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박주선 비서관은 신동아로부터만 로비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중이던 지난 9월 3일, 한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현대측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문제의 발언은“주가조작사건은 대개 주가가 최고치를 기록할 때 파는 것이 일반적이나 현대의 경우는 시세차익을 거두지는 않았다", "현대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이번 사건의 처리에 경제문제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현대에서 공식 발표한 소위 '현대의 입장' 이라는 문건을 그대로 베껴 놓은 듯한 이 발언에 대해서 서울지검 검사들조차 "청와대가 수사중인 사건의 피의자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청와대가 검찰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며 강력히 반발하였다고 합니다.

대통령님, 이 문제의 발언을 한 사람이 바로 박주선 법무비서관입니다. 최근 밝혀진 것처럼 신동아의 집중로비대상이었던 그가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에 대해서도 검찰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사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한 현대측의 총력로비와 사건축소 의혹은 지난 4월 7일 금감원이 이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할 당시부터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재판이 진행된 최근까지 끊임 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먼저, 금융감독원은 작년 8월 25일 증권거래소가 현대전자 주가조작 혐의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지 5개월여가 지난 2월 1일에야 이 사건 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반도체 빅딜을 성사시키기 위한 압박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금감위가 의도적으로 시기를 조정한 것이라는 추측과 더불어 현대측이 강력한 로비를 전개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4월 7일 금감원은 이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현대중공업 및 현대상선 대표이사만을 수사의뢰하고 현대증권에 대해서는 담당직원에게만 문책을 요구하는 소극적인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으로부터 수천억원이 동원되었고, 현대증권이 이 시세조종 주문을 맡아서 처리하였으며, 정주영 명예회장을 비롯한 정씨 일가와 현대계열사들이 주가가 폭등한 상태에서 주식을 대량 매각함으로써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증권과 이익치 회장, 정씨일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구나 4월 21일 개최된 증권선물위원회에는 정씨일가 관련 부분은 아예 심의자료로 제출되지도 않았습니다.

현대측은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부터 총력로비를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대는 막강한 로비스트들을 동원하여 검찰 고위층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고 합니다. 현대측은 특히 박철재 현대증권 상무가 소환된 직후 이익치 회장이 잠적한 10여일 동안 집중적인 로비를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씨일가 형제들이 모두 나서 이익치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권과 청와대에까지 강력한 로비를 펼쳤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현대측 인사의 신당참여와 관련하여 여권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대통령님, 이러한 현대의 로비공세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청와대 비서진과 정치권의 검찰에 대한 외압 행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박주선 법무비서관 이외에 이기호 경제수석도 "검찰이 금융감독원의 고발자료는 물론 현대측의 소명자료를 충분히 검토해 결정하게 될 것이니 예단하지 말라”고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하였고, 여권인사들도 담당수사팀에 전화를 걸어 "이익치 회장을 불구속하거나 일단 내보내주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이익치 회장에 대한 구속 여부를 결정할 때에도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이회장 사법처리 문제를 좀더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내용으로 검찰 고위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청와대의 외압으로 의해 이익치 회장의 사법처리 문제는 하룻밤 사이에 구속-불구속을 오가며 표류하다가 일선 검사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 구속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이미 세간에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현대측의 총력로비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검찰은 정씨일가에 대한 소환조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수사가 종결되기도 않은 상황에서 '이익치 회장이 최종책임자' 라는 성급한 결론을 언론에 흘리면서 정씨일가에 대해서는 손대지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은 9월 3일 박주선 비서관의 문제발언이 있은 직후입니다. 그리고 정몽헌 회장을 1차례 소환 조사하는 것으로 정씨일가에 대한 수사는 마무리되었고, 현대전자 주가조작은 이익치 회장의 단독범죄라는 수사결과가 발표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측의 집요한 로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위헌제청신청을 검토할 정도로 사법처리에 강력히 반발했던 이익치 회장이 계획했던 보석신청도 취소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도 않은 채 재판을 신속히 진행시켰던 것은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재판 초기부터 집행유예로 풀려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결국 사상최대규모의 주가조작 사건의 주범인 이익치 회장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의혹투성이입니다.

지난 95년 모제약회사 주가조작으로 구속된 펀드매니저가 실형 5년을 선고받았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무려 9개 계열사들이 관련되고 2,200억원이 동원되어 8개월동안 진행된 사상 유례 없는 초대형 주가조작 범죄자에게 고작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2의 최순영 사건'

대통령님, 참여연대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순영 회장이 구속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까. 신동아측은 신문광고까지 내어 결백을 주장하고 최순영 회장의 외화도피 혐의를 폭로한 참여연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까지 했습니다만, 결국 최순영 회장의 범죄사실은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에도 당시 수사를 담당한 서울지검 특수1부에서 사법처리방침을 결정하였음에도 최순영 회장측의 정치권 및 검찰고위간부에 대한 집요한 로비로 인해 사법처리가 지연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여론에 밀려 최순영 회장은 구속되었습니다. 그래도 신동아측의 광범위한 로비의혹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1년여가 지난 지금에 와서 특검수사를 통해 그 일단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도 곳곳에서 로비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금감원은 왜 현대증권과 이익치 회장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 현대가 조직한 '로비그룹'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로비를 벌였는지, 검찰소환 직전 10여일간 잠적했던 이익치 회장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는지, 박주선 비서관과 이기호 경제수석은 왜 검찰과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현대측을 옹호했는지, 여권인사 중에 누가 무슨 이유로 검찰에 압력을 행사하였는지, 왜 정씨일가에 대한 수사가 미진한 채 수사가 종결되었는지 등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 남김없이 파헤쳐지지 않는다면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님,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을 둘러싼 무성한 로비 의혹에 대해서도 철저히 수사하고 혹여 로비로 인해 수사가 왜곡된 것이 있다면 재수사를 진행하도록 해주십시오. 만일 검찰이 현대측의 총로비에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수사를 진행하였고, 사법부도 소신껏 판결을 내린 것으로 밝혀진다면 국민들은 더 이상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총로비 공세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국민들은 검찰과 사법부를 신뢰하지 못한 채 부패공화국에 태어난 신세를 한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님, 저희는 이번 옷로비 사건을 통해 진실은 끝내 밝혀지고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확인하였습니다. 물론 진실을 밝혀내기까지 1년여에 걸친 싸움을 해오면서 협박도 당하고 명예훼손으로 피소될 지경에 처하기도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오직 죄 지은 자는 응당한 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평범한 상식과 이 평범한 원칙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참여연대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대통령님, 20세기의 마지막해를 뒤흔들었던 초대형 범죄의 실체와 이 범죄사실을 가리기 위해 벌어진 로비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는지가 대통령님의 결단으로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

1999년 12월 2일

참여연대 정책부실장 이승희
1999/12/02 00:00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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