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2월 9일 새벽 정치권은 2년 가까이 질질 끌어오던 선거법·정당법·국회법·정치자금법을 개정했습니다. 일부 바람직한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총선시민연대가 요구한 낙선운동을 제한하는 등 끝내 정치개혁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고친 선거법으로는 깨끗한 선거를 치를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잘한 일입니다. 먼저 의원 정수를 선거구 획정위 안대로 299석에서 26석을 줄여 대국민약속을 지킨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의석 수를 꼭 줄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원 수 감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경유착의 근절과 고비용 정치구조의 개선, 일하는 국회의 정립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권 스스로 감축을 약속했으므로 줄이는 게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지역구간 인구편차도 3.88:1로 큰 차이는 아니지만 15대 국회의 4:1보다는 표의 등가성이 높아진 것도 점수를 줄만한 대목입니다. 대표적 게리맨더링으로 꼽히는 인천 계양·강화 등 몇 지역구도 조정되었고, 도·농 통합 지역구도 의석을 하나로 줄임으로써 볼썽사나운 예외가 사라졌습니다. 감축 폭을 줄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획정위 안을 받아들인 것은 어쨌든 다행스런 일입니다.

비례대표 후보의 30% 여성 할당을 정당법에 명시한 것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 남은 일은 공천과정에서 여성을 당선이 가능한 상위 순번에 30% 이상 공천하고, 지역구에서도 여성을 적극 배려하는 일입니다. 멋대로 상향조정한 국고보조금과 단축한 공소시효를 원상회복시켜 손대지 않은 것도 잘한 일입니다.

국회법도 예결위를 상설화하면서 임기를 1년으로 해서 모든 의원들에게 돌아가며 나눠먹기식으로 예결위를 거치도록 하는 등 일부 문제는 있으나 표결실명제를 도입하고 소위원회 속기록을 작성하게 하는 등 대체로 올바른 방향으로 개정되었다고 봅니다. 청문회 대상의 범위를 재고할 필요는 있으나 인사청문회 도입도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포기한 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대통령님께서 1인2표제 또는 정당투표제를 도입하는 것에 애착을 기울이신 것은 잘 압니다. 대통령님께서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셨음에도 끝내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좌절된 데 대해서는 대통령님도 안타까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현재의 전국구 제도를 개선하는 좋은 대안입니다. 전국구는 입법 취지와 달리 지금까지 '임명직 국회의원'처럼 운영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직능 대표나 여성이나 장애우 등 정치적 약자의 대표, 신진정치세력이 선정되기보다는 당 지도부에 대한 충성도나 지역구를 물려준 원로에 대한 예우, 지역구에서 도저히 당선 가능성이 없는 인사 등이 공천을 받아왔습니다. 한때는 돈 받고 의원직을 파는 매관매직의 방편으로 악용된 적도 있었습니다. 또 전국구 의원의 당선이 지역구 의원이 받은 득표수로 결정되므로 인물을 보고 찍은 유권자의 표가 정당 지지로 왜곡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같은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은데 대해 실망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례대표 배분의 장벽을 높여놓은 것도 대표적인 개악입니다. 지역구에서 5석 이상을 획득하거나 유효득표의 5% 이상을 차지한 정당에게만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정말 이렇게 막갈 수도 있구나 싶어서 어이가 없습니다. 2% 이상의 득표나 1석 이상을 요구하는 현재의 전국구 봉쇄조항보다 강한 이같은 진입 장벽은 소수 세력이나 신진 세력의 원내진출을 원활하게 한다는 취지에 크게 어긋납니다. 다당 분립으로 인한 정치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기존 정치세력끼리 나눠먹기하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정치가 이렇게 혼탁한 것도 다당 분립때문입니까? 오히려 2% 이상을 득표했으나 지역구 의석이 없는 정당에게 우선 배분을 하도록 하는 게 비례대표의 취지에 맞는 것 아닙니까?

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당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도부나 공천심사위원회가 비례대표 후보의 2-3배수로 대상자를 선정한 뒤 대의성을 가진 기구의 투표를 통해 다득점순으로 순번을 결정하는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또 비례대표 후보도 지역구 의원 후보와 마찬가지로 학력 경력 전과 등을 소상히 밝혀 국민의 정당 선택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상향식 공천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하향식 제도가 정치적 힘을 갖지 못했으나 자질과 능력이 있는 후보들을 국회에 충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신한 신인이 상향식 공천제도 아래서는 하향식 제도에서보다 공천을 따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역구민이 아닌 자신의 소속정당 당원에게 자신을 알리고 설득할 능력이 없다면 소속정당의 지원을 받아도 본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하향식 공천제도는 상향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또 국회의원 출마시 기탁금을 1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올렸는데, 이것 또한 경제적 이유로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이므로 다시 1000만원으로 내려야 합니다. 국회의원이 지방자치단체장에 입후보할 때에는 등록직전에 사퇴하도록 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국회의원에 입후보할 때는 6개월전에 사퇴하도록 한 것은 입법권을 남용한 것으로서 위헌 소지가 있습니다. 사퇴 시한을 통일해야 합니다. 새로 만들어진 선거기사심의위원회는 폐지해야 합니다. 왜곡되고 편파적인 보도가 문제인 것은 인정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언론통제, 나아가 언론탄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이번에도 시민단체의 선거 운동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시민단체의 선거운동 자유가 이전보다는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총선시민연대가 요구한 87조(단체의 선거운동 금지조항) 폐지와 58조(사전선거운동)의 수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 개정으로 정당의 후보추천에 대한 단순한 지지·반대의 의견개진 및 의사표현은 가능해졌지만, 선거기간에만 가능하고 방법도 제한시켰습니다. 예컨대 총선시민연대가 요구한 가두서명이나 장외집회를 금지시킴으로써 낙선운동은 여전히 불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유권자들이 자신의 안방에서만 낙선운동을 하고 길거리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낙선운동에 대한 국민의 전폭적 지지에 놀라 낙선운동을 허용해 주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금지한 것입니다.

각 후보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돈, 유언비어, 흑색선전 등 온갖 불법과 타락이 판을 쳤던 것이 우리 선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은 유권자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인데, 이는 유권자의 권리이기도 하고, 시민단체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87조는 전면 폐기하고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은 58조의 사전선거운동의 범주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현행 선거법은 지나치게 정당 위주로 구성됨으로써 정작 주권자인 국민과 일반 시민사회단체의 권리나 의무는 경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조항이 바로 단체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87조입니다. 관변 단체나 불법 유령단체의 선거 개입을 막으려는 입법 취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조항 때문에 올바른 선거 문화를 정착시키려는 건전한 시민단체의 활동은 위축되었습니다.

87조는 시민단체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금지함으로써 위헌적 성격을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에도 크게 어긋납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소 조항으로서 우리 민주주의의 낙후성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국민주권주의입니다. 국민의 자율적 의사와 판단을 바탕으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정당 이외에 시민단체의 활동이 존중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는 시민단체의 활동이 정치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민단체의 건전한 활동이 자유와 공정성이라는 선거법의 기본 이념조차 무시한 87조 때문에 위축되어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침해한 것입니다.

87조와 58조가 위헌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헌법상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과 정치적 자유권, 정치적 활동권을 지나치게 침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은 국민 개개인의 양심과 정치적 지향 등의 사유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본적 인권의 보장과 양심의 자유 등을 비롯하여 참정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58조와 87조 등에 의해서 시민단체가 후보자에 대한 지지 반대는 물론이고 후보자의 정책에 대한 견해 발표까지 제대로 할 수 없게 금지되었으므로 국민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또 헌법에서는 선거운동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당뿐만 아니라 유권자 개개인은 물론 시민단체도 선거운동을 공정하게 할 수 있도록 보장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87조는 완전 폐지하고 58조의 사전선거운동의 범주에서 시민단체의 활동은 빼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 잘 아시듯이 지금 임시국회가 열린 상태입니다. 물론 정형근 의원에 대한 긴급 체포 시도 때문에 야당이 방탄국회를 연 것이지만, 그래서 여당이 참석하지 않아 공전하고 있지만, 이왕 열린 임시국회이므로 위에서 말씀드린 선거법의 독소조항을 즉각 재개정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후보 공천단계에서부터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총선시민연대가 공천 기준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밀실공천·나눠먹기공천·돈공천·낙하산공천 등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밟아 올바른 공천이 이루어지도록 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000년 2월 17일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손혁재
2000/02/17 00:00 2000/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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