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호 쓴소리] 판공비도 국민의 세금이다
정기간행물(종간)/개혁통신 :
1999/12/16 00:00
- 이 당연한 말씀을 드려야 하는 우리의 고민
참여연대는 지난해 11월 서울시장의 판공비 사용내역과 그 증빙서류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한 이후, 서울시내 25개 구청장과 중앙부처를 상대로 판공비 공개운동을 벌여 왔습니다. 판공비란 예산서상으로는 '업무추진비'라고 분류되어 있는 돈입니다. 이 판공비도 당연히 국민이 낸 세금으로부터 편성되는 예산항목중의 일부이고, 공적인 용도로 적정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돈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공직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공ㆍ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 판공비를 자신의 '쌈짓돈'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자리잡아 왔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잘못된 관행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그러한 잘못을 감추려는 자세가 공직사회 내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직사회의 잘못된 풍토와 자세는 시민들의 판공비 관련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지방자치단체들이 비공개결정을 남발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참여연대는 판공비 정보공개운동을 시작한 이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서울시와 서울시내 25개 구청은 참여연대의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비공개결정을 내렸고, 결국 소송이라는 법적 절차를 밟게 하였습니다. 참여연대는 서울시를 상대로 현재 1심 소송을 진행 중에 있고, 곧 서울시내 25개구청중 몇개 구청을 뽑아서 소송을 제기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소송이라는 절차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므로, 이런 문제로 소송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ㆍ경제적으로 비능률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사실 판공비의 사용내역과 증빙서류가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본에서 이미 법적으로 검증된 바 있습니다.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을 상대로 지역주민들이 제기한 정보공개소송에서 일본의 판례들은 판공비의 사용일시, 장소, 금액, 참석자수, 모임의 목적 등의 기본적인 사항뿐만 아니라, 만난 상대방이 공무원일 경우에는 그 직책까지도 공개해야 함을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와 비슷한
법제를 취하고 있는 일본에서 이미 법원의 판례를 통해 정리된 문제를 우리나라의 법원에서 또다시 소송을 통해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국가적인 낭비인 것입니다. 시민단체들은 한정된 인력과 재원으로 소송까지 진행해야 하고, 소송에 응소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변호사비용을 낭비하게 되며, 담당공무원은 소송관련 업무로 인해 다른 업무를 보지 못하는 폐해도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송들을 재판해야 하는 법원의 부담도 만만치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관료들의 폐쇄주의로 인해 초래되는 국가적인 낭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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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지난 11월 25일 서울시는 서울시장이 사용한 판공비를 공개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서울시장의 판공비 공개는 초유의 일로서 그 자체는 용기있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시의 공개는 제대로 된 공개가 아니라 '생색내기'식 축소공개로서 오히려 판공비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우선 이번에 공개한 판공비 규모는 서울시예산서상으로 책정된 전체 판공비의 10분의1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울시 예산서상으로 기관운영업무추진비가 10억여원, 시책추진업무추진비가 59억여원 책정되어 있지만, 이번에 공개된 범위는 그중 5억2천6백40만원이 책정되어 있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서울시는 시장이 사용한 판공비의 액수가 4억9천3백35만5천원이라고 밝혔지만, 시장이 사용한 실제 판공비 액수는 그보다도 훨씬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이번에 공개되지 않은 서울시 총무과의 시책추진업무추진비나 서울시 각 실,국의 시책추진업무추진비중에서 서울시장이 사용하는 부분이 상당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울시는 고건 시장이 취임한 이후인 1998년 7월 이후의 판공비만 공개했는데, 그 이전 분에 대해서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보공개청구권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인정된 권리인데, 행정기관이 자의적으로 어떤 부분은 공개하고 어떤 부분은 공개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국민의 알권리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서울시는 그나마 자신들이 공개하겠다고 밝힌 부분에 대해서도 판공비를 사용한 모임의 구체적인 목적, 참석인원수 등의 기본적인 사항마저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임의 목적을 밝히지 않는 것은 '과연 판공비를 공무에 쓴 것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서울시는 시장이 만나거나 돈을 지급한 상대방의 이름을 일률적으로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시장이 만나거나 돈을 지급한 상대방이 공무원인 경우에는 그 직무상 만난 것이므로 해당 공무원의 직책은 프라이버시의 보호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공무원인 경우에는 그 직책까지 모두 공개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도 서울시는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에 비해서는 나은 편입니다. 서울시는 자신이 공개하겠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신용카드 매출전표 등의 영수증 사본을 열람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금으로 지출한 각종 격려금이나 성금, 후원금에 대해서는 증빙서류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광역지방자치단체들은 아예 영수증 사본을 공개하지 않고 자신들이 임의로 작성한 서류를 통해 액수 정도만을 공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서울시내 각 구청은 여전히 판공비 사용내역과 증빙서류를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이렇게 된 데에는 행정자치부의 책임도 큽니다. 현재 행정자치부는 각 지방자치단체에 예산편성지침과 예산집행지침을 내려주고 있으며, 정보공개법의 주무부서로서 정보공개에 대한 지도ㆍ감독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행정자치부는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시민들의 판공비 공개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행정자치부에서 정당한 법률해석에 의한 지침만 내려주어도 문제가 이렇게 어려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참여연대는 지난 12월 1일 중앙부처중에서 기획예산처, 재정경제부, 행정자치부에 대해 판공비 사용내역과 증빙서류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정보공개청구를 하였습니다. 이번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부처들은 모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살림을 맡고 있는 부처들입니다. 이 부처들마저 정보공개를 거부한다면, 예산집행의 투명성을 확보하기는 요원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금융기관구조조정과 실업대책으로 인해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부채문제는 지방자치단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러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부채는 결국 납세자의 부담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로 되고 있습니다. 예산낭비를 막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그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예산집행과 관련한 사항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산집행의 투명성이 확보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예산낭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산집행과 관련된 사항이 상세하게 공개되고, 그를 통해 시민들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면, 어느 공무원이 감히 예산을 낭비적으로 사용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납세자는 당연히 자신이 낸 세금이 어떻게 쓰여지는지를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납세자의 권리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참여민주주의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판공비 공개문제가 중앙부처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대통령께서 결단을 내릴 수도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범정부 차원에서 예산집행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상징적인 조치로 모든 기관의 판공비를 국민 앞에 공개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부정부패 근절'과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의 구현'은 대통령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강조해온 과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판공비 문제는 정부가 이러한 과제들을 추진할 개혁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시금석이 되는 문제입니다. 물론 일부 관료들의 저항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료들의 저항보다는 우리나라의 살림을 지탱해주는 대다수 국민들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999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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