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제개혁위원회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만, 그 2탄입니다
대통령님,

내년 1월로 예정되었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국민연금 직장가입자 전환이 상당기간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11월 13일 규제개혁위원회에서 보건복지부가 8월에 입법예고하였던 국민연금법 및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법안 상정을 보류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보건복지부의 입법예고안은 내년부터 직장가입자로서 국민연금에 가입하는 근로자의 범위를 현행 '3개월 이상 고용자'에서 '1개월 이상 고용자'로 확대하고 '월 80시간 이상 근로자'를 추가하며 2002년 7월부터는 국민연금 가입 대상 사업장을 5인 이상 사업장에서 1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하는 것을 주요골자로 하는 개정안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개정안은 참여연대를 비롯한 노동·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 그 취지에 대해 환영을 받았던 입법안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규제개혁위원회는 현재의 어려운 경제여건과 기업의 보험료 부담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시행시기를 현 시점에서 정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단 올해는 법안 상정을 보류하고 시행시기를 재검토하여 내년 상반기 중 다시 심의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님, 저는 이러한 규제개혁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비감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이 나라는 어려운 경제여건에서나, 그렇지 않은 경제여건에서나 간에 항상 '기업의 부담'이 제일 먼저 고려되는 반면, 그 기업을 살리기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계속 무시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 및 임시 일용직, 시간제 노동자들은 열악한 근로조건과 불안정한 고용상태를 감수하면서도 국민연금에서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보험료 전액을 본인이 부담하여 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연금가입의 기피현상이 심각함에 따라 정작 사회적 차원의 노후대책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이 연금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결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근로조건은 5인 이상 사업장의 정규직에 비해서 상대적 저임금일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보험의 혜택마저 받지 못해 근로자간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 및 영세사업장의 근로자들을 국민연금뿐 아니라 건강보험에서도 직장가입으로 전환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정책 과제입니다.

대통령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다시피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섰고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고용불안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현재 다시 불어닥친 구조조정의 태풍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실업자들이 거리로 내몰릴 지가 불투명하며 이러한 고용불안의 여건 속에서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더욱 악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기업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마땅히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하는 근로자들에 대해서도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편법, 탈법 행태들이 더욱 만연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때에 위와 같은 규제개혁위원회의 결정은 사회적 필요와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결정입니다. 규제개혁위원회는 국민연금의 직장가입 대상자를 확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이해 없이, 이제까지 부담하지 않고 넘겨 온 보험료에 대한 '기업의 부담'만을 걱정하며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에 틀림없습니다.

지난 6월 8일자 개혁통신의 지면을 통해 드렸던 쓴소리 "규제개혁위원회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만"을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규제개혁위원회에서 올해 말까지 민간의료보험 도입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계획을 보고하도록 보건복지부에 권고하는 결의를 한 바 있습니다.

저희는 규제개혁위원회의 무지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라고 권고하는 당사자로서 정작 민간의료보험의 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도입 권고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위원회 구성에 전문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며 대표성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총 18명의 위원 중 경제 및 경영 관련 인사가 6명인데 비해 노동자나 농민 또는 시민사회단체 대표는 거의 없습니다. 위원회 구성이 이와 같다 보니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서 '기업의 이익 또는 부담'을 중심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다수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복지와 혜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기가 힘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과연 위원회의 이와 같은 구성으로 국민연금의 직장가입 대상자 확대적용을 승인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 보입니다. 어느 때라고 '기업의 부담'이 걱정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님, 저는 이번 결정을 접하며 규제개혁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규제개혁위원회는 국가경쟁력 약화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던 각종 규제를 획기적으로 줄여나가기 위해서 독립적·객관적 위상을 가지면서도 민간부문의 참여가 보장되는 기구로서 설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쟁을 제한하거나 반(反)시장경제적인 정부규제를 과감히 철폐하여 경쟁이 촉진되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기업환경을 조성해 나가기 위한 목적이라고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국민연금 직장가입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기업환경에 반하는 정책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이러한 정책이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규제에 해당하는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대통령님의 생산적 복지가 '기업의 부담'을 중심에 두고 접근하는 규제개혁위원회의 입장으로 인해 제한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공정하고 자유로운 기업환경 조성과는 별도인 사안에 대해서 규제개혁위원회가 정책적인 전문성도 부재한 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이 나라의 경쟁력 강화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래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규제개혁위원회의 결정은 참으로 오만하게만 느껴집니다. 더 이상 규제개혁위원회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만이 우리 나라의 복지 발전을 저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통령님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이은아
2000/11/24 00:00 2000/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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