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건의문은 지난해 12월 8일 민주화운동 원로 12인이 발표한 것이다. -

1. 사람은 그 존귀함을 잃어버리는 시대에 진정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길고 험한 세월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이런 진리를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입니다. 불행했던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무슨 짐승이나 물건처럼 취급당해 왔으며 많은 사람들이 상하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암흑의 시대와의 결별은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었고 우리는 이를 위하여 고난의 세월 속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투쟁했습니다.

50년만에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던 날, 김대중 대통령께서 상기된 표정으로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말씀하셨습니다. 큰 희망의 울림으로 다가온 이 말씀에 우리는 비인간적인 시대와의 완전한 결별을 예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새 대통령과 새 정부에 기대했던 바를 우리는 단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권의 실현'입니다.

2. 지난 여름,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미국 땅에서 전세계를 향하여 우리의 인권신장을 위한 놀라운 약속을 내놓으셨습니다. 인권법 제정과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라는 약속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야말로 오랫동안 고통 당하고 상처 입은 국민들이 갈망해 마지않던 빛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제도에 결박되면서, 인간 경시의 고질적인 관행에서 우리의 관리들은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국민은 거대한 권력으로부터 보잘것없는 권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권력이 일상적으로 부리는 횡포에 만성적으로 시달려온 것입니다. 이런 국민에게, 그 어떤 권력에도 복속되지 않고 높은 권위와 강한 권한을 가지고 공정하게 인권수호에만 전념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탄생한다는 사실은 곧 낡은 시대에서 새 시대로의 도약을 의미하는 획기적인 사건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3.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인권구현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한 이 획기적인 약속이 반년이 거의 다 되도록 시원스럽게 이행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울하고도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루한 논쟁 속에 그 설립으로 성큼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이 논의가 근본적으로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라는 대의를 저버리는 가운데 제자리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위한 준비는 이러저러한 이해관계를 멀리 넘어선 '인권 존중'의 대의에 굳건히 서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암울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는 온갖 피부색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모든 억울한 국민의 희망이 되어 그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탄생하게 됨을 우리는 영광으로 생각함과 동시에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부디 대통령께서 국민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주시고 훌륭한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에 노력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기대하며 그리고 주목하겠습니다.

그 어떠한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공정 무사한 국가인권위원회,

현실로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국제사회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그리고 민주화에의 이행기에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모범이 되는 국가인권위원회…

이런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써주십시오. 그리하여 오래오래 국민이 기억하는 '인권대통령'으로서 남아주시기 바랍니다.

1998년 12월 8일

강만길 고 은 김관석 김성수 김찬국 박형규 서영훈 유현석 이돈명 이세중 이효재 한완상
1999/02/19 00:00 1999/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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