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깊은 겨울입니다.

IMF 국가위기 속에서 안정된 나라 살림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고 계심을 온 국민이 알고 있습니다만 몽매한 소리 한가지 드려야겠습니다.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우리 영화를 아시지요? 한가롭게 왠 영화이야기냐고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예사로운 영화가 아닙니다. 한 작가주의 감독이 우리영화제작 환경의 지난한 현실속에서 황금만능의 경제논리를 뒤로 하고 오로지 영상예술을 향한 혼을 불태운 끝에 3년만에 완성시킨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발표 즉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프랑스 벨포르 영화제를 비롯하여 일본 도쿄, 그리스 데살로니케, 미국 하와이 영화제 등 세계의 유명영화제의 각종 상을 수상하였으며, 한 국 영화의 미학적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한편의 영화가 지닌 경제적 가치도 물론 대단히 높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영화속에 담긴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정서와 역사, 그리고 작가의 가치관을 매 장면마다 높은 수준의 영상언어로 표현하여 세계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이 더욱 의미심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시절]의 제작 뒷얘기가 무척 많은데, 실감나는 완벽한 식사장면 한 컷을 위하여 무려 26번의 반복 촬영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영화의 발전을 위해 오늘도 묵묵히 음지에서 애쓰는 많은 영화인들의 상징적인 모습으로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런 영화와 영화인들이 있어서인지 영화관람객의 수와 수준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지난 97년 영화를 본 사람은 연인원이 무려 4천 8백만명이나 되고, 입장 수입도 2500억원을 넘어섰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이같은 결과를 보면 당장의 산술적 의미를 떠나 우리는 분명 영화산업의 중요성과 그 잠재적 가능성이 날로 증대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2월초 어느 영화전문지 기사가 생각납니다. "한국영화계 천재일 우의 기회!" "영상산업 분홍빛 청사진 펼쳐....."등등. 이같은 기사들은

대통령님께서 대선공약으로 우리 영화산업 육성책마련을 약속하신 바 있고 이어서 국민의 정부가 3대 기간산업의 하나로 영상산업을 설정한 것에 따른 반응이었습니다. 영화인들도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은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였던가"를 토로하며 많은 기대속에 나름대로의 준비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IMF 상황 속에서 제작편수는 전년도에 비해 다소 줄었지만 관객은 오히려 늘어났으며, 편당 관객 수에 있어서도 외국 영화에 비교해 볼 때 우리영화 관람객 수가 2배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또한 전국 수십개 대학의 영상관련 학과에는 해마다 젊은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어 영화산업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날벼락입니까?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 영화산업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스크린 쿼터제 축소 얘기가 거짓말처럼 술술 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외교통상부의 한미통상교섭 본부장의 입에서 현재의 국산영화 의무상영일 수를 줄이거나 아예 폐지까지도 고려하는 듯한 믿지 못할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영화관련 종사자들은 배신감과 절망감 속에 벌써 한 달 넘게 농성을 계속하며 대통령님의 현명하신 조처를 충혈된 눈으로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 영화시장의 70%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요구사항과 기본태도는 이번 교섭을 기점으로 향후 한국의 영상산업 전반, 즉 방송을 비롯한 시청각 예술분야와 통신산업까지 넘보는 장기적이고 패권적인 전략을 갖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88년 우리 전자제품에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한 끝에 미국영화 직배의 길을 뚫은 뒤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11억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약3천4백억원의 흥행수익을 올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희가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일부 경제 관료의 영상문화에 대한 편견과 산술적인 단순경제논리가 몰고 올 수도 있는 우리나라 영상 산업 전반에 대한 심대한 타격과 악영향입니다. 한덕수 교섭본부장은 영화산업을 자동차산업에 비유하며 개방해도 상관없다는 언사를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 터질 일입니다. 도대체 그분은 어느나라 통상교섭본부장인가요?

한 나라를 대표하는 통상교섭본부장이라는 막중한 자리에는 비단 경제적인 측면뿐이 아니라 역사적, 민족적 측면에서도 총체적인 이해와 전략적 구상도 요청됩니다.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를 앞두고 아직도 취약한 우리문화의 안마당을 그렇게 단순한 경제논리로 다내주어도 되는 것입니까? 현통상교섭본부장의 자세대로라면 경제도 잃고 문화도 빼앗길 것이 너무도 뻔합니다. 비록 지난 연말의 문제제기와 항의 시위등을 통해 쿼터제 폐지는 유보되었지만 아직도 쿼터제 파동을 몰고 온 통상교섭본부장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으니 큰 일입니다.

대통령님, 올해부터는 정보지식산업과 서비스분야 전체의 개방문제를 협의하는 밀레니엄라운드가 시작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영화산업을 더욱 더 키워야 한다는 것은 다가올 새 밀레니엄 시대에 지구촌에 휘몰아칠 전면적 개방 열풍 속에서 자자손손 물려주어야 할 혼과 얼을 지켜내는 매우 중요한 매체이며 동시에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적 문화상품이기 때문입니다. 3대기간산업 중 하나인 영상문화산업의 터전을 끝까지 지키고 가꾸려해도 개방열풍에 고사될 지경인데 우리가 먼저 간 빼주고 쓸개 빼주어서야 되겠습니까?

대통령님, 국사에 분주하시더라도 돌아오는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우리 영화 한편 관람 해보시면 어떠실지요. 언제 마지막으로 우리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볼 땐 괜찮은 우리 영화들이 요즘 꽤 있습니다. 대통령님이 평화와 기쁨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문화집단 킴스원 대표 김지현
1999/01/14 00:00 1999/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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