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대주주의 의사 결정 추인기구로 전락해온 이사회를 실질화시킴으로써 대주주와 재벌 총수의 전횡을 막고 주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 도입한 사외이사 제도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592개 상장법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외이사운용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외이사들의 이사회 참석률은 평균 63.1%에 불과했으며, 사외이사의 78.2%가 이사회 안건에 대해 한번도 반대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사외이사들이 적극적인 경영견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업체 사외이사가 전문성보다는 대주주와 가까운 친인척이나 전직 장·차관 등 고위 관료, 은행장·법조인·현직 교수 등 저명인사들로 구성되어 실제로 경영을 감시하기 힘든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외이사들이라 할지라도 기업들이 이사회 안건을 미리 알려주지 않거나 자료제출 요구에 응하지 않아 경영상황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외이사들은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거나 중요한 의사결정과정에서 소외됨으로써 거수기 역할만 해온 것입니다.

최근에는 정부 부처나 금융기관 출신 공직자들이 사외이사를 맡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업에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습니다. 공직자가 재직 당시의 업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기업에 사외이사로 취임하게 되면 이해관계 상충으로 공익을 저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이 사외이사들을 국세청 고위 임원들로 선임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삼성SDI가 오늘 열린 주주총회에서 각각 황재성 전 서울지방 국세청장과 최병윤 전 국세청 징세심사국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한 것입니다.

사외이사제도의 근본 취지가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부여하여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기업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데 있다면, 이러한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행사할 사외이사는 전문적인 지식과 아울러 무엇보다도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독립성이 요구될 것입니다. 독립성은 단지 회사의 외부 인사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해당 회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타회사의 임원은 물론, 해당 회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사도 독립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이번에 삼성전자와 삼성SDI가 선임한 국세청 출신 사외이사들은 독립성을 지녔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삼성이 이들을 사외이사로 선임한 것은 기업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오랜 국세청 고위 공직자로서의 경력과 직책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으며,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씨에 대한 세습 과정에서 증여세 회피 문제가 제기되어 있는 것과 연관지어 보면 그 의혹은 더욱 증폭됩니다.

정부가 내년부터 대형 상장사들의 경우 이사회의 반수 이상을 사외이사로 확보하도록 하고 있으나, 사외이사 제도가 지금처럼 운영된다면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대주주와 재벌 총수를 견제하기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제도가 오히려 대주주와 재벌 총수의 전횡에 형식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들러리로 전락하거나, 대주주와 총수의 이익에 복무함으로써 친위체제 구축에 기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님,

사외이사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먼저, 정부와 기업들 스스로가 투명경영을 하겠다는 각성이 필요하고, 제도적으로는 사외이사 후보들에 대한 사전 정보 제공을 의무화하여 정부와 주주들의 철저한 감시, 감독이 뒤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말에 개정된 증권거래법이 대형 상장회사나 증권회사의 경우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이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만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할 수 있도록 규정(증권거래법 제54조의5 제3항 및 제191조의16 제3항)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반드시 개정되어야 합니다.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가 후보 추천권을 독점함으로써 주주라면 누구든지 이사후보를 추천할 수 있는 기본권리를 제한하고 주주총회를 통해 이사를 선임하도록 하고 있는 상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소액주주들이 대주주와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는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출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집중투표제 도입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대통령님,

사외이사제도는 제대로만 운영되면 대주주와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사외이사 제도가 그런 취지를 잘 살리지 못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부가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으로 사외이사 제도를 적극 도입한 만큼, 이 제도가 실질적으로 경영을 견제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입니다.

2000년 3월 17일
참여연대 정책부실장 이승희
2000/03/16 00:00 2000/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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