의 운영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두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당비와 지구당 역할과 공천문제를 전향적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서구 등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우리 정치에서 지구당은 서자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지구당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정당이 강화될 수 없고 국민의 정치참여도 확대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당이 부실하니 국민들이 당원으로 참여하지 않고, 당비를 납부하지 않는 것이며, 그런 지구당이기에 공천권을 부여하지도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당비, 지구당 강화, 공천권이라는 세 가지 문제는 동시에 풀어야 할 과제로 되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지구당이 부실하니 공천권을 줄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비를 납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일정한 수준의 당비를 납부하는 지구당과 그 당원들에게 공천권을 부여하기로 한다면 양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공천권도 없는 들러리 지구당에 누가 참여하며 왜 당비를 납부하겠습니까? 당비납부도 없고 공천권도 없는 지구당이 무슨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수준이니 몇 안되는 향우회 조직이나 지구당위원장의 사적조직이 지구당 운영을 독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구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문제의 근원과 근본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구당의 부실화는 정당운영의 원리를 지키지 않은데서 나타난 파생물일 뿐이라고 봅니다.

과거 독재정권 당시에는 독재정권은 독재정권대로 정당운영을 민주화할 생각이 없었고, 이에 맞서 싸우는 야당은 야당대로 그럴 만한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시절도 아니고 국민들의 요구도 높은 만큼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말씀드렸습니다만, 말씀의 요지는 중앙당 운영으로 대표되는 정당운영을 민주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원의 당비납부와 공천권을 묶어 지구당을 강화하고 국민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도록 한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권자의 참여를 확대하고 정당운영을 활성화하는 방법으로서 지구당 활성화가 시급하다는 점을 재삼 강조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당원의 당비납부 및 지구당의 공천권 행사라는 요건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내 민주화, 공천권, 당비 등 앞에서 드린 말씀은 그간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인 만큼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구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시행하고 있는 전통적인 제도들입니다.

그러한 당연한 원리들이 아직까지도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여기에 정치불신, 정당불신의 근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님의 결단이 역사적으로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며, 어렵지 않게 성공할 것이며, 그로 인해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내상황이나 남북관계 모두가 쉽지만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대통령께 부담을 추가하는 것이 아닌지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의 임기나 내년에 있을 두 차례의 선거 등을 감안할 때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다는 생각에서, 게다가 정치문제가 다른 문제를 풀어나가는 출발점이라는 생각에서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현명하게 판단하셔서 6·15남북공동선언을 끌어내신 것처럼 정말로 역사적인 결단을 내려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개혁과 인권과 통일은 대통령님의 커다란 상징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임기 내내 변함없이 추진되고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또한 대통령님의 건강과 평안을 빌면서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정대화(상지대 교수·정치학)
2001/06/14 00:00 2001/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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