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호 권두언] 무너지고 있는 기대를 세워주세요
정기간행물(종간)/개혁통신 :
2000/08/10 00:00
이 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언제 수그러들까요. 휴가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위기상황이 마치 더위로 인한 짜증인양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더위야 제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철이 바뀌면 물러나기 마련이지만, 그 위에서 우리를 질식시키려는 듯 얽히고 설킨 난제들은 세월이 해결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풀어야지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진두에 서서 호소를 하고 이끌고 하셔야지요. 의약분업 문제건 현대그룹 문제건, 또 새로이 정비된 내각의 운용과 국회정상화 과제건 말입니다.
의약분업제도의 파행으로 인한 국민적 충격은 이미 아물기 어려운 상처로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현대그룹 문제를 중심으로 한 재벌 및 경제개혁의 과제도 국민들을 불안의 구석으로 슬슬 몰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일부 장관을 단순히 다른 사람으로 바꿨다는 것은 집권 여당이 갖는 정치적 의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번에 단행된 개각은 그 시점까지 부과된 정부의 과제를 무난히 수행할 희망의 도구로 제시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오히려 개각으로 구성된 새로운 내각 자체가 또 하나의 우려스런 과제로 덧붙여졌을 뿐입니다.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혹 Ep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형국에 처해진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주요 부처의 개각을 취소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자고는 싶습니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결국,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헌신적으로 국사에 임해주고, 대통령께서 보다 신중하고 적극적으로 통할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수많은 국민들은 대통령께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대통령께서 베를린을 방문하였을 때의 뒷얘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독일에는 60년대 말부터 파견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숱한 어려움을 딛고 이제 독일 사회에 자리를 잡았지요.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민주화와 통일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난 날 군사독재자들이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휴가를 내어 독일 전역에서 모여들어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께서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땐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지난번 대통령께서 베를린을 방문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역시 그들은 모였습니다. 이번에는 반대시위가 아니라 환영과 지지의 뜻을 알리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방청권을 얻은 몇 사람은 여러 뜻을 모아 질문할 내용까지 정리해서 강연이 열리는 자유대학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강연이 끝난 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대통령께 질문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실망은 했지만 섭섭함을 그 자리에서 표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사람은, 과거 '김대중 구명운동' 집회에서 사용했던 인쇄물을 아직 보관하고 있다 고이 접어서 가져갔습니다. 강연을 마친 대통령께서 걸어나가는 길목에 서 있다 그것을 전달하려고 끄집어냈습니다. 순간 재빠른 경호원이 빼앗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유인물이 대통령께 전달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 이야기라도 대통령께서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화는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간호사 출신의 김씨가 오래도록 보관하고 있던 그 종이조각을 대통령의 베를린방문 기념으로 전하고자 했던 순수한 행동은, 바로 대통령에 대해 아직 남아 있는 국민의 희망과 기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전해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국민의 실망과 좌절의 근원이 되는 정치현실입니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는지요. 무더운 여름도 이제 그 절정을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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