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0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4,500명의 목사앞에서 과거 자신의 섹스스캔들을 반성하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이 진정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는지, 민주당의 고어 대통령후보를 위한 정치적 쇼였는지는 클린턴 자신만이 알 것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과거의 섹스스캔들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점입니다. 반면, 한때 클린턴 대통령의 숙적이자 공화당의 강력한 대통령후보였던 깅그리치 전하원의장은 그 즈음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푸대접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깅그리치 씨는 93년부터 2년동안 조지아주 케니소 주립대학에 '미국문명부활'이라는 자신의 강좌를 개설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강좌개설에 공화당 정치행동위원회의 자금을 썼으며 그 과정에서 탈세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미하원 윤리소위원회는 95년 12월 부터 1년동안 당시 깅그리치 하원의장의 탈세혐의를 조사한 결과, 그의 탈세사실을 확인하고는 징계권고안을 찬성7, 반대1로 통과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부패한 정치인으로 낙인 찍혔고, 그가 이끄는 공화당은 98년 11월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참패를 하게 됩니다.

중간선거가 열리던 98년 11월은 클린턴이 한창 섹스스캔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인데도 미국 국민은 탈세한 깅그리치를 버리고 클린턴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중간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으로 깅그리치는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으며, 클린턴은 기사회생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미국이 강대국일 수 있는 이유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납세의무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하여 국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따라서 악의적인 탈세범은 국가체제를 파괴하는 파렴치범으로 취급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때문에, 미국 국민은 사생활이 문란한 공직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탈세전과가 있는 공직자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 국민의 엄격한 납세의식은 적어도 세금에 관해서는 윗물이든 아랫물이든 깨끗한 물을 만들었고, 이는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근원이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거 역사를 볼 때도, 강대국은 공통적으로 세제세정이 잘 정비되었고, 패망한 국가는 세제세정의 문란과 백성의 조세저항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우리나라에서는 탈세는 범죄가 아니라 무슨 특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소위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일수록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겠다는 것은 한낮 꿈에 불과합니다.

"변칙적인 상속과 증여를 통한 부의 부당한 대물림이 없도록 세제를 고치겠습니다. 음성탈루소득에 대하여는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지난 9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조세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강한의지의 표명이 있고 나서, 국세청에서 한진그룹총수와 중앙일보사주의 탈세에 대하여 형사고발하였습니다. 이 때, 국민은 '정말로 뭔가 바뀌는가 보다'라는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변칙상속증여의 몸통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씨 문제에 대하여는 왜 여태껏 묵묵부답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발행를 둘러싼 변칙증여의 문제는 참여연대에서 99년 7월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올해 4월에는 구체적인 증거물까지 제시하며 정식으로 국세청에 탈세제보를 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발행의 문제는 참여연대가 제시한 증거자료로 인해 그 사실관계가 이미 명백히 드러나 있고, 상속증여세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도 법리적으로 크게 고민할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밥상까지 차려주었는데, 국세청에서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여연대가 이 문제를 그토록 중요시하는 이유는 단지 이재용이라는 개인의 탈세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땀흘려 돈 한 푼 벌어본 적이 없는 유학생이 수조원의 재산을 불리면서도 세금은 고작 16억 원만 냈습니다. 남들은 58,000원에 사는 주식을 단돈 7,150원에 살 수 있는 권리를 대량으로 인수하는 회괴한 방법을 동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져 있어, 삼성이 변칙증여의 대명사로 인식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하여 과세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요?

어느 자영업자가 수십만 원 또는 수백만 원을 탈세하였고, 이 사실을 국세청이 적발하였습니다. 이 때 이 자영업자는 국세청직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재벌총수 아들이 수조원씩 재산을 불린 것에 대하여는 한 푼도 세금을 못 거두면서, 서민이 코묻은 돈 탈세한 것 갖고는 쥐 잡듯이 잡아?" 이에 대하여, 국세청 직원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국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곧바로 조세저항으로 이어지고, 조세저항은 국가의 기강을 흔들게 됩니다.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둘러싼 이재용 씨의 변칙증여의 문제는 단지 개인의 탈세문제가 아니라, 국가기강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될 지 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워낙 명백한 사안에 대하여 과세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그런지, 대통령께서 지난 7월 8일에 이건희 회장을 비공식적으로 독대한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정부에서 삼성의 변칙증여 문제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삼성의 대북투자 약속을 받아내는 빅딜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요?

부디 이 문제를 조세정의의 관점에서 처리해주십시오. 그래서 탈세범은 누구든 용서받을 수 없음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래야 모든 국민이 이 나라에 조세정의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고, 위에서 부터 아래까지 엄격한 납세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선진국의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삼성의 변칙증여 문제를 묻어둔채 외치는 조세정의와 재벌개혁은 '속빈 강정'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장, 회계사 윤종훈
2000/11/09 00:00 2000/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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