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적성, 표현의 자유 -
김대중 대통령께

국정의 으뜸가는 책임자로서 하나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국사 를 보살피느라 정말 바쁘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쪼록 건강을 잘 돌보 시고 어려운 일마다 잘 풀려 가리라는 낙관적인 신념에 변함없으시기를 빕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려는 "쓴 소리"는 막중한 국사에 비할 때 사소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처럼 작은 문제에 뜻밖에도 국민의 정부가 나아가는 일을 좌우할만한 큰 역사적 선택이 걸려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귀한 시간을 잠시라도 빼앗을 엄두를 내는 것입니다. 작은 듯 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 문제는 소설가 조정래 씨 의 {태백산맥} 이적성 여부에 대한 검찰의 수사입니다.

모두 10권의 장편역사소설인 {태백산맥}은 완간된 지 1년 후인 지난 90년 5월 대검찰청이 '이적표현물'로 분류한 이후 잊어버릴만하면 그 이 적성이 문제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후에도 이처럼 시대착오 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것에 그저 한숨을 토하고 넘어갈 일이 아닌 듯합 니다.

IMF 구제금융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국제적인 기준에 부응하는 질서를 세우고 그에 걸맞은 실력을 키워야 함을 실감하고 있으 며, 이는 대통령께서 틈만 나면 강조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 리가 지난 선거에서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제적인 기준에 맞는 대통령을 뽑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민의 정부 초기의 미국 국빈 방문 때 의회연설이 가능했을 리가 없지요. 우리 국민 누구나 그 연설을 자랑스러워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사법기관이 문학작품을 대하는 태도 역시 국제 기준에 부합해야 합니다. 세계 각국 작가들의 모임인 국제 문필가 협회 (PEN)나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가 당연시하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엄밀한 법률적인 논의는 문학연구자 인 제 능력 밖이지만, 민주국가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는 경우 는 극히 드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설혹 어떤 글이나 작품이 폭 력혁명을 선동한다고 할지라도 그 글을 내놓은 개인이나 그를 지지하는 집단이 폭력혁명을 꾀하는 구체적인 조직적, 물질적 준비까지 행하는 상 황이 아닌 한 사법적 심사와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민주 국가의 기본질서에 대한 '명백하고'(clear) '직접적인'(immediate) 도전 이 아닌 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존중은 민주주의의 주춧돌입니다.

대통령께서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갖가지 고초를 겪던 지난 세월 동 안 우리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무도하기 짝이 없는 탄압과 유린을 지켜 봐야 했습니다. 불과 십여 년 전에도 우리 문화계는 출판을 준비중인 원 고가 불심검문에 걸려 국가보안법의 처벌 대상이 되는 희극적인 꼴도 본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적성을 발휘할 기회조차 없었던, 활자화되기 도 전의 원고가 말입니다. 1988년 올림픽에 맞추어 서울서 열린 국제 PEN 대회에 몰려온 세계 각국의 작가들과 만났을 때, 이런 억압적 상황 에 대해 외국 작가들이 경악해하는 일을 보며 무척 속이 쓰렸던 기억을 지우기 힘듭니다.

{태백산맥}은 폭력혁명을 선동하지도 않으며, 사회주의를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격변기에 무장투쟁노선을 택한 숱한 좌익들의 비참한 경험을 직시하면서, 그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 인간으로 바라봄으로써 후세에게 역사 앞에서 겸허하고 신중할 것 을 가르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거의 100만질 내외가 팔려나간 80, 90년대 소설분야의 최고 베스트셀러입니다. 제가 재직하는 대학은 재학생 수가 2,000명이 채 못 되는 작은 학교이지만 {태백산맥}의 열람카드마다 수십 명의 학생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고, 한 질로도 부족하여 여러 질이 서가에 꽂혀 있습니 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큰 대학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소설을 법적 제재의 대상으로 삼아보겠다는 검찰은 과연 민주국가의 사 법당국인가요, 아니면 피비린내 가시지 않은 군사독재의 잔재인가요? 참 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해를 무릅쓰고 덧붙이자면, 한 사람의 문학연구자, 평론가로서 저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허점이 많은 작품이라고 믿으며 그리 높은 점수 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칭찬하든 비판하든 열띤 토론을 거쳐 더 좋은 역사소설이 나올 토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는 빼먹 을 수 없는 필수조건인 것입니다.

{태백산맥}을 둘러싼 논란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는 낡은 사 고방식의 소유자들이 터뜨린, 지나쳐도 좋을 작은 파문이 결코 아닙니 다. 여기에는 틈만 나면 고개를 드는 우리 사회 수구세력들의 엄청난 물 질적 힘이 뒷받침되고 있으며, 사실은 잘 계산된 여론 떠보기입니다. 건 국 이후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정치권력이라면 이 일에 서릿발같은 단 호함을 지체없이 보여야 합니다.

내년은 한국전쟁 50주년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기억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를 포함하여 전쟁 이후 세대에게도 전 쟁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왜냐하면 남과 북은 휴전 후에도 전쟁과 다름 없는 총력전 태세를 유지하면서 서로 적대하고 갈등했으며, 상대방의 위 협을 빌미로 내부의 독재를 정당화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지 10년이 넘는 지금 세계는 평화와 안정 의 시대로 접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발칸반도 사태가 잘 보여 주듯이 한 지역의 공동체가 인종, 종교, 이념 등의 상이함을 극복하는 지혜와 역량을 갖추지 못할 때 외세의 간섭과 전쟁의 참화에 시달릴 가 능성이 더욱 높아진 시대입니다.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체제의 기 능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는 북한이기에 한반도의 정치적 불안정은 조 금도 안심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만큼 {태백산맥}이 다루는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이적성 운운하는 고압적 자세 아닌 용서와 화해의 정신, 무엇이든지 들어주고 논의할 수 있는 자세를 전제합니다.

나라 안팎의 어지러운 정세 가운데에서도 우리 국민이 심한 불안을 겪지 않음이 그저 태평해서는 아닙니다.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일관되고 강하게 밀어부치는 대북 햇볕정책이 북의 얼어붙은 체제를 녹이고 외세 의 부당한 간섭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임을 믿고 있기 때문입 니다. 한반도 주민 전체의 생존권이 걸린 분단극복은 단지 우리 민족의 일이 아님을 대통령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민족의 평화적 통일은 동아시아 평화의 균형추로서 우리 민족의 역량을 획기적으로 키울 것이 며, 나아가 세계 평화에도 큰 발자취를 남길 것입니다. 이런 희망찬 내 일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태백산맥}을 걸림돌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한번 대통령께 마음 속 깊이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김명환 (민족문학작가회의 국제위원회 부위원장)
1999/04/29 00:00 1999/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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