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호 권두언] 대통령님, 낙선운동이 나라를 살릴 겁니다.
정기간행물(종간)/개혁통신 :
2000/01/20 00:00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애서라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대통령님, 최근에 저는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책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도 읽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가 위대한 스승이라고 칭송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에서 제 눈길을 끈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다."
지금 많은 시민단체들이 왜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는지, 그 낙선운동에 대해 국민이 왜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지 아주 잘 설명해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새천년이 화려한 행사로 시작되지만, 국민이 새천년에 거는 기대는 그다지 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로 정치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 대통령님은 이제 우리 나라가 IMF 위기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상최대의 가용 외환보유고를 기록하고 있는 든든한 곳간과 IMF 이전보다도 높은 경제성장률, 다시 높아지고 있는 대외신인도, 무역흑자 등 각종 경제 지표의 화려함을 본다면 대통령님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대통령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경제를 살려놓았는데도 어쩌면 지난 정권이라면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사소한 일들 때문에 등을 돌린 민심이 야속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데 대한 국민의 실망과 섭섭함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개혁에 실패한다면 우리 사회에 앞날은 없습니다. 그러나 개혁에 앞장서야 할 정치가 오히려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주 여야가 합의 한 정치개혁안이 개혁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이라는 사실이 이런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낙선운동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역설적으로 정치권이 스스로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 운동이 법치주의의 뿌리를 흔드는 불법행위라고 정치권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입이 열 개라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선거법에 따르면 작년 4월까지 선거구를 획정지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치권은 이 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지금 거의 대부분의 정치인은 불법 사전선거운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무시하고 군 가산점을 유지시키겠다고 정치권이 발버둥치는 것도 불법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사회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 썩고 낡은 정치라는 데 이의를 다는 국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국민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사는 미뤄놓은 채 진흙탕 싸움만 벌이는 정치에 대해 국민은 이미 지쳐 있습니다. 정치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굴러가도록 그냥 모른 체 할 수는 없었습니다. 공천반대운동과 낙선운동은 '고장난 정치'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는 유권자들의 정당한 자구 노력입니다. 후보 검증은 시민의 기본권입니다. 그러나 바른 투표를 하려고 해도 유권자에게는 후보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가 없습니다. 따라서 '문제 정치인'들을 가려내 유권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시민단체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저희는 믿습니다. 따라서 대통령님이 정치개혁 협상을 다시 할 것을 요구하시고,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규제하지 말 것을 지시하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관변단체나 불법유령단체의 선거 개입을 막으려는 선거법 87조의 입법취지는 옳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조항은 올바른 선거문화를 정착시키려는 건전한 시민단체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말았습니다. 시민단체는 후보자에 대한 지지 및 반대는 물론이고 후보자의 정책평가마저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87조는 시민단체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금지함으로써 위헌적 성격을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에도 크게 어긋나는 독소조항입니다. 87조가 위헌 여지가 있다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 기본권인 참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은 국민 개개인의 양심과 정치적 지향 등의 사유로 불이익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본적 인권의 보장과 양심의 자유 등을 비롯해 참정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87조는 후보자와 그 정책에 대한 시민단체의 견해발표까지 금지함으로써 참정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또 87조는 기존 정당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어 선거운동의 균등한 기회를 보장한 헌법조항도 침해하고 있습니다.
단체의 선거활동을 금지한 선거법 87조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87조 이외에도 시민단체와 유권자의 정당한 주권행사를 막는 조항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조항들도 함께 고쳐주기를 저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행 선거법이 선거의 주체를 정당과 후보자로 한정해 주권자인 국민과 시민단체의 권리나 의무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정치개혁의 과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당장 선거구획정위원회를 구성해서 여야가 멋대로 게리맨더링식으로 정한 선거구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례대표의 수를 늘리고 직능대표나, 정치적 소수자, 신진정치세력, 진보 정당의 원내 진출이 원활하도록 진입장벽을 낮추어야 합니다. 논의 과정에서 슬그머니 실종된 비례대표의 30% 여성할당을 보장해야 합니다. 4개월로 단축된 공소시효를 다시 늘려야 합니다. 선거공영제의 확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국민세금의 정치인 지원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정치권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에 반발하고 불법이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선거법 87조를 비롯해서 국민의 주권행사를 제약하는 조항들을 없애거나 바꾸고, 지지부진한 정치개혁을 적극 추진하며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서 좋은 후보를 공천하고, 후보자들도 정정당당한 정책대결을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저희도 낙선운동 대상자 선정 기준 등에서 객관성과 중립성을 확보해서 시비의 소지를 없애는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몇 가지 법과 조항을 바꾼다고 정치개혁이 완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21세기를 끌어갈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치의 낡은 패러다임이 갈등과 대립, 돈과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다면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은 조화와 화합의 깨끗하고 맑은 열린 정치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국민이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결정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분산되고 일반 국민의 자치와 광범한 직접 참여가 보장된 참여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명령과 통제 대신 협력과 도움에 익숙하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참여민주사회를 이루어나가기 위한 법과 제도의 개선, 정치문화의 변화가 올바른 정치개혁의 방향인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에서는 우선 의회.선거.정당 등 정치과정의 실질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만 논의되고 법 조항으로만 보장되던 형식적인 시민권과 참정권이 실질적으로 행사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지금까지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되었던 반대자나 정치적 소수자의 참여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정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빠르게 파악하여 정치 과정에 반영하지 못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의회의 활성화도 또한 중요합니다.
'탄환 대신 투표로(Not Bullet, But Ballot)'-국민 정치참여의 중앙통로인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형성을 보장하고, 국민 의사를 바탕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선거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참여의 원리와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참여의 기회나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공허한 말 잔치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선거에서의 투표는 물론 정권교체가 가능한 공정한 선거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선거공영제를 실시하여야 합니다. 불법 타락선거의 여지를 없애고 정책대결의 선거 기반을 마련해 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선거공영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야가 합의해 놓은 선거공영제 확대는 투명성이 보장돼 있지 않아, 정치인들이 부담해야 할 정치자금을 국민의 세금으로 돌려놓은 것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받아들여 1인2표제를 도입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원화된 사회에서 계층과 직능대표성을 높이고 지역구 활동이 어려운 전문가나 소수 정파의 대표나 신진 세력이 쉽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를 갖고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진입장벽을 낮추고, 명부작성시 당원의 뜻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비례대표 의석수를 많이 늘려야 합니다.
정당체제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념적 성향이나 지지기반이 서로 다른 정당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정책경쟁을 통해서 정권을 담당할 수 있는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복수정당제도가 필요합니다. 소수의 보호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복수정당제도는 사실상의 일당독재를 위장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수자 보호를 기본적 이념으로 하지 않고 선거를 중심으로 한 정당들은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정당에 대한 국민의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정당구조는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또 지방자치의 활성화도 필요합니다. 국민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공동체적인 삶을 꾸러나가는 것은 민주주의 발달에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단위에 권력을 넘겨주어 중앙집권의 통치구조를 지방분
권체제로 바꾸어야 합니다.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적인 권한과 기능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지방자치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권한과 재정의 상당부분을 지방정부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선거.정당.국회와 관련된 조항만 바꾸어서는 정치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급한 정치 개혁과제는 이런 것들입니다. 부패방지법을 제정하고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는 것, 인사청문회를 도입하고 그 실시 범위를 늘리는 것, 인권법을 제정하고 독립적인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드는 것,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고 준법서약서를 폐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더 근본적인 정치개혁과제일 것입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아무쪼록 새천년의 정치가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정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2000년 1월 20일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다."
지금 많은 시민단체들이 왜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는지, 그 낙선운동에 대해 국민이 왜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지 아주 잘 설명해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새천년이 화려한 행사로 시작되지만, 국민이 새천년에 거는 기대는 그다지 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로 정치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 대통령님은 이제 우리 나라가 IMF 위기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상최대의 가용 외환보유고를 기록하고 있는 든든한 곳간과 IMF 이전보다도 높은 경제성장률, 다시 높아지고 있는 대외신인도, 무역흑자 등 각종 경제 지표의 화려함을 본다면 대통령님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대통령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경제를 살려놓았는데도 어쩌면 지난 정권이라면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사소한 일들 때문에 등을 돌린 민심이 야속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데 대한 국민의 실망과 섭섭함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개혁에 실패한다면 우리 사회에 앞날은 없습니다. 그러나 개혁에 앞장서야 할 정치가 오히려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주 여야가 합의 한 정치개혁안이 개혁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이라는 사실이 이런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낙선운동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역설적으로 정치권이 스스로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 운동이 법치주의의 뿌리를 흔드는 불법행위라고 정치권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입이 열 개라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선거법에 따르면 작년 4월까지 선거구를 획정지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치권은 이 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지금 거의 대부분의 정치인은 불법 사전선거운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무시하고 군 가산점을 유지시키겠다고 정치권이 발버둥치는 것도 불법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사회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 썩고 낡은 정치라는 데 이의를 다는 국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국민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사는 미뤄놓은 채 진흙탕 싸움만 벌이는 정치에 대해 국민은 이미 지쳐 있습니다. 정치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굴러가도록 그냥 모른 체 할 수는 없었습니다. 공천반대운동과 낙선운동은 '고장난 정치'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는 유권자들의 정당한 자구 노력입니다. 후보 검증은 시민의 기본권입니다. 그러나 바른 투표를 하려고 해도 유권자에게는 후보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가 없습니다. 따라서 '문제 정치인'들을 가려내 유권자에게 알려주는 것은 시민단체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저희는 믿습니다. 따라서 대통령님이 정치개혁 협상을 다시 할 것을 요구하시고,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규제하지 말 것을 지시하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관변단체나 불법유령단체의 선거 개입을 막으려는 선거법 87조의 입법취지는 옳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조항은 올바른 선거문화를 정착시키려는 건전한 시민단체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말았습니다. 시민단체는 후보자에 대한 지지 및 반대는 물론이고 후보자의 정책평가마저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87조는 시민단체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금지함으로써 위헌적 성격을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에도 크게 어긋나는 독소조항입니다. 87조가 위헌 여지가 있다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 기본권인 참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은 국민 개개인의 양심과 정치적 지향 등의 사유로 불이익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본적 인권의 보장과 양심의 자유 등을 비롯해 참정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87조는 후보자와 그 정책에 대한 시민단체의 견해발표까지 금지함으로써 참정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또 87조는 기존 정당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어 선거운동의 균등한 기회를 보장한 헌법조항도 침해하고 있습니다.
단체의 선거활동을 금지한 선거법 87조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87조 이외에도 시민단체와 유권자의 정당한 주권행사를 막는 조항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조항들도 함께 고쳐주기를 저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행 선거법이 선거의 주체를 정당과 후보자로 한정해 주권자인 국민과 시민단체의 권리나 의무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정치개혁의 과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당장 선거구획정위원회를 구성해서 여야가 멋대로 게리맨더링식으로 정한 선거구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례대표의 수를 늘리고 직능대표나, 정치적 소수자, 신진정치세력, 진보 정당의 원내 진출이 원활하도록 진입장벽을 낮추어야 합니다. 논의 과정에서 슬그머니 실종된 비례대표의 30% 여성할당을 보장해야 합니다. 4개월로 단축된 공소시효를 다시 늘려야 합니다. 선거공영제의 확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국민세금의 정치인 지원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정치권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에 반발하고 불법이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선거법 87조를 비롯해서 국민의 주권행사를 제약하는 조항들을 없애거나 바꾸고, 지지부진한 정치개혁을 적극 추진하며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서 좋은 후보를 공천하고, 후보자들도 정정당당한 정책대결을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저희도 낙선운동 대상자 선정 기준 등에서 객관성과 중립성을 확보해서 시비의 소지를 없애는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몇 가지 법과 조항을 바꾼다고 정치개혁이 완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21세기를 끌어갈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치의 낡은 패러다임이 갈등과 대립, 돈과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다면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은 조화와 화합의 깨끗하고 맑은 열린 정치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국민이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결정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분산되고 일반 국민의 자치와 광범한 직접 참여가 보장된 참여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명령과 통제 대신 협력과 도움에 익숙하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참여민주사회를 이루어나가기 위한 법과 제도의 개선, 정치문화의 변화가 올바른 정치개혁의 방향인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에서는 우선 의회.선거.정당 등 정치과정의 실질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만 논의되고 법 조항으로만 보장되던 형식적인 시민권과 참정권이 실질적으로 행사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지금까지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되었던 반대자나 정치적 소수자의 참여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정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빠르게 파악하여 정치 과정에 반영하지 못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의회의 활성화도 또한 중요합니다.
'탄환 대신 투표로(Not Bullet, But Ballot)'-국민 정치참여의 중앙통로인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형성을 보장하고, 국민 의사를 바탕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선거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참여의 원리와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참여의 기회나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공허한 말 잔치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선거에서의 투표는 물론 정권교체가 가능한 공정한 선거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선거공영제를 실시하여야 합니다. 불법 타락선거의 여지를 없애고 정책대결의 선거 기반을 마련해 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선거공영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야가 합의해 놓은 선거공영제 확대는 투명성이 보장돼 있지 않아, 정치인들이 부담해야 할 정치자금을 국민의 세금으로 돌려놓은 것밖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받아들여 1인2표제를 도입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원화된 사회에서 계층과 직능대표성을 높이고 지역구 활동이 어려운 전문가나 소수 정파의 대표나 신진 세력이 쉽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를 갖고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진입장벽을 낮추고, 명부작성시 당원의 뜻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비례대표 의석수를 많이 늘려야 합니다.
정당체제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념적 성향이나 지지기반이 서로 다른 정당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정책경쟁을 통해서 정권을 담당할 수 있는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복수정당제도가 필요합니다. 소수의 보호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복수정당제도는 사실상의 일당독재를 위장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수자 보호를 기본적 이념으로 하지 않고 선거를 중심으로 한 정당들은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정당에 대한 국민의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정당구조는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또 지방자치의 활성화도 필요합니다. 국민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공동체적인 삶을 꾸러나가는 것은 민주주의 발달에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단위에 권력을 넘겨주어 중앙집권의 통치구조를 지방분
권체제로 바꾸어야 합니다.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적인 권한과 기능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지방자치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권한과 재정의 상당부분을 지방정부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선거.정당.국회와 관련된 조항만 바꾸어서는 정치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급한 정치 개혁과제는 이런 것들입니다. 부패방지법을 제정하고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는 것, 인사청문회를 도입하고 그 실시 범위를 늘리는 것, 인권법을 제정하고 독립적인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드는 것,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고 준법서약서를 폐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더 근본적인 정치개혁과제일 것입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아무쪼록 새천년의 정치가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정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2000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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