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지역주의라는 말이 다시 우리 공통의 화두가 되어버렸습니다. 지역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인지 지역주의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인지, 사리판단조차 쉽지 않은 형국입니다. 모든 언론이 지역주의를 우리 민주화의 최대의 적으로 보도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의아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각 정당의 공천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본격적인 총선 선거운동 과정의 문턱에 다다르기가 무섭게 번지기 시작한 것이 지역감정 건드리기입니다. 그 양상은 이렇습니다. 우선 공동 여당으로 정권의 울타리 안에서 이익을 누리고 있던 자민련이 결별을 선언하고 뛰쳐나갔습니다. 뒤이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공천후유증으로 민국당이 태동하였습니다. 정권의 울타리를 벗어난 자민련이나 공천불만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국당이나, 말하자면 모두 신생 야당인 셈입니다. 따라서 한 달 남짓의 짧은 시간에 표를 긁어모아 한 석이라도 더 차지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조급하고도 지대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지역감정 유발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최근 며칠 사이에, 너나 할 것 없이 늘어놓은 지역감정 선동책은, 그 구체적 표현을 지적할 필요도 없이 추태로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정치현실과 관련하여 가장 심각하게 논의되는 것이 지역주의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 지역주의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불가사의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두말 할 것도 없이 표와 당선을 눈앞에 두고는 수단이고 방법이고 가리지 않는 탓이지요. 오직 당선만 있을 뿐이고, 막판엔 이념도 정견도 최소한의 도덕도 없다는 것입니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무지의 소행이요 구태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이성을 잃은 듯한 지역주의 선거운동은, 따지고 보면 다들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정에서 더러 욕을 먹더라도, 결국엔 유권자들이 표를 던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즉, 지역주의의 망발은 주권자인 국민을 얕보는 데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선연대는 지역주의에 대한 전쟁까지 선포한 것입니다. 전국을 버스로 돌며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운동을 펼쳐 나갈 것입니다. 새 밀레니엄의 첫 봄을 맞아 벌어지고 있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는, 따지고 보면 정치권 모두에게 공통되게 책임이 있습니다. 여당에도 정부에도 대통령께도 책임이 있습니다. 경상도나 전라도, 또는 충청도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발은 잘못 된 공천이고, 전개는 단호한 의지의 부재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대통령께서 겸허한 자세로 사태를 살펴보고 지역감정 해소와 추방을 위한 중대 선언이라도 상징적으로 필요할 때입니다. 그 선언이란 그럴 듯한 형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권을 포기하고서라도 국민화합을 이루겠다는, 철저한 반성이 토대가 된 의지가 담겨야 합니다.

98년 6·4 지방선거 때,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의 '미싱 발언'이 생각납니다. 그때 대통령께선 김 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고, 그 재판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단호한 모습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품위에 걸맞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나도 한때는 거짓말쟁이였지만, 앞으로는 가장 정직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고 대응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저껜 민국당의 김광일 씨가 대통령을 지역주의의 수괴라고 했다더군요. 민주당에선 즉각 법적 대응을 하겠다니 그쪽에선 더 반겼다는 소식까지 전해집니다. 이것도 현재 진행중인 혼돈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 모두 진정으로 그러한 지역주의를 청산하자"고 하실 수는 없는가요?

김광일 씨의 지역주의 발언에 대한 법적 대응이란 반응 자체도 지역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사상일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근저에 깔려 있는 보이지 않는 지역주의의 사상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 반성을 대통령께서 먼저 공개적으로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000/03/09 00:00 2000/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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