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반대를 뚫고 '서리'라는 꼬리를 떼내는 데 성공한 신임 국무총리가 국가보안법 개정을 말했습니다. 말을 꺼낸 사람이 누구건, 묵은 과제이면서도 언제나 급선무처럼 우리를 짓누르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손질'을 나서서 하겠다는 데 이의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하필이면 '폐지'도 아니고, 조금 양보하여 '개폐'도 아니고, 반드시 '개정'이어야 하는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자민련에서 온 국무총리도 개정을 들먹이고, 한나라당에선 일부 의원들이 당론을 거스르며 폐지를 주장하는 걸 보니, 이제 정말 국가보안법의 여명(餘命)도 얼마 되지 않겠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최근 해외에 머물고 있는 한 학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무망한 것이 아닌가 아찔해지기도 합니다. 바로 송두율 교수 문제를 말합니다.

독일 뮌스터 대학에 있는 송교수는 33년째 모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생으로 가서 교수가 되도록 김포공항 구경을 못하고 있습니다. 20대 초반 이국으로 날아가 청춘을 완전히 보내도록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의 냄새를 그리워만 하고 있습니다. 벌써 몇차례 온다고 했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여행 가방을 꾸렸다가 다시 풀어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비행기 표까지 들고 집을 나서기 직전에 포기했다는군요.

물론 송교수의 귀국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국가보안법의 존재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는 국정원에서 들고나온 준법서약이란 제도 아닌 제도 때문인데, 아마도 법률상 근거도 없는 것을 강요하는 걸 보니 그 종이 한 장을 국가의 자존심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그 착각을 바로잡아 줄 사람은 국가의 원수인 대통령이 아닌가 합니다. "국정원 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여러분들, 안심하십시오. 국가는 개인을 위해 있는 것이지 개인과 자존심 대결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입니다.

준법서약제를 두고 양심의 자유까지 끄집어내며 새삼 인권론을 펼치고 싶진 않습니다. 송교수의 이북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법률이냐 관행이냐 행정처분이냐, 송교수를 못들어오게 하는 주체가 국가냐 정부냐 국정원이냐, 송교수가 이 땅을 밟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범죄 때문이냐 사상 때문이냐 체면 때문이냐... 대략 이런 정도의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국정원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황장엽 씨가 제기한 '북한 권력 서열 지위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송두율의 동일성 여부' 때문인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정부의 태도는 석연치가 않습니다. 송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의 범죄자라면 준법서약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국정원에서 송교수를 수사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어서 입국이 문제되는 것이라면 준법서약을 하더라도 체포하여 수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준법서약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정도라면 굳이 건전한 학자의 양심과 정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지난 정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윤이상씨가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단 부족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송교수도 윤이상 선생처럼 일본에서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멀리 대한민국을 바라보다 돌아서야 할까요.

국가보안법은 어차피 폐지됩니다. 그 전에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미루어서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국정원의 그런 태도와 대통령의 심중이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2000/07/06 00:00 200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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