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저는 의과대학 교수이며 의료보험 개혁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최근 대통령 직속의 규제개혁위원회가 보건의료 문제에 대해 내린 결정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지난 5월 17일 규제개혁위원회는 올해 말 까지 민간의료보험 도입에 대한 '구체적 시행계획'을 보고하도록 보건복지부에 권고하는 결의를 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저는 제 눈과 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올해 7월이면 20여 년간의 논란의 종지부를 찍고 국민건강보험이 출범을 하게 됩니다. 국민건강보험은 대통령님의 대통령선거 공약이기도 했지만, 시민사회단체가 10여 년간 투쟁하여 얻은 결실로 형평성, 효율성, 사회적 연대라는 점에서 우리 나라 의료보장제도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정책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민간의료보험에 대한 논의를 할 시기가 아니라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에 관해 중지를 모아야 할 시기입니다.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이 우리 나라 의료보험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여러 시민단체 대표들은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규제개혁위원회의 실무자와 위원장을 면담하였습니다. 이 면담과정에서 저희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규제개혁위원회의 실무자와 위원장은 의료보험과 민간의료보험의 현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지금 민간의료보험이 시장에 진입하는 데 규제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 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일부 민간보험이, 보험에 적용되지 않는 진료비를 지원해 주는 보험상품을 아무런 규제 없이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건지를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라고 권고한 당사자들이 전혀 이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규제개혁위원회는 민간의료보험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서 민간의료보험문제를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려는 오만한 의도를 가진 결정으로 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5월 26일 규제개혁위원회는 국민건강보험법 시행규칙을 심의하면서, 보건복지부가 제안한 의료전달체계 강화 방안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한 위원은 "농촌지역에 안과가 없는데 3차 병원에서 진료를 직접 받지 못하게 하면 소비자가 불편하다"는 주장을 하였고, 또 다른 위원은 "개인 안과의원에서는 1주일 동안 매일 진료를 받았는데도 차도가 없었는데, 대학병원 안과에서는 한번만에 진료를 받고 좋아졌다"는 등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의료전달체계를 없애서 모든 국민이 3차 병원에서 직접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환자가 의원 대신 병원을 직접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보건정책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가벼운 환자가 3차 병원에 몰리면 비용도 많이 들고, 진짜 진료를 받아야 할 중한 환자가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이런 '규제'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이를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고,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도 이런 결정을 했다면 이는 오만한 것입니다.

규제개혁위원회의 관점을 따른다면, 올해 7월 1일부터 도입 예정인 의약분업제도는 환자가 병원외래에서 약을 조제 받을 수 없도록 '규제'를 하고 있으며, 의사는 처방과 조제를 동시에 할 수 없고, 약사는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조제를 하도록 '규제'를 하고 있습니다. 규제개혁위원회의 논리대로 한다면 이런 '규제'도 마땅히 '개혁'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의사에게만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독점적 권한을 부여하고, 면허가 없는 사람은 환자를 치료할 수 없도록 한 것도 '규제'이며, 그린벨트에 건축을 금지하는 것도 '규제'이므로 마땅히 '개혁'되어야 할 것입니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이러한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위원의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규제개혁위원회는 6명의 정부측 위원과 12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부측 위원 6인 중 경제부처 장관이 3명(재경부, 산자부, 공정위)이고 민간위원 중 경제 및 경영 관련 인사는 6명입니다. 그 외에 법조계 2인, 행정 및 회계 인사가 2명, 언론계 2명, 소비자 대표가 1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제 및 경영 관련 인사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런 위원 구성으로 어떻게 보건복지에 관한 전문적 내용을 '개혁'할 수 있겠습니까? 보건문제에 대한 이들의 판단은 그야말로 '상식'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상식'은 중요하지만, 상식만으로 문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위원의 대표성에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노동자나 농민 또는 시민사회단체 대표는 거의 없습니다. 경영관련 단체 대표는 3명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내리는 결정이 어떤 입장에서 이루어질 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노동자나 농민, 시민단체 대표가 위원회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민간의료보험 도입과 같은 예민하고 엄청난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쉽게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제개혁위원회가 국민적 대표성을 가질 수 있도록 새롭게 구성되어야 합니다.

규제개혁위원회가 모든 문제를 규제의 완화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이는 우리 나라 사회정책에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할 것입니다. 특히 규제를 주요한 정책수단으로 사용하는 보건복지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보건복지분야에서만큼은 규제개혁위원회의 역할을 대폭 축소하여야 합니다. 현재 규제개혁위원회는 모든 법률은 물론, 시행령, 시행규칙, 심지어 고시에 대해서까지도 시정을 권고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이 권고이지 실제로는 결정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이런 초법적 기능을 가지도록 해서는 곤란합니다.

규제개혁위원회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만이 우리 나라 보건복지를 망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건강연대 의료보험대책위원장, 울산의대 교수 조홍준
2000/06/08 00:00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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