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호 쓴소리] 재벌개혁의 새로운 시작이 필요합니다.
정기간행물(종간)/개혁통신 :
2000/03/30 00:00
재벌을 개혁한 대통령이 되십시오.
대통령님,
최근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의 내용 및 그 문제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이므로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상장 주식회사로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상법 및 증권거래법상의 절차(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완전히 무시한 채, 해당 기업의 주식을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은 '왕회장'의 말 한마디("내가 뒤에 있으니 아무 문제없다.")로 모든 것을 결정지워버리는 봉건적 소유·지배구조에 한국 경제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지난 2년간 기업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만들어졌으며, 또 그 성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최근 현대그룹의 행태는 대다수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나아가 분노케 했으며, 결국 지난 2년간의 재벌개혁 조치가 핵심을 벗어난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대통령님,
유감스럽게도 국민들의 정서나 인식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지난 2년간의 재벌개혁 조치는 빅딜이나 부채비율 200% 달성 등과 같이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한 과제들에 치중되었고, 그나마도 채권은행을 통한 압력으로 가능했던 것이며 재벌들이 스스로 개혁과제를 수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합법적 제도를 통하기보다는 개혁대상인 재벌총수들과의 밀실협상에 주로 의존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재벌총수들은 마지못해 정부의 조치를 이행하는 시늉만을 냈을 뿐 재벌총수들의 의식과 행동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특히 재벌개혁의 핵심과제인 소유·지배구조 개선은 법과 제도는 일부 바꾸었으나 실제 재벌총수의 전횡적인 경영체제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으며, 이번 현대사태가 이를 여실히 증명해주었습니다.
더군다나 총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재벌개혁 고삐가 느슨해지자 재벌총수들은 버젓이 구태를 재연하고 있습니다. 현대그룹만이 아닙니다. 삼성그룹은 이재용 씨로의 3세 승계 작업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으며,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안전불감증 운항을 해 온 한진그룹 총수일가는 여전히 경영권 행사를 공언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재벌개혁을 위한 노력을 지금 당장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려가 앞섭니다.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과 관련하여 최근 정부당국에서 발표한 대책들을 살펴보면, 여전히 재벌개혁을 핵심을 비켜간 대중요법만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관련 정부대책의 문제점 지난 27일과 28일 재경부를 필두로 정부당국에서는 현대그룹 사건으로 불거진 재벌의 황제경영·족벌경영 문제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조조정본부 및 경영자협의회 등과 같이 상법에 근거하지 않은 초법적 의사결정기구를 폐지하도록 하는 것과 둘째, 기업지배구조 개선 실적이 미흡한 재벌의 경우 재무구조개선약정에 의거하여 여신회수 등의 금융제재를 부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대책 모두 실효성이 극히 의심스러우며, 나아가 장기적으로 볼 때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두 가지 대책은 문제의 뿌리를 캐내는 근원적 치유책이 아니라 표피적 현상에 대한 대중요법일 뿐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구조조정본부나 경영자협의회와 같은 초법적 또는 불법적 기구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그로 인해 주주총회나 이사회와 같은 공식적 의사결정기구가 무력화되고, 따라서 의사결정권을 행사한 재벌총수에게 경영상의 책임을 추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벌이라는 그룹조직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하는 한, 그 산하 계열사의 경영전략을 조정·관리하는 기구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폐지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2년 전에 회장비서실(또는 기획조정실)을 폐지하라고 명령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의 구조조정본부입니다. 그 구조조정본부를 폐지하라고 또다시 명령한다면, 명칭이나 소속만을 바꾼 채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가 또 만들어질 것입니다. 나아가 그 기구는 보다 음성적이고 비공식적인 형태로 변모할 것이며, 결국 의사결정권을 행사한 재벌총수에 대한 책임추궁은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문제의 본질은 재벌총수가 그 누구의 감시나 통제도 받지 않으면서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는 데 있는 것이지, 재벌총수의 결정을 보좌·집행하는 기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한편, 정부당국이 금융제재를 언급한 것 역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재벌총수와 기업을 동일시하는 인식상의 오류를 정부당국도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단일한 조직체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대주주뿐만이 아니라 소액주주, 채권단, 종업원, 거래기업, 소비자, 지역주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있습니다. 기업은 이처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입니다.
그런데 대주주의 전횡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 전체에 금융제재를 가하게 되면, 그 충격은 대주주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타의 이해관계자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재벌총수와 기업을 분리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벌개혁의 출발점이며, 재벌총수의 전횡을 통제함으로써 기업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진정한 재벌개혁의 도달점입니다.
또한, 금융제재 수단 중 여신회수는 협박용에 불과할 것입니다. 채권단이 실제로 여신을 회수하게 되면 한국의 그 어떤 기업도 버틸 수 없습니다. 여신회수는 영원히 사용할 수 없는 핵무기와 같습니다. 따라서 여신회수를 협박용 카드로 사용하면, 단기간에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또다시 밀실협상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으며, 재벌총수들의 의식과 행동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님,
재벌개혁은 시급하고도 절박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에 대중요법을 남발한다고 해서 재벌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재벌개혁의 핵심이 소유·지배구조의 개선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이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갖추고, 그 법과 제도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유도하는 장기·지속적인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2. 소유·지배구조 개선의 의미와 수단
대통령님,
현재 한국의 시장경제질서는 대단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시장경제질서를 정상화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갖추는 것은 정부의 고유한 역할입니다. 특히 소유·지배구조와 관련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정부의 포기할 수 없는 책무입니다. 왜곡된 시장에 무조건 맡겨 놓고 정부는 개입하지 말라는 식의 재벌측 논리에 대해 의연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소유·지배구조의 개선은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식과 행동이 변화할 때에만이 소유·지배구조의 관행은 개선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추는 데 정부의 노력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소유·지배구조의 개선 대책은 다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첫째,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자신의 의견을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관계자가 적극적으로 경영참여를 하거나 또는 최소한 경영감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하는 사전적 통제장치를 의미합니다.
사전적 통제장치의 구체적 형태는 대주주로부터 독립된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문제로 귀착될 것입니다. 소액주주, 채권단, 종업원 등의 이해관계자가 자신을 대표하는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합니다. 독립적인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제도적 방안으로는 두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독립적인 사외이사의 선임과 같은 경우에 계열사 소유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제한하는 방안을 도입하여야 합니다. 이번 현대사태에서 보았듯이 총수들이 자신은 지분이 없거나 소수의 지분만을 가지고 전횡적인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은 계열사간의 순환출자로 확보한 지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열사소유지분의 의결권제한은 독립적인 감사의 선임을 보장하기 위해서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은 3%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기존의 제도와 그 취지가 동일한 것입니다.
2)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는 것입니다. 일부 재벌들과 관료들은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일부 주에서만 집중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이제도의 의무화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중투표제는 소액주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며, 특히 우리나라 재벌과 같이 소수 대주주가 절대적인 전횡경영을 하는 나라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제도입니다. 미국에서는 이제도가 활성화되는 않은 이유는 미국에는 우리 나라의 재벌과 같이 1인 대주주가 전횡적인 경영을 하거나 자식들에게 경영권을 세습시키는 상장회사가 없기 때문이지 결코 이제도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수한 대기업에 사외이사로 선임되는 분들은 개인적으로는 모두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훌륭한 사외이사들이 이사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더라도 재벌의 소유·지배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재벌총수가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한, 그 사외이사는 전체 주주가 아닌 재벌총수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선임할 권한을 가진 사람을 염두에 두면서 행동하는 것,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난 3월 초 저희 참여연대와 LG그룹 계열사인 데이콤이 합의한 내용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자부합니다. 즉 '우리사주조합을 비롯한 소액주주가 사외이사 2인을 추천'하도록 하고, 이들이 포함된 '감사위원회에 일정 규모 이상의 계열사간 내부거래, CB·BW 등의 발행 조건, 신주 제3자 배정 등에 대한 사전 승인권을 부여'한 것은 한마디로 획기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의 지배구조 개선안을 더욱 발전시키고 또한 모든 기업에 확대·적용되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로 남겨져 있습니다.
둘째, 대주주의 독단적 의사결정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이해관계자가 있을 경우 그 피해를 신속하게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관계자가 피해구제 절차를 통해 대주주의 위법행위를 제재하는 사후적 통제장치를 의미합니다.
사후적 통제장치의 구체적 형태는 실효성 있는 사법적 피해구제 절차를 마련하는 문제로 귀착될 것입니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사람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겠지만, 법의 미비나 현실적 장벽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집단소송제도를 조속히 입법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집단소송제도는 판결 효력의 적용범위, 입증책임의 귀속주체, 소송비용 등의 측면에서 기존의 민사상 손해배상제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제재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집단소송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면, 주가조작이나 변칙상속을 시도하는 무모한 재벌총수는 많지 않 을 것입니다.
집단소송제도의 강력한 효과만큼 그 도입을 저지하려는 재벌측의 노력도 강력합니다. 작년 정기국회 때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안]이 법사위에 계류된 상태에서 변변한 심의조차 없이 15대 국회의 폐회와 함께 자동 폐기되었습니다. 이를 조속히 되살려 현실화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정부의 재벌개혁 의지와 능력을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입니다.
집단소송제의 도입과 함께 소액주주권한의 강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법개정을 통하여 소액주주의 권한은 과거에 비해서 크게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소액주주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주주대표소송에 필요한 지분을 0.01%로 낮추었으나 지난 2년 동안 참여연대를 제외하고는 단 한 건의 주주대표소송도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이 이유는 이 소송이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주대표소송을 단독주주권으로 바꾸고 주주총회관련 절차를 보다 소액주주들에게 유리하도록 추가적인 법개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3. 산업자본과 금융의 분리 : 금융기관의 소유·지배구조 개선
대통령님,
소유·지배구조의 개선은 재벌개혁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금융개혁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현대그룹의 형제간 경영권 분쟁은 금융서비스소그룹(현대증권, 현대투신, 현대종합상사, 현대상선 등)에 대한 지배권 다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현대그룹은 2003년까지 5개 소그룹으로 계열분리될 예정에 있습니다. 이 때 몽구 - 자동차소그룹, 몽헌 - 전자소그룹 및 건설소그룹, 몽준 - 중공업소그룹 등은 이미 선이 그어졌으나, 금융서비스소그룹은 무주공산이었습니다. 결국 금융서비스소그룹에 대한 지배권의 향배를 둘러싸고 형제간에 격돌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되어 왔었습니다.
이것은 재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히 재벌총수의 황제와 같은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금융계열사에 대한 지배가 핵심임을 다시 한번 드러낸 사례에 불과합니다. 삼성그룹의 3세 승계 작업도 이재용에게 삼성생명과 삼성투신에 대한 지배권을 넘기는 것으로 사실상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경제의 규모와 구조를 감안할 때 정부가 과거처럼 직접적으로 경제에 개입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뿐입니다. 따라서 국민경제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내부에서 엄격한 통제장치가 작동하여야 하며, 이러한 역할은 기본적으로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기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합니다.
재벌의 금융지배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중복과잉투자에 따른 낭비와 이에 따른 경제불안을 모면할 수 없으며, 결국 국민의 희생 위에 정부가 또다시 개입해야 하는 악순환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은행에 대한 동일인 지분소유한도(시중은행 4%, 지방은행 8%)를 유지함은 물론, 제2금융권에 대해서도 동일인 지분소유한도(최소한 8% 수준)를 도입하여야 합니다. 최근 도입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금융지주회사제도가 이러한 지분소유한도 규제를 우회하거나 저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공정거래법에 계열분리 명령제를 도입함으로써, 공정경쟁을 저해하는 산업자본과 금융의 결합 사례에 대해서는 강제적 분리 명령을 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계열분리 명령제는 선진국 독점금지법상의 기업분할 명령제(예를 들면, 미국의 AT&T 및 Microsoft에 대한 기업분할 명령 사례)를 그룹 단위에서 적용하는 것으로, 경쟁촉진정책의 핵심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두 가지 대책은 금융기관의 소유구조를 직접 규제하는 것인 만큼 엄청난 저항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2년간의 경험을 돌이켜볼 때, 제2금융권의 경우 소유구조 개선 없이는 지배구조 개선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제2금융권 개혁 없이는 재벌개혁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산업자본이 금융을 지배하는 상태에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습니다.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는 국민경제의 효율성, 형평성, 그리고 안정성 모두를 파괴하는 요소입니다. 이 점에서 정부의 의연하고도 단호한 입장 정리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4. 상속·증여세법의 완전 포괄주의로의 전환
삼성그룹의 3세 승계 작업은 현행 세법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재용은 단돈 16억원의 증여세만을 납부하고서도 약3조원에 달하는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나아가 삼성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최근의 삼성SDS 사례에서는 법원과 검찰도 이러한 변칙 상속을 제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합리화시켜 주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최근 재벌들의 변칙 상속·증여가 주로 비상장 주식이나 주식연계 사채(CB, BW 등)를 이용하여 이루어지는 만큼, 무엇보다 먼저 이들 유가증권의 가치 평가방법을 개선하는 구체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 세법상의 문제를 부분적·단편적으로 보완하는 방식으로는 재벌의 편법 상속 욕구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규제수단이 도입되면 이를 우회할 수 있는 보다 정교한 수법이 개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편법 상속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은 세법상에 열거된 사유에 국한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상속·증여가 이루어진 모든 경우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즉 상속·증여세법의 체계를 '제한적 포괄주의'에서 '완전 포괄주의'로 전면 개편하여야 합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부자는 사회적 재산의 임시 관리자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재산 전부를 공익재단에 출연하였으며, 그것도 U.S. Steel의 주식을 출연한 것이 아니라 주식을 매각한 후 현금을 출연함으로써 공익재단과 기업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놓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게이츠 역시 자식들에게는 기껏 100만 달러씩의 상속만을 공언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고작 5% 남짓한 지분만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업 전체를 사유물화하고,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하여 자식들에게 재산을 상속하고, 나아가 경영능력에 대한 객관적 검증도 없이 총수의 지위를 대물림하고, 그리고 공익재단을 단지 상속세 회피 수단 및 사실상의 지주회사로 전락시키는 우리 나라의 재벌총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 카네기나 빌게이츠 수준으로 개과천선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속·증여세법의 완전 포괄주의로의 전환은 재벌총수들의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최소한 장치입니다. 이러한 개혁조치 없이 어느 누가 자신이 속한 기업에 대해 일체감을 갖고 일할 것이며, 어느 누가 생산적 복지에 대한 정부의 약속을 신뢰하겠습니까?
2000년 3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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