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낙엽 밟히는 소리에 낭만을 실어 걷기조차 두려운 요즘입니다. 퇴출 기업 명단 속에 묻혀있는 수많은 개인과 가족들의 상처와 분노가 낙엽마냥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밥그릇을 날리는 일이 재채기하는 생리현상처럼 반복되는 걸 바라보자면 '생존권'이란 단어가 창백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집니다. 이제 '고통분담' 하잔 뻔한 구호도 생략한 채 달리는 구조조정 열차는 차디찬 터널로 직행하려 합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그 가족의 생존권이 다른 사안에 비해 그렇게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닐텐데요. 이 일에서 유독 발휘하시는 그 '과감성과 단호함(?)'의 용도를 변경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생존권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수많은 국민들이 당신이 표방한 '인권대통령'을 조롱하고 원망할 때 모면할 만한 보따리는 준비 하셨나요? 제가 보기에는 수많은 국민들의 원성이 자자한 기업 퇴출을 감행하시는 일보다 훨씬 쉬워 보이는 일이 있습니다. 우익을 자처하며 망언을 일삼는 소수 정치꾼들을 외면하신다면 국내외 인권단체와 민주세력들의 열화같은 지지 속에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언제까지 주저하시렵니까?

당신께서 천명하신 "국민 개개인의 인권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을 국민의 정부"하에서 며칠 후면 국가보안법이 또 한 살을 먹게 됩니다. 52살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나이의 수 십, 수 백, 수 천 배가 되는 숫자의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감옥에 처넣어 왔습니다. 대통령께서 경사를 치르실 때마다 항시 들먹여지는 이름인지라 껄끄러워 하신다는 걸 잘 압니다. 대통령 당선자가 되어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도 노벨 평화상을 받아도 늘 따가운 시선이 존재합니다. 대통령께서 그 경사스런 자리에 늘 국가보안법을 동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반세기 이상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적용되는 동안 우리는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북'의 존재 때문에 명줄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북'의 존재는 국가보안법을 애용하는 세력들조차 더 이상 들먹이기 어려워합니다. 국가보안법은 주로 노동자나 농민 등 기층 민중과 그들을 위해 활동하려 했던 민주세력 또는 진보세력을 겨냥한 칼날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의 상실과 '이근안식' 고문 등 인권 유린을 겪었다는 사실도 부인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합리적인 비판 세력의 존재와 대안의 제시가 가로막혔고 결국 우리가 잃은 것은 인간다운 생존을 추구하기 위한 발판입니다. 그래서 소수 기득권층은 국보법에 한결같은 애정을 보내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공안기관과 그에 기생한 세력들의 부패와 활보를 허락해온 국가보안법이야말로 진정한 안보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이러한 국가보안법의 본질로나 대내외적 상황으로나 국가보안법에 대한 손질은 더 이상 어떤 핑계로도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헛손질'입니다. 더 이상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묶어둘 수 없는 현실이 충분히 반영되겠지만, '내부의 비판세력'을 처벌할 수단은 계속 남겨두겠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7조 3항(이적단체 구성·가입)이 바로 내부의 비판세력을 겨냥한 조항이란 건 실제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95%이상이 7조에 걸려들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7조 가운데서도 3항에 의한 구속자가 75%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7조를 남겨두고 국가보안법을 개정했다는 주장을 하실 생각은 애초에 버리셔야 합니다. 또한 여당 내에서 그런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줄 알면서 모른 체 하시는 것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또다시 색깔론이 들썩거린다구요. 시대를 거스른 촌극으로 만들어 버리십시오. 이를 위해선 정면돌파가 필요합니다. 우리 국민의 의식의 심층에까지 내려가 억압하고 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통제장치를 과감히 제거하십시오. 국가보안법을 껴안고 뒹구는 수구세력들의 미련을 잘라 버리십시오.

대통령께서 그 누구보다도 국보법의 무덤을 팔 수 있는 적임자라는 대내외적 믿음에 책임을 지십시오. 평화적 정권교체, 국내외적으로 천명한 인권대통령의 모토와 이미지,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호조건을 가진 위정자도 사망선고를 내리지 못한 법에 대해 이후 어떤 위정자가 감히 손을 댈 수 있을까요? 대통령께서 지금 국가보안법에 '헛손질'을 하신다면 그건 악법에 더 강한 내성을 실어 부활하게 할 것입니다. 그건 역사에 씻지 못할 오명이요 죄가 될 것입니다.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류은숙
2000/11/16 00:00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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