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옛 어른들의 식견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요즘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올겨울 내내 꽁꽁 얼어 있던 저희 집 앞 길이 어느날 녹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입춘(立春)'을 지나면서 말입니다. 시간에 순응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읽을 수 있었던 옛 어른들의 지혜와 식견이 새삼 존경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상식적인 '때의 흐름'에 대해선 오히려 무감각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때가 되면 해야 되고, 때가 되면 변해야 하는 것인 인간과 자연의 이치라면 그것에 순응하고 읽어내는 지혜와 식견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1월 31일, 국세청이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계획을 발표한 직후 그동안 언론개혁운동을 벌여 오던 많은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환영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저희 참여연대도 발표 다음날인 2월 1일, '비록 늦었지만 일단 환영한다'는 논평을 내었습니다.

대통령님의 연두기자회견에서 언론개혁이 언급되었다는 점, 국세청장이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유보하겠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에 세무조사계획이 발표되었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일부 언론사들과 야당은 정치적 목적의 세무조사가 아니냐는 의혹과 비난을 쏟아내었지만 많은 시민단체들은 분명 이번 발표를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상황에 대해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시민단체들과 국민들이 언론사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환영하고 찬성했습니다. 물론 언론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여전히 국세청과 세무조사가 '공정할 것이다'라는 믿음과 '공정해야 한다'는 기대가 작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국세청에 대한 그런 신뢰가 없다면 어느 누가 감히 개혁을 위해 '세무조사를 촉구'할 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국세청이 이런 국민의 믿음과 기대를 받을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선 저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일부 언론사들의 반발이나 야당의 문제제기가 그저 '코웃음'의 대상이 될 수만은 없는 이유를 그동안 국세청 스스로가 제공해왔기 때문입니다.

국세청장은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해서 '어떤 외압도 없이 오직 법률에 근거하여 진행될 것'이며 '성역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전산자료검토 결과 '탈루혐의가 일부 포착'되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세무조사를 실시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400여명의 조사인력이 2개월 동안 투입되는 이 대규모 세무조사가 과연 어떻게 끝날 지 저는 솔직히 의심과 걱정이 더욱 큽니다. 왜냐하면 이미 저희는 국세청의 '우유부단함'과 '원칙없음'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4월 26일 참여연대가 삼성 이재용씨 등이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싯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구입함으로써 700억원 이상의 증여세를 탈세하였다는 사실을 국세청에 제보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벌써 9개월 이상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국세청이 저희에게 보내온 공식적인 답변은 늘 '조사가 진행중이니 기다려달라', '주식이동조사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니 기다려달라',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믿고 기다려달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1999년 한진그룹 전체에 대한 세무조사가 불과 몇 개월에 끝났습니다만, 이미 사실관계가 다 드러난 삼성 3세에 대한 변칙증여문제를 9개월 이상 끌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믿고,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인지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조사계획을 보면 400명의 인력을 두달 동안 투입하여 정기법인세 조사를 진행하면서 사주의 변칙적 상속/증여문제, 주식이동조사까지 다 검토한다고 합니다. 저희가 제보한 삼성일가의 변칙증여문제에 대해서 국세청은 늘 '정기 법인세 조사와 주식이동조사'를 언급하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반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가 재벌에 대한 세무조사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까? 재벌 2, 3세의 변칙적인 증여와 상속문제보다 언론사의 탈세가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까?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번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가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진행될 것이고, 또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는 재벌 변칙증여문제에 대한 국세청의 태도와 직결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선 국세청이 이 엄청난 규모의 세무조사를 통해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한 국민적 반발과 저항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렇게 거창하게 선전하고 서울지방국세청의 조사인력 절반을 투입해서 '생색'만 내는데 그친다면 그것이 결국 일부 언론과 야당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언론길들이기용 엄포'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언론이 개혁되길 원하고 이를 위해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기대한 국민들이 느낄 배신감과 실망감은 상상 이상으로 클 것입니다.

거꾸로 국세청이 정말 '전력을 다해' 조사를 진행하고 엄정한 집행을 해서 언론사들에 대한 철저한 과세와 고발조치가 이어진다면 당연히 이런 얘기가 나올 것입니다. "재벌의 변칙증여는 눈감아 주고, 언론만 건드리는 것을 보면 이는 결국 '언론길들이기'를 위한 정치적 세무조사이다." 세무조사와 탈세엔 성역이 없다고 국세청이 아무리 반복하더라도 누가봐도 뻔한 재벌의 변칙증여를 눈감아주고 있는 국세청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해당 언론사들은 가만히 있겠습니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이전투구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의 조세정의는 말할 것도 없고, 징세 자체의 정당성이 여지없이 허물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국세청에게 남은 선택지란 '정면돌파'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세무조사와 탈세에 대해선 재벌이건, 언론사건 절대로 '성역'이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온갖 의혹과 불신을 해소할 수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재벌3세의 탈세문제에 대해선 9개월 이상 끌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언론사에 대해선 2개월만에 속전속결로 탈세사실을 적발하고 추징·고발까지 한다는 것은 결코 국민적 신뢰를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님.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습니다. 7년이나 세무조사를 받지 않았던 언론사들이 세무조사를 받는 것도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9개월 이상 끌어온 삼성 이재용씨등의 탈세문제도 이제는 매듭을 지어야할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혹시 국세청 앞에서 지난 두달 동안 계속된 '1인 시위'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영하 18도를 넘는 혹한 속에서 '조세정의'를 촉구하며 침묵으로 절규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1인 시위'에 참가하겠다는 시민들의 신청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누구나 공평하게 세금을 내고, 탈세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처벌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단지 재벌의 3세라는 이유만으로, 언론사라는 이유만으로 탈세가 묵인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시민들의 '고요한 외침'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대통령께서는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2001년 2월 8일
참여연대 조세개혁팀 간사 홍일표
2001/02/08 00:00 2001/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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