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오늘 서울역 광장에서 "비정규확산 정부규탄 및 비정규노동자 권리보장을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 발대식"이 있었습니다. 시월의 푸른 하늘 아래 비정규노동자들의 절규가 울려퍼졌습니다.

일용직, 계약직, 아르바이트, 파견직, 위탁계약직... 이 다양한 이름들이 바로 정규노동자와 똑같은 일, 똑같은 시간 일하고도 70%도 안되는 월급에 퇴직금도 연월차 휴과도 초과근로수당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노동자입니다.

비정규노동자는 한마디로 정규노동자가 아닌 사람을 일컫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용자에 의하여 직접 고용되어 고용과 사용이 일치하고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되는 고용형태를 정규(전형; typical, standard)근로라 하고, 그 이외의 고용형태를 비정규(비정형; contingent, atypical, non-standard)근로라 합니다. 정규근로는 근로기준법 상의 해고제한규정에 의한 보호를 받게 되어 중대한 귀책사유가 없는 한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되지만, 비정규근로는 기간만료 등에 의하여 본인의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근로계약관계가 종료되어 해고제한규정에 의한 보호를 온전하게 받지 못합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말씀드린대로 안정되지 않은 일자리입니다. 이러한 고용불안과 함께 정규직에 비해 매우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이 심각하며 또한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에 따른 불이익이 문제가 있습니다. 아래의 세가지 예를 통해 문제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8년때 같은 일을 하는 정아무개씨(남, 42). 98년 3월 이전까지 중견 회사원이었으나 지금은 같은 일을 하는데도 월 70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계약직이기 때문입니다. 장씨는 올 초 1년 단위 재계약 때 "먹고 살기 어려우니 임금을 조금만 올려달라" 사정했지만 돌아온 건 '싫으면 그만두라'는 싸늘한 반응 뿐이었습니다.

명예퇴직금으로 받은 4천만 원은 2년 만에 사라졌고 통장에는 잔고가 한 푼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가 계약직이 된 걸 모릅니다. 친구들도 모릅니다. 그의 가족은 이젠 정부의 1인당 최저생계비 기준을 밑도는 빈곤층이 된 것입니다. "처지가 부끄럽다"는 장씨는 살 걱정에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대형할인점에서 판촉 아르바이트 일을 하는 박씨(여, 43세). 7년째 이 일을 해온 박씨는 하루에 큰 박스 1백여 개는 족히 옮겨 허리와 팔의 인대가 늘어났고 밤에는 손발이 저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지난 번에도 깡통을 진열하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발가락뼈에 금이 가 깁스를 했지만 납품업체나 매장에선 나 몰라라 합니다. 그러나 박씨를 더욱 힘들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판촉사원과 납품된 상품을 총괄 관리하는 20대 중후반의 남자사원들은 박씨같은 파견된 판촉사원을 사람 취급도 안합니다. "××년" 따위의 상소리는 보통입니다. 모두 첫째 누나 혹은 부모 뻘 되는 나이인데도, 손님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막내 동생 같은 생각이 들어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대꾸라도 할라치면 당장 "그만두라" 응대했습니다.

지난 99년, 국가보훈처 산하 88컨트리클럽의 경기보조원(캐디)들은 노동조합을 건설하였습니다. 회사는 '캐디가 무슨 노동조합이냐'며 17차례나 교섭을 결렬시키며 조합간부를 징계하고, 항의하는 조합원을 폭행까지 하였습니다. 이들 경기보조원들은 근로기준법의 협소한 근로자 개념으로 인해 근로자로 인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골프채로 얻어맞거나 전동차에 다리가 기어 부상을 입고, 40세 조기 정년제에 걸려 집단 해고를 당하더라도 노동자가 아니라니 어디다 하소연 할 곳도 없습니다.

노동부는 최근 행정해석을 통해 88관광개발의 캐디들은 노동자임을 인정했지만, 회사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아닌 경기보조원들이 만든 노동조합과는 근로조건에 대해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대통령님,

비정규노동자의 실상이 위와 같다면 이 문제 앞에서 어떤 경제이론도 국정운영의 원칙도 무색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사람한사람이 풍요롭게 사는 사회가 아니라 대다수 서민들의 열악한 임금과 고용불안 위에서 피어나는 경제발전이란 그 자체로도 옳지 않을 뿐더러 조만간 무너질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비정형노동자 보호대책"은 임시 계약직 계약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여, 이들을 무제한으로 확산시키는 정책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6월, 26개의 시민·사회·노동단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비정규노동자 차별을 철폐하고 이들을 정규직화한다"는 원칙아래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균등대우 원칙 명시 △ 출산, 질병, 계절적 고용의 필요성 등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한 임시계약직 고용금지 △ 보험모집인, 캐디, 학습지교사, 지입차주 등 독립사업자 형태 노동자 근로기준법 완전적용 △ 단시간 노동자보호 △ 비정규 노동자에게 사회보험 전면 적용 등을 중심으로 법제도개선 운동을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일하는 시간만큼 소중하고 즐거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 국민의 정부에서 비정규노동자라는 낱말이 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참여연대 기획실 간사 홍석인
2000/10/05 00:00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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