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호 쓴소리] 열 사람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정기간행물(종간)/개혁통신 :
2000/05/18 00:00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전에 사는 한 의사입니다. 의약분업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오늘은 다른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위와 같은 제목으로 글을 올리게 된 이유를, 조금은 개인적인 이야기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저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학창 시절 가장 보람되고, 힘든 의대공부를 해낼 수 있도록 의지가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노숙자와 빈민에 대한 진료활동이었습니다.
제가 활동했던 곳은, 노숙자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고, 주말에는 진료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특이했던 점은 노숙자(그 당시는 대부분이 실직자가 아닌 부랑인들이었습니다)들에게 식비를 200원씩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키우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조치였습니다만, 이 식비를 위해서는 결국 이들은 구걸을 더 해야 했고, 한끼에 주는 식사량은 제한이 없었으므로, 한번 돈을 내고 먹을 때는 양껏, 배 터지도록 먹고는 나머지 하루나 이틀은 다시 굶곤 했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적은 돈이라도 이들에게는 매우 귀한 돈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사회적인 뒷받침이 없었고, 시민운동도 없었고, 이들의 막막한 의료와 경제적인 사정을 앞에 두고 저는 벽에 부딪힌 듯한 절망감을 느꼈었습니다.
이제 많은 세월이 지나 의사가 되어, 다시 노숙자와 빈민에 대한 진료를 미약한 힘이나마 돕고 있습니다. 15년 전보다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시다시피, 빈곤은 한 가지 원인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실직 등의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의 악화, 가정의 균열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가 되곤 합니다. 이런 중에서도 제가 진료하는 노숙자와 빈민들이 가장 소중하게, 든든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의료보호 카드입니다!
본인 부담 없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 카드는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재산 1호입니다. 단 돈 몇 천원, 몇 만원이 전 재산인 이들에게는 본인부담 없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큰 희망이 됩니다.
옷이나 운동화는 돈 없으면 조금 싼 것 사서 입고 신으면 그만이고 정 안되면 얻어 입어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건강을 잃으면, 그 작은 재산과 가족, 희망마저 다 잃는 것이 됩니다.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조차 돈이 없어도 정 아프면 병원에 가서 입원하고 그냥 나오더라도 국가에서 치료비를 대 준다고 합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었다고 들었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국가가 정하는 최저생계비보다 소득이 적은 가구에게는 부족한 만큼의 비용을 국가가 지원해 주는 제도라고 들었을 때, 사회적 연대에 관한 패러다임이 이제는 바뀌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연대(連帶)라는 말 대신에 굳이 솔리대리티(Solidarity)라는 영어를 쓰고 싶습니다. 의료보장이 잘 되어 있는 나라의 의사들을 만나면 이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단어가 그렇게 중요하고 흔히 쓰는 단어인지 외국 의사들을 만나서야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IMF 이후 사지육신이 멀쩡해도 가난할 수 있다는 사고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한 것으로서 우리도 이제 솔리대리티(solidarity)의 사회이구나 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실망하고 있습니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사람도 가난에 있어서 도덕적 해이를 사회가 감싸안고 해결하겠다는 마당에, 아픈 사람에 대해서는 도덕적 해이를 철저하게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새로 바뀌는 의료보호법에서는 도덕적 해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본인부담금을 두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본인부담금을 물리지 않을 경우 정부의 재정을 축내는 과잉 의료 이용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빈곤층에게 의료비 본인부담금을 물게 하다니요? 저는 이것이 대통령님의 지시 사항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실제로 저도 그런 환자 간혹 보았습니다. 겨울만 되면 단골로 시립병원 응급실을 찾아 입원하는 환자도 있고, 퇴원하라고 하면 꾀병을 부리는 환자도 있습니다. 본인부담금이 있다면 그런 환자는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일반인이 보기에 아무리 적은 금액의 본인부담금이라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될 터인데, 도덕적 해이를 없애기 위해 본인부담금을 부과해서 병원에 오지 못하는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죄인에 대한 재판을 할 때도 열 사람의 도둑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죄인은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에게도 이러한 원칙을 지켜야 하거늘, 하물며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말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아픈 것만도 서러운데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죽어야 하는 야만의 사회를 굳이 만드셔야 하겠습니까? 단 몇 사람의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이 있더라도 많은 사람의 한 맺힌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런 불편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평소에 대통령께서 평소 강조해 오신 진정한 연대, 솔리대리티(Solidarity) 아니겠습니까?
실제로는 본인부담금이 없다고 하더라도 불필요한 의료비를 유발하는 의료보호 환자들의 비율은 그렇게 높지 않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이 왜 굳이 입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깨끗하지도 않고 병균이 득시글거리고, 게다가 의료보호 환자라고 따가운 눈총까지 받는 시립병원에 왜 굳이 입원을 하려는 것일까요?
바로 잠잘 곳이 없어서이고, 난방비가 없어서이고, 먹을 밥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의료과잉이용은 이들에게 살 수 있는 다른 길을 열어줌으로써 해결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갈 곳을 만들어 주어서 굳이 불편한 병원에 입원하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해주는 일, 도덕적으로 완벽하라고 몰아붙이는 일이 아니라 따뜻하게 감싸안아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의료보호의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 문제라고들 하지만, 병원보다 훨씬 투자와 운영비용이 적게 드는 주거시설이나 요양시설 등으로 해결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전체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는 선진 외국에서는 이미 증명이 된 일들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도덕적 해이라고 번역되는 모럴해저드라는 영어는 삼척동자가 알아도 솔리대리티(solidarity)라는 영어는 웬만한 사람도 모르는 것입니까? 도덕적 해이는 성숙한 사회적 연대가 없는 사회에서 두드러질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연대가 끊어진 야만의 사회가 되기를 자청하는 데 동참하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에게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료에의 접근을 가로막는 본인부담금이라는 벽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이들에게서 희망을 거두어가지 말아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저는 대전에 사는 한 의사입니다. 의약분업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오늘은 다른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위와 같은 제목으로 글을 올리게 된 이유를, 조금은 개인적인 이야기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저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학창 시절 가장 보람되고, 힘든 의대공부를 해낼 수 있도록 의지가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노숙자와 빈민에 대한 진료활동이었습니다.
제가 활동했던 곳은, 노숙자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고, 주말에는 진료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특이했던 점은 노숙자(그 당시는 대부분이 실직자가 아닌 부랑인들이었습니다)들에게 식비를 200원씩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키우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조치였습니다만, 이 식비를 위해서는 결국 이들은 구걸을 더 해야 했고, 한끼에 주는 식사량은 제한이 없었으므로, 한번 돈을 내고 먹을 때는 양껏, 배 터지도록 먹고는 나머지 하루나 이틀은 다시 굶곤 했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적은 돈이라도 이들에게는 매우 귀한 돈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사회적인 뒷받침이 없었고, 시민운동도 없었고, 이들의 막막한 의료와 경제적인 사정을 앞에 두고 저는 벽에 부딪힌 듯한 절망감을 느꼈었습니다.
이제 많은 세월이 지나 의사가 되어, 다시 노숙자와 빈민에 대한 진료를 미약한 힘이나마 돕고 있습니다. 15년 전보다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시다시피, 빈곤은 한 가지 원인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실직 등의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의 악화, 가정의 균열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가 되곤 합니다. 이런 중에서도 제가 진료하는 노숙자와 빈민들이 가장 소중하게, 든든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의료보호 카드입니다!
본인 부담 없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 카드는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재산 1호입니다. 단 돈 몇 천원, 몇 만원이 전 재산인 이들에게는 본인부담 없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큰 희망이 됩니다.
옷이나 운동화는 돈 없으면 조금 싼 것 사서 입고 신으면 그만이고 정 안되면 얻어 입어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건강을 잃으면, 그 작은 재산과 가족, 희망마저 다 잃는 것이 됩니다.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조차 돈이 없어도 정 아프면 병원에 가서 입원하고 그냥 나오더라도 국가에서 치료비를 대 준다고 합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었다고 들었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국가가 정하는 최저생계비보다 소득이 적은 가구에게는 부족한 만큼의 비용을 국가가 지원해 주는 제도라고 들었을 때, 사회적 연대에 관한 패러다임이 이제는 바뀌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연대(連帶)라는 말 대신에 굳이 솔리대리티(Solidarity)라는 영어를 쓰고 싶습니다. 의료보장이 잘 되어 있는 나라의 의사들을 만나면 이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단어가 그렇게 중요하고 흔히 쓰는 단어인지 외국 의사들을 만나서야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IMF 이후 사지육신이 멀쩡해도 가난할 수 있다는 사고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한 것으로서 우리도 이제 솔리대리티(solidarity)의 사회이구나 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실망하고 있습니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사람도 가난에 있어서 도덕적 해이를 사회가 감싸안고 해결하겠다는 마당에, 아픈 사람에 대해서는 도덕적 해이를 철저하게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새로 바뀌는 의료보호법에서는 도덕적 해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본인부담금을 두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본인부담금을 물리지 않을 경우 정부의 재정을 축내는 과잉 의료 이용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빈곤층에게 의료비 본인부담금을 물게 하다니요? 저는 이것이 대통령님의 지시 사항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실제로 저도 그런 환자 간혹 보았습니다. 겨울만 되면 단골로 시립병원 응급실을 찾아 입원하는 환자도 있고, 퇴원하라고 하면 꾀병을 부리는 환자도 있습니다. 본인부담금이 있다면 그런 환자는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일반인이 보기에 아무리 적은 금액의 본인부담금이라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될 터인데, 도덕적 해이를 없애기 위해 본인부담금을 부과해서 병원에 오지 못하는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죄인에 대한 재판을 할 때도 열 사람의 도둑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죄인은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에게도 이러한 원칙을 지켜야 하거늘, 하물며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말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아픈 것만도 서러운데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죽어야 하는 야만의 사회를 굳이 만드셔야 하겠습니까? 단 몇 사람의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이 있더라도 많은 사람의 한 맺힌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런 불편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평소에 대통령께서 평소 강조해 오신 진정한 연대, 솔리대리티(Solidarity) 아니겠습니까?
실제로는 본인부담금이 없다고 하더라도 불필요한 의료비를 유발하는 의료보호 환자들의 비율은 그렇게 높지 않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이 왜 굳이 입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깨끗하지도 않고 병균이 득시글거리고, 게다가 의료보호 환자라고 따가운 눈총까지 받는 시립병원에 왜 굳이 입원을 하려는 것일까요?
바로 잠잘 곳이 없어서이고, 난방비가 없어서이고, 먹을 밥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의료과잉이용은 이들에게 살 수 있는 다른 길을 열어줌으로써 해결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갈 곳을 만들어 주어서 굳이 불편한 병원에 입원하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해주는 일, 도덕적으로 완벽하라고 몰아붙이는 일이 아니라 따뜻하게 감싸안아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의료보호의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 문제라고들 하지만, 병원보다 훨씬 투자와 운영비용이 적게 드는 주거시설이나 요양시설 등으로 해결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전체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는 선진 외국에서는 이미 증명이 된 일들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도덕적 해이라고 번역되는 모럴해저드라는 영어는 삼척동자가 알아도 솔리대리티(solidarity)라는 영어는 웬만한 사람도 모르는 것입니까? 도덕적 해이는 성숙한 사회적 연대가 없는 사회에서 두드러질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연대가 끊어진 야만의 사회가 되기를 자청하는 데 동참하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에게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료에의 접근을 가로막는 본인부담금이라는 벽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이들에게서 희망을 거두어가지 말아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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