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께

안녕하십니까.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취임하신 이래 여러 모로 국정 수행에 애쓰시는 대통령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사무총장 김용태입니다. 지난 번 저희 단체 10주년기념식 때 대통령께서 보내주신 메시지는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어떠한 지원보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이렇게 대통령께 글을 올리게 된 것은 [광주비엔날레 파행 사태]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언론 보도를 통해서 익히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현재의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전국의 문화예술단체 및 시민단체가 이 사태의 시급한 해결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지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광주비엔날레 파행 사태는 광주비엔날레 재단이사회(이사장 고재유 광주시장)가 작년 12월 21일 전시 총감독 최민씨를 전격적으로 해촉함으로써 비롯되었습니다. 제가 속한 단체는 이미 성명서에서 밝혔듯이, 이 일을 [문화적 학살]이라고 봅니다. 과격한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마는, 저희는 이것을 [관료주의에 의한 문화예술 전문가의 학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 비엔날레의 경우 20명 내지 30명의 민간 전문가들로도 행사가 진행됩니다. 이에 반해 광주비엔날레는 110여명이 넘는 인력이 행사가 없는 해에도 상근하고 있고 이 중 80여명이 행정공무원이며 100억원의 전체 예산 중 조직의 경상운영비로만 40억원을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 공무원의 인건비는 그렇지 않아도 모자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에서 20억 내지 30억원 가량이 별도로 충당되어 온 실정입니다. 대표적인 고비용저효율 체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문화예술행사의 기획과 집행에는 문외한인 행정 관료들이 재단이사회와 재단사무처의 실권을 장악하여 전시 총감독과 전시기획위원회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왔습니다.

해촉된 최민씨는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이며 파리1대학에서 미술과 영화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현재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원장으로 재직중인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최민씨는 해촉되기 전에, 방만하고 무능한 고비용저효율 체제를 개혁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동시에 최민씨는 비엔날레 전시 기획의 내용에 관해서도 장기간 치밀하게 연구, 조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광주비엔날레 재단이사회는 군사작전을 감행하듯이 최민씨를 해촉했습니다. 최민씨의 구상과 노력이 관료 집단의 이해와 날카롭게 상충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관료들은 비엔날레 행사에서 손을 떼게 되면 갈 데가 없어집니다. 광주광역시는 비엔날레 행사를 빌미로 불필요한 자리를 잔뜩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개혁적 분위기에서는 각 지방자치단체가 구조조정을 흉내라도 해야 합니다. 결국, 관료들은 자기네들이 퇴출되기 전에 최민씨를 쫓아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관료들은 제멋대로 주무르면서 흥청망청 방만하게 집행해 온 100억원이라는 예산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최민씨의 해촉 직후, 서울 지역의 양심적 미술인들은 [광주비엔날레 정상화와 관료적 문화행정 철폐를 위한 범미술인위원회]를, 또 광주지역의 시민단체들은 [광주비엔날레 정상화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 노력에는 공청회, 심포지움, 시민대토론회, 전시회 등의 개최와 뉴스레터의 간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 전개 속에서 고재유 재단이사장은 지난 1월 22일 이춘범 시의회 의장 등 광주지역의 여론주도 인사 8인과 함께 회의를 열어 [광주비엔날레의 민영화]를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여론의 비판을 일시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책략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현재, 재단이사회는 이 결의를 무시하고 여전히 비엔날레를 파행 상태로 몰고가려고 합니다.

재단이사장만 명목상 민간인으로 바꾼 채, 나머지는 전과 같이 고비용저효율의 관료주의적 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현재 재단이사회는 이사장이 시장, 부시장이 부이사장 겸 사무총장, 광주시립미술관장이 사무차장, 광주시 문화관광국장이 감사이며, 나머지 이사들은 5공 때부터 우리 사회의 개혁에 반대해 온 관변 예술인들입니다.

이러한 광주비엔날레의 파행 사태는 더 이상 미술인 혹은 광주지역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저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포함하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 전국적인 시민단체들이 함께 나서게 되었습니다.

저희들 문화예술단체와 시민단체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광주비엔날레 파행 사태는 작년의 스크린쿼터 축소 파동 및 과천의 세계마당극큰잔치 파동과 맥락이 같은 일이라고 봅니다. 즉, 문외한인 행정 관료들이 문화예술 행정을 독점하고 문화예술 행사를 전적으로 좌지우지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 문화예술단체와 시민단체는 관료적 문화행정을 타파하고 문화 행정의 공공성을 제고시켜 시민의 문화 향수를 최대한 보장하는 일에 나선 것입니다.

저희들은 광주비엔날레의 정상화와 관료주의 타파가 우리나라의 개혁의 전진 정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화 개혁이 정치 및 경제 개혁과 별개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저는 각별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문화적 민주화로 완성되는 과정이 바로 참된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이미 문화가 21세기 국가 전략산업임을 천명하시고 이를 위한 국정 운영 구상과 지표를 여러 차례 밝히신 바 있습니다. 또 문화예술인들은 최근 청와대에 교육문화 비서관직을 신설하고 문화관광부에 영상산업국을 신설한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 문화 분야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과 의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문화]대통령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문제는 창의적이고 창발적인 상상력을 지닌 전문적 일꾼들을 어떻게 키워내는가, 또 이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어떻게 마련하는가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도 문화 개혁은 시급하고도 중요합니다.

또한 저희 시민단체들은 5.18의 성지인 광주에서 이렇듯 반개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광주시의 행정 관료들이 개혁을 거부한다면, 도대체 어느 지역의 공무원들이 개혁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저는 대통령께서 수차례 밝히신 [문화예술 분야에 정부는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광주에서부터, 또 광주비엔날레에서부터 관철되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광주비엔날레 파행 사태는 저희 시민단체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저희들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 시장과 시의 행정 관료들은 소귀에 경 읽기 식으로 속칭 [철밥통]을 완강하게 움켜쥐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광주비엔날레가 파행적으로 운영된다면, 저희 문화예술단체와 시민단체의 선택은 불가피하게 광주비엔날레 참여 및 관람 반대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단체들의 보이콧은 기획, 출품, 참여, 관람 등 전반에 걸친 적극적인 것이며, 또 국내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료들에게 등을 떠밀려 저희 시민단체가 원치 않는 길로 가지 않도록 대통령께서 사태 해결의 물꼬를 터주십시오. 다가올 불행한 파국을 대통령께서 막아주십시요.

아래에 저희들의 구체적인 간청 사항을 적어 놓겠습니다. 방자하다고 물리치지 마시고, 부디 관심을 가지시어 사태 해결에 참고해 주십시오.

다 음

-광주비엔날레 재단이사회는 완전 민영화되어야 합니다.

-광주비엔날레에 파견된 모든 공무원은 본연의 행정 업무에 복귀해야 합니다.

-광주비엔날레와 시립미술관은 분리되어야 합니다.

-파행 사태로 해촉되거나 재계약이 거부된 모든 전문가들은 원직으로 복직되어야 합니다.

1999년 2월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사무총장 김용태
1999/02/11 00:00 1999/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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