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의료보험 통합이 대통령님의 선거 공약이란 사실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이제 2000년 7월 1일이면 의료보험 통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법>이 시행될 예정입니다. <국민건강보험법>은 우리 나라 의료보장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큰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의료보험이 의료비 부담을 '할인'해 주는 제도라면 건강보험은 국민의 건강 보장을 목표로 삼는 법입니다.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드는 과정도 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보건복지부가 새로 만들어질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지사조직을 아직 확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사 조직이 확정되지 않으면 지사 사무실을 구할 수 없고, 건강보험 업무에 필요한 전산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지난 1998년 10월 지역의료보험조합을 통합하였을 때의 '민원대란'을 기억하실 겁니다. 민원대란이 생긴 이유는 정부가 공단조직 결정을 미루어 공단의 사전준비가 미흡하였고, 이로 인해 보험료 고지의 오류, 정산과 자동 이체 오류 등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업무 미숙은 의료보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고, '선한 정책'을 시행하면서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과거의 잘못된 정책결정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똑 같은 잘못을 반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 사무실을 임대하고 전산을 설치하고 이를 점검하려면 최소 5개월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아직 지사조직 자체도 확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보건복지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지사조직을 아직까지 확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사조직을 국회의원 선거 전에 확정하면 조직 통합으로 손해를 입게 된다고 느끼는 직장의보노동조합과 한국노총이 이에 대해 반대할 것이고 이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는 대통령님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해 온 '공정한 선거'를 훼손하는 것이며, 필요한 정책을 정치적 이유로 연기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결국 의료보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런 보건복지부의 조직 결정 지연에 대하여 민주노총과 건강연대 등의 노동, 사회단체 등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으며 이 항의의 강도는 점차 강해질 것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지사 조직 확정을 미루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지사조직 2원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상황에 따라서는 지사조직을 직장전담지사와 지역전담지사로 분리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사조직을 이원화하면 같은 지역에 두 개의 지사를 설치하여 민원인의 혼란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관리운영비를 낭비하게 되어 의료보험 통합의 원칙을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 조직을 통합의 원칙에 맞도록 1원화 하는 결정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통령님이 보건복지부의 직무유기를 바로 잡아 주십시오.

의료보험 통합과 관련해서 중요한 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의료보험 재정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지역의료보험의 재정은 더욱 어렵습니다. 1999년 한해 지역의료보험은 3,349억 원의 당기 적자를 나타냈고, 의료보험료의 대폭 인상이 없다면 2000년 말에는 약 8,275억 원의 적자를 나타내서 지역의보 전체가 4,346억 원의 적자를 기록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의 명의로 일간 신문에 " 1999년 지역의보 적립금 3,929억 원, 의보 재정,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라는 사실과 다른 광고를 낸 바 있습니다. 지역의보 적립금 3,929억 원은 지역의보 진료비의 겨우 1개월 치에 불과하며, 법으로 규정된 적립금의 1/6에 불과한 액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지역의보 재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가뜩이나 어려운 의보재정에서 광고비를 지출하는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지역의보의 재정이 어려워진 이유는 여럿입니다. 보험 적용 범위를 확대한 것이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부가 지역의보에 대한 50% 국고지원 약속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1988년 농촌지역의보가 시작될 때 정부는 직장가입자와의 형평성을 보장하기 위해 지역의보 재정의 50%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단 두 번 지켜졌을 뿐입니다. 국민의 정부 이후 국고지원율은 더 떨어져 1999년과 2000년에는 가장 낮은 26.1%까지 낮아졌습니다. 올해에는 1조2천억 원을 과소 지원했습니다.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정부가 지원하지 않은 금액은 불변가격으로 5조7천4백6십억 원으로 올해 지역의보 진료비 보다도 훨씬 많은 금액입니다.

지역의보에 대한 50% 국고지원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지역의보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지역의보 가입자의 올해 평균보험료는 31,147원으로 직장의보 가입자 보다 8,753원 많습니다. 정부가 국고 지원을 제대로 했더라면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도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수준은 직장가입자 수준으로 낮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국고지원 약속 불이행은 보험적용 범위를 확대하는데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전국민의료보험을 실시하고 있지만 진료비의 절반 정도를 본인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료비의 상한선이 없어서 중한 질환을 앓는 경우에는 수천만 원의 진료비를 부담하게 되어 집안이 경제적으로 파탄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대만과 같이 우리와 비슷한 경제수준을 가진 나라에서도 일정액 이상의 진료비는 전액 의료보험에서 부담하여 국민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지역의보에 대한 국고지원 불이행은 의료보험 통합의 연착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의료보험 통합이 전국민간 사회적 연대감을 강화하고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을 보장하는 매우 바람직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직장근로자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이유는 지역의보의 재정 불안정으로 인해 자신들이 손해를 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직장근로자들의 이런 우려는 근거가 없는 것이지만 이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의보통합을 원만히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역의보의 재정 안정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지역의보에 대한 50% 국고 지원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의료보험은 '좋은 제도'입니다. 건강을 서로 나누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국민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입니다. 의료보험 통합은 이런 의료보험의 원칙의 실현을 한 단계 높여 줄 것입니다. 의료보험 통합이 무산되지 않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이는 대통령님 자신의 공약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며 국민 건강을 실현하는 중요한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기도 합니다. 통합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조직을 하루 빨리 확정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실무 준비 부족을 이유로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시행 시기를 6개월이나 연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무준비를 태만히 하고 있는 보건복지부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지역의보에 대한 50% 국고지원 약속을 올해부터 지켜주십시오. IMF 이후 실직자와 비정규직 근로자가 발생하고 이들은 모두 지역의보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역의보에 대한 국고지원은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생산적 복지'를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고 있는 국민의 정부에서 우리 나라 사회보장의 핵심인 의료보험에 대한 국고지원이 가장 낮다는 사실은 정부의 국정목표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의료보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져 국민 건강권 확보의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2000년 3월 2일
울산의대 교수 조홍준
2000/03/02 00:00 2000/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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