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 쓴소리] 어문정책 수립의 참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정기간행물(종간)/개혁통신 :
1999/03/11 00:00
-한자병용 정부 발표와 논란을 생각하며
최근 갑작스레 발표된 한자병용방침을 기화로 전개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솔직히 한 사람의 글쓰는 사람, 특히 오락가락, 갈팡질팡의 어문정책을 몸소 겪어왔던 40대의 한 사람으로서 착잡한 마음 금할 길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왜 이리 구태의연한가! 하는 답답함뿐입니다. 마치 때가 되면 한번씩 요동치는 그런 느낌입니다.
이번의 사태도 솔직히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전시행정의 흔하디 흔한 표본처럼 다가옵니다. 물론 현정부가 '개혁'을 유달리 강조하는 정부이고, 민주화에 대한 신념 또한 앞서의 정권과 견주어 높다는 점에서 가시적인 성과 또한 이전과는 다르겠지만, 진정한 민주적 개혁을 원한다면 당장의 결과보다 과정 자체부터 철저히 민주화시켜나가는 것이 '국민의 정부'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올바른 길일 것입니다.
어떠한 사태를 처리하는 데서 관건이 되는 진정성이란 근원을 생각하는 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한나라의 어문정책과 맞물린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고작 외국 관광객의 편의 운운하며 도로표지판을 들먹이며 지극히 표피적인 수준에서 밀어 부딪치려는 이 졸속, 이 불도저식 막무가내 앞에 저같은 동조자·찬성자까지도 참담해지고 맙니다.
해서 관광객 유치가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먼저 복잡하고 불친절한 입출국수속, 바가지 요금부터 고치라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곧바로 나오지 않습니까. 실로 부끄럽고 한심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발표한 담당장관이 그렇지 않으면 불필요한 논란에 휩쌓여 제대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 같아서 당담부서 내에서조차 논의과정을 생략했다는 후문(後聞) 앞에서는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비민주적 발상과 권위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제아무리 온당한 정책도 결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정권의 수명과 더불어 잠시는 공생하겠지요. 그러나 그 뒤의 운명을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오히려 혼란만을 또한번 가중시킨, 한때의 해프닝이 되기 십상일 겁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번 한자병기 방침을 두고 지금껏 '양철냄비 죽끓듯' 하던 우리의 어문정책의 역사에서 보면 별로 파격적이지도 않다고 혹평하지 않습니까.
정책이 아닌 행정적 발상에따라 조령모개(朝令暮改)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정부가 진정 민주정부라면 이 문제가 단순한 어문 행정상의 문제가 아닌 어문 정책상의 문제임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급하게 명령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상황의 민주주의를 차근차근 실행해야 합니다. 문화관광부의 일개 과가 관장하는 어문정책이 과연 진정한 정책이겠습니까.
기초공사부터 차근차근, 탄탄히 수립하는 일이야말로 '국민의 정부'가 말 그대로 영원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단어 하나 바꾸는 데도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프랑스의 경우까지는 못가더라도 어문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제대로 된 기구하나 없는 우리의 실정이라면 먼저 주체를 형성할 조건을 만드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민주주의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담당장관이 그토록 싫어하는 '불필요한 국민적 논란'이야말로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광장이 아닙니까. 이 광장 없이 어떻게 그것이 국민의 것이 되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말과 글은 어느 사이 매우 중대한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은 오늘의 현실입니다. 어느 사이 한글이 단순한 외국어 표기부호로 전락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결코 한 두가지의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국적불명의 부호가 한글로 부호화되어 버젓이 통용되는 상황입니다. 한글은 분명 갈수록 주체성과 창조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계적 상황 속에서 공생력과 경쟁력을 함께 가질 수 있는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종합적인 점검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만큼 그것을 성급하게 한자병용이니 혼용이니 하는 문제만으로 몰고 가서 위기의 근원이 흐려지는 것에 저는 반대합니다. 문제는 훨씬 심각합니다. 오히려 이번의 사태를 계기로 우리의 말과 글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어문정책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국민의 정부'가 국민과 함께 풀어나가는 성숙된 자세를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보다는 문제의 근원을 되돌아보며 그에 대한 국민적 공감 속에서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게끔 착실한 일의 도모가 참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정부는 적어도 어문정책에서만이라도 강압적인 지시행정가가 아닌 국민적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발상의 전환이 참으로 요청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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