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날이 추워지면서 사람들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느끼는 이 추위는 단지 계절 탓만은 아닌 듯 싶습니다. 삶이 고달픈 사람들에겐 당장의 먹고 살 거리도 걱정입니다만, '내일이 없다'는 절망감은 더 큰 근심을 품게 합니다. 희망과 행복이 약속되는 내일이 있는 한, 비록 오늘 한 끼쯤의 궁기(窮氣)와 얇은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냉기쯤이야 사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늦가을의 별 것도 아닌 이 한기가 유별나게 느껴지는 것은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마도 당연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올해 역시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공도 있고 과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수십여 년간 쌓여온 적폐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부가 '명실상부한 국민의 정부'로서, 개혁으로써 나라의 새로운 장래를 보여줄 것이라는 믿음은 안타깝게도 점점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OECD에 가입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회문제인 부정부패·비리가 온 나라를 좀먹고 있는 상황에서 부패방지법을 제정하겠다는 약속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부패방지법은 사정기관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키 위해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신설하고 '특검제'를 상설화하는 것이 그 핵심임에도, 이를 비켜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부패문제는 사실 그 자체로서도 큰 문제이지만, 부정부패·비리를 엄단해야 할 지위에 있는 사정기관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데서 더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인권기구도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기구로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토록 오랜 동안 광범위하게 제기되어 왔습니다만, 결국 그 전망 역시 점점 어둡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노구를 이끌고 분단의 장벽을 넘는 결단 끝에 남북이 정상회담을 하고, 한반도에서 새로운 평화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마당인데도 냉전시대의 악법 중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폐지되기는커녕 여전히 시퍼런 칼날을 치켜세운 채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저희들은 대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난장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정치판은 가뜩이나 마뜩찮아 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짜증과 염증을 마구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들만큼이나 대통령께서도 답답하고 안타까와하실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대통령님, 정치개혁이야 어차피 여야가 있는 만큼 결국은 정치권이 해결해야 할 것이라 치더라도, 대통령께서 당장 시급하게, 그리고 반드시 하셔야 할 일들이 있음을 직언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사정기관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하는 부패방지법의 제정, 국가기구로서의 인권기구설치, 국가보안법의 폐·개정작업이 바로 그것입니다. 최근 일련의 부정부패, 비리사건을 겪으면서 마침 정부에서도 고강도 사정을 펼친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악행과 폐습들을 엄벌하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만, 그 근원을 뿌리뽑을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저희는 "국민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는 정치인이 되겠다"라는 과거 어느 땐가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을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하신 말씀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록 만시지탄이긴 합니다만, 이제부터라도 진정 개혁으로 나라의 앞날을 헤쳐나가려는 용단을 내리신다면 국민이 지지하고 성원할 것입니다.

부디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시고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2000/11/24 00:00 2000/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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