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지난 98년 2월 25일에 있었던 대통령님의 취임식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찌해서 이렇게 됐는지 냉정하게 돌이켜봐야 합니다”라는 취임사 대목에서 대통령께서는 한동안 목이 메여 말씀을 못하셨습니다.

그 순간, '하느님이 대통령께 어려운 시기에 나라를 구하라는 사명을 주시려고 71년부터 그렇게 많은 역경을 겪게 하셨구나'라는 생각에 가슴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대통령님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정말로 전국민적 경사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이를 축하하기는 커녕 냉소적인 반응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제가 느꼈던 것과 같은 감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당시 국민들이 느낀 감격은 자연스럽게 대통령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대통령께서도 국민들이 큰 기대를 가질 만한 청사진을 많이 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모습은 국민들의 기대감을 실망감으로 바꾸기에 충분할 만큼 어렵습니다. 이러한 국민들의 실망감이 대통령님의 노벨평화상 수상마저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게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평한 과세를 통해 경제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겠습니다.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를 통한 부의 부당한 대물림이 없도록 세제를 고치겠습니다. 음성 탈루 소득에 대해서는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는 지난 9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보름후인 9월 2일, 안정남 국세청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재벌에 대하여 주식이동조사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누가 보아도 현 정부의 조세정의 구현 의지를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아무런 성과도 없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를 통한 부의 부당한 대물림] 하면 떠오르는 건 삼성 이건희 회장 일가입니다. 학생신분인 30대 초반의 청년이 수조 원의 재산을 물려받으면서도 단돈 16억 원의 세금만 냈기 때문입니다.

87년 이건희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을 물려받으면서 176억 원의 세금을 냈습니다. 그때도 여기저기서 탈세의혹이 제기되어 삼성은 곤혹을 치른 바 있습니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지금 이재용 씨는 단돈 16억 원으로 삼성그룹을 통째로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분노하는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안에 대하여 국세청은 그동안 법과 제도가 미비하여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여연대가 이건희 회장 일가가 저지른 수많은 변칙증여 중 단 한건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여 지난 4월 26일 국세청에 탈세제보를 하였습니다.

99년 2월 26일, 삼성SDS는 삼성SDS 주식을 주당 7,150원에 인수할 수 있는 신주인수권부사채 320여만 주를 이재용 씨등에게 매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삼성SDS 주식은 장외시장에서 55,000원 - 58,500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즉, 남들은 5만 원대에 사는 주식을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만 단돈 7,150원에 살 수 있는 특혜를 준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재용씨등은 당시 기준으로 1,600억 원 이상의 부당이득을 챙겼고, 이에 대하여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써 약700억 원의 증여세를 포탈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안에 있어서는 당시 거래가격만 입증되면 과세해야 함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참여연대는 당시 삼성SDS 주식이 장외시장에서 58,500원 정도에 거래된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서류 4가지를 제출하며 탈세제보를 하였고, 국세청은 7개월 반이 지난 지금까지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삼척동자가 보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대통령께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국세청장을 불러 어찌된 일인지 물어봐 주십시오. 이에 국세청장은 대략 3가지로 변명을 할 것입니다.

첫째, 아직 주식이동조사가 끝나지 않아 과세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안은 주식이동조사와는 무관한 사안이 아니냐고 질문해 주십시요. 대통령님, 이 사건은 사건 발생 전후로 이재용씨가 삼성의 주식을 얼마에 사고 얼마에 팔았는지 전혀 몰라도 과세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둘째, 국세청이 과세하면 삼성에서 소송을 걸 것이 분명하므로 신중히 처리할 수 밖에 없다고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 이 사건의 핵심은 사건 발생 당시 삼성SDS 주식의 거래가격이 존재하느냐 여부에 있습니다.

그런데, 참여연대가 제기한 신주인수권행사금지가처분신청에서 참여연대에 승소판결을 내린 서울고등법원은 물론이고, 삼성의 손을 들어준 서울지방법원조차도 당시 삼성SDS 주식이 5만 원대에 거래된 사실 자체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이 소송을 건다고 하더라도 국세청이 이길 확률은 거의 99%입니다.

셋째, 이 사건은 성격상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그러면, 99년의 한진그룹탈세사건과 같이 복잡한 사건도 4개월 반만에 처리했는데, 이렇게 간단한 사건을 왜 7개월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물어봐 주십시오. 대통령님, 한진그룹탈세사건은 이 사건에 비하면 수백 배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과세처분에 필요한 모든 증거서류를 다 제출하여 사실상 밥상까지 차려준 상태입니다. 국세청장이 뭐라고 해도 7개월 이상 시간을 끌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대통령님의 이러한 질문에 국세청장이 설득력있는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그를 그냥 두어선 안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세청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졌습니다. 대통령님의 재벌개혁의지와 조세정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현 국세청장을 경질하시고, 이 사건을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하셔야 국세청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국세청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현상황은 납세거부운동을 벌이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주장을 접할 때 마다 저는 섬뜻합니다. 조선말의 삼정문란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삼정문란이라 함은 백성들의 조세저항으로 인한 세제세정의 문란이 아닙니까? 대통령님, 조세저항 직전까지 간 민심을 헤아려 주십시오.

국민들은 김영삼 정권을 무능하고 비도덕적인 정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4억 원을 탈세했다는 이유로 당시 대통령의 아들을 형사처벌까지 시킨 정권인데도 말입니다. 만약, 재벌총수 아들이 수백억 원을 탈세한 사건을 유야무야 넘긴다면, 국민들은 현정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김영삼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대통령님, 국민들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느낀 대통령님에 대한 감격과 존경심을 다시 한번 갖고 싶어합니다. 부디, 이 나라에 법과 원칙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래야, 국민들은 이 나라에서 살아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장 윤종훈
2000/12/14 00:00 2000/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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