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본격적인 삼복더위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아스팔트의 열기를 그대로 안고 살아야 하는 도시의 여름은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7, 8월의 땡볕에 익어가는 풍요로운 들판을 위안삼아 견뎌보려 합니다.

2000년 7월 1일은 저에게 아주 의미있는 날이었습니다. 몇차례 좌절과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10여년 이상 싸워오던 의료보험조직 통합이 예정되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가능할까 싶었던 의약분업이 시행되는 날이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출범하는 날이 7월 1일입니다. 그동안 보건의료 개혁의 쌓였던 과제가 하나씩 풀려가는 날이지요. 나름대로 우리나라의 열악한 보건복지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던 저로서는 2000년 새로운 세기의 기쁨을 여기서 찾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비단 저만의 기쁨이 아니지요. 야당 시절부터 꾸준히 저희와 함께 의보통합을 주장하셨고 개혁을 추진하셨던 대통령님의 기쁨이고, 국민모두의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저는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시위를 하러 마포에 가야 했습니다. 깃발을 챙기고 피켓을 들고 업무에 바쁜 간사들과 회원들을 모시고 도착한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은 뜻밖의 모습이었습니다. 80년대나 볼 수 있었던 살벌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공단 출입구는 무장을 한 전경들이 겹겹이 가로 막고 있었고, 민원인들(사실 공단의 주인이지요)은 전경들에게 용무를 설명하고 나서야 출입을 허락받아 쪽문으로 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건물 앞에서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심사평가원장의 잘못된 임명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보험노조원 한 분이 지난 1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던 때의 상황을 진술하셨습니다. 참으로 암담했고, 한동안 시간개념이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지금이 2000년 7월 맞나요?

어제 집회는 서재희 초대심사평가원장의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자리였습니다. 국민건강보험법 시행과 함께 출범한 심사평가원은 진료비의 심사와 평가를 담당하는 기구입니다. 그동안 진료비 지불의 주체인 보험자가 진료의 적절성보다는 보험재정의 절감이라는 관점에서 진료비 심사를 해왔던 바, 의료계는 오래전부터 독립적인 심사기구의 설립을 주장해왔습니다. 더불어 전문적 심사와 평가 과정에서 적절치 못한 진료행위를 가리고, 과잉진료를 차단하며, 각종 인센티브나 불이익을 통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유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시민사회단체들도 독립적인 심사기구의 설립을 찬성하였습니다. 심사평가원은 연간 3억 건의 진료를 심사하여 무려 10조원의 진료비 지불을 결정하는 기구로서 본부 및 6개 지부와 1,098명의 직원을 두고 있습니다.

심사평가원의 생명은 공정성과 전문성입니다. 이는 의료계를 위해서도 국민들을 위해서도 절대적입니다. 전문적 소견 없는 삭감위주의 심사는 의료보험에 대한 의료계의 불신을 양산했고 이로 인해 의료보험의 통제를 벗어난 진료를 추구하는 왜곡된 진료행태를 낳았습니다. 또 의료계의 주장만을 들어주다가는 늘어가는 진료비를 보험재정이 감당할 수가 없게 되고 결국 국민들의 보험료 부담이 증가하게 됩니다. 따라서, 심사평가원은 양자가 동의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하고, 더불어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유도할 수 있는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재희원장은 이 두가지 조건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서재희 원장은 의협의 추천을 받은 개업의사입니다. 20여 년간 개인병원을 운영한 경험 외에 별다른 행정경험도 없습니다. 의학박사라고는 하나 진료비 심사업무나 의료의 질관리에는 문외한입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런 분을 초대 심사평가원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기반이 잘 다져진 조직도 관리가 어려운데 하물며 새로운 틀을 짜야하는 어려운 자리를 행정능력이 검증도 안된 분에게 맡기고 국민들이 안심할 수가 있나요? 더구나 이분은 지난 의료계 파업 때 지지의사를 표명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정부의 의료개혁 정책에도 반대하는 분이 아닙니까? 이분이 누구의 편에서 심사평가원을 이끌어 나가실지 너무도 분명합니다. 저는 굳이 이 자리에서 이분이 대통령님의 친인척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습니다. '설마 그랬을라고' 하는, 아직은 대통령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저의 믿음에 금이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네요.

더불어, 원장 뿐만아니라 심사평가원과 관련된 인사에 헛점이 많습니다. 그중 상임이사로 선임된 양명생·양영화씨는 과거 복지부 관료시절, 의료보험 통합에 반대해 왔던 인물들입니다. 의료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제도적인 개선은 하지 않고 급여와 수가체계를 왜곡시켜온 장본인들입니다. 더구나 양명생씨는 얼마전까지 병원협회의 연구위원으로 재직했습니다. 결국, 원장은 의협의, 상임이사는 병협의 지원을 받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이들이 다시 의료보험을 왜곡시켜온 것처럼 심사평가원의 기능을 불구로 만드는 것을 더이상 지켜볼 수 만은 없습니다.

대통령님,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인사는 만사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그것의 성공은 사람의 손에 달렸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어제 국회에 추경예산안을 제출하시면서 다시 한 번 생산적 복지를 강조하셨고, 지역의료보험 재정지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무도 다행한 일이고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재정지원도 중요하지만 바가지가 새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라도 심사평가원장과 잘못된 상임이사의 임명을 철회해 주십시오. 그리고 정말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봐 주세요. 힘들게 의료개혁을 여기까지 밀고 오신만큼, 마지막에 잘못된 인사로 인해 그 빛이 바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십시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이은경
2000/07/06 00:00 200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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