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오늘은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많은 국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있는 제도에 대하여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배상심의회'와 관련된 것입니다.

공무원이 직무상 불법행위를 하거나 공공시설 등의 하자로 인하여 국민이 피해를 입은 경우에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국가가 배상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행 국가배상법에 따르면 피해를 본 국민이 바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없고 반드시 국가배상심의회를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국가배상법 제9조).

대통령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를 '결정전치주의'라고 하는데, 법원이 심리판결하기 이전에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여 신속하고 효과적인 피해구제를 하고자 도입된 제도입니다. 만일 국가배상심의회가 제대로 운영된다면 변호사 수임료를 감당하기 힘든 서민들에게는 좋은 제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의 국가배상심의회는 배상금 지급기준이 턱없이 낮은 데다가 그나마 기각 당하기 일쑤여서 국민들에게 공연히 '헛수고'만 강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998년도 통계를 보면 전국 13개 지구배상심의회가 결정을 내린 배상신청사건은 모두 902건인데, 이 가운데 국가가 피해자에게 일부라도 배상하도록 결정한 것은 127건(14.07%)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심의회가 배상 결정을 한다 해도 배상금이 너무 적어 다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1998년도의 902건 배상결정 중 피해자가 배상금에 동의하여 수령한 것은 80건(8.9%)에 불과합니다.

국가배상심의회는 불필요한 절차입니다.

대통령님, 이와 관련하여 최근 참여연대가 겪었던 황당한 일을 실례로 들고자 합니다.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는 1999년 중순경 철도청을 상대로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사연인즉슨, 1998년 12월 경 하남시에 사는 국민학교 4학년 여자아이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 갔다가 돌아오던 열차안에서 잠이 들어 창가 좌석 아래의 따뜻한 알루미늄 방열판에 다리를 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몹시 피곤한 상태이었기 때문에 기차가 출발한 후 곧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그 후에 발생하였습니다. 아이는 종아리에 3도 화상을 입은 것입니다.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에서는 모든 시설물의 안전 기준은 정상적인 성인이 아니라 아이나 장애우를 기준으로 해야 하고, 이 사건의 경우에도 겨울철 장거리 여행에서 예상될 수 있는 사고이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여 철도청이 최소한 안내방송이나 경고표시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위 가족들을 대리하여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법원에서는 이러한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다만 아이의 과실도 30% 인정하여 약 4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위 판결은 확정되었고 원고는 철도청으로부터 곧 배상금을 지급받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다 끝난 후에 뒤늦게 날아온 서류가 바로 국가배상심의회에서의 '청구기각 결정서'였습니다.

현재의 국가배상심의회는 국민을 위한 구제기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국가배상심의회의 문제점에 대해 저희는 다음의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배상심의회 구성과 운영의 적정성 내지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배상심의회는 차장검사 이하 부장검사, 검사, 판사, 의사가 위원으로 되어 있는데,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검찰이 주가 되어 일반 민사사건인 손해배상사건을 심리하는 것은 무리하다 할 것입니다. 더구나 심의 시간 역시 너무나 짧기 때문에 실질적인 검토조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서울지구배상심의회의 경우 매월 한 차례 위원들이 보고서를 토대로 책임유무와 배상 정도를 결정하는데, 1998년의 경우 평균 5분마다 1건씩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소송의 경우 6개월에서 1년 동안 심리해야 할 사건에 대하여 국가배상심의회는 피해자나 증인에 대한 소환조사도 없이 단순한 서류검토만으로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둘째, 배상심의회가 정하는 배상금액은 법원의 판결에 의한 배상금액보다 훨씬 적습니다. 정부 또한 배상금액을 법원에 의한 배상금액만큼 상향 조정하겠다는 점을 이따금 발표한 바 있는데, 그러한 정부의 발표는 배상심의회에 의한 배상금액이 법원에 의한 배상금액보다 적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행정공무원들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법리를 따지기보다는 관행에 따라 적은 금액의 배상만을 목표로 하는 습성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1998년 3월 1일부터 개정된 행정소송법에 따라 과거에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행정심판 절차가 임의적인 절차로 바뀌어 현재는 행정심판 전치주의는 폐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행정소송법과의 균형상 국가배상제도 역시 필수적인 절차로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국가배상심의회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대통령님, 현행 국가배상법상 국가배상심의회는 불필요한 기관으로서 폐지되어야 합니다.

국민권익의 최대한의 보장이라는 면에서 볼 때, 국가가 언제나 정당하고도 충분한 배상액을 결정한다는 보장이 없는 한 국가배상심의회는 존립의 정당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법에 의해 신속한 구제를 필요로 하는 국민이 있을 수 있는 만큼, 당분간 임의적인 절차로 이를 개선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것입니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배상심의회를 거치고자 하는 자는 배상심의회를 거치도록 하고, 배상심의회의 절차를 거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배상심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사법절차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이같은 임의절차로 두더라도 심의위원을 검사 위주가 아닌 민간인을 포함한 중립적인 인사들로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 이처럼 국가배상심의회를 없애거나 임의적 제도로 바꾸는 것이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닙니다. 큰 변화는 작은 개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믿음으로 대통령께 이 글을 올립니다.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이상훈 변호사,시민권리국 박원석 부장
2000/02/10 00:00 2000/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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