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십년만에 (정확하게는 37년만에) 이루어질 의약분업. 그 날이 며칠 남지 않은 즈음, 서울대학교 의료관리학과의 김용익 교수를 만나는 건 아주 뜻깊은 일일 것이다. 의약분업에 관해 수십년간 얘기한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이 최근 몇 년간 구체적으로 논의되어 왔고 그 핵심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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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보기에 김용익 교수는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본격적인 분업실시를 앞두고 의협, 정부, 약사협간의 긴장이 위험수위를 넘었어도 그는 확고부동한 자기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결국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꼭 그래야만 한다는 신념 때문에 그런 것인가. 태풍의 눈. 시위를 떠난 화살. 그를 만났을 때 떠오른 말들이다.

1908년에 지어진 의과대학 병원 내 시계탑 건물 현관에서 막 연구실로 들어가는 그와 마주쳤다. 방금 국회에서 의원 4명을 연거푸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무지하게 지친 모습이었다. 그의 연구실에서 책과 자료집에 둘러싸인 채, 이미 수도 없이 반복했을 이야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 이야기를 다시 화제로 삼았다.

의약분업이 왜 지금 우리 나라에서 필요한가요?

현재 우리나라의 사정은 의약품이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잘못 쓰여지고 있어요. 약에 대한 사용이 무질서하고 방종하기 때문에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게 의약분업의 가장 큰 목적이지요. 약을 쓰는데 신호등을 켜두자는 것인데 세계 다른 나라가 거의 대부분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건 교통정리를 위해 신호등을 설치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차선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 도로에 선을 긋고 신호등에 빨간 불, 파란 불이 제대로 켜지게 하자는 것이지요. 신호에 따라 달리는 것은 불편한 게 아니라 훨씬 빨리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잖아요. 의약분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보건 의료의 질서 잡기가 힘들어요.

내게 잊혀지지 않는 경험 한 가지. 영국에 살 때 우리 딸 애가 입원한 적이 있었다.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자 명색이 아빠란 작자가 무지막지하게 날계란과 간장을 밥에 비벼 억지로 먹인 것이다. 그 후 극심한 설사와 고열로 입원을 했는데 살모넬라 중독증이라는 엄청난 진단이 나왔다. 회진 나온 소아과 과장이 말했다." 항생제를 쓰면 당장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생제를 쓰지 않더라도 며칠 입원 치료하면 나을 수 있어요. 항생제는 앞으로 정말 꼭 필요한 경우를 위해 아껴 둡시다." 24시간 복통으로 신음하는 네 살 짜리 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의사가 말리는데 어쩌겠는가. 결국 우리 애는 며칠 후 마이신 주사 한 대 맞지 않고 완쾌해서 퇴원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의사 선생님이 고맙고 감사하다. 그리고 NHS 덕분에 치료비도 한푼 내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국가차원의 의료정책을 만들고 연구하는 의료관리학 교실을 맡고 있는 김용익 교수는 1998년 11월 참여연대의 개혁통신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을 올려 의료계의 의약품 비리를 폭로했다.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병원에서 약을 타던 국민들이 약의 실질적인 흐름에 대해 감을 잡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국민들이 의약분업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시발점이기도 했다. 그 글로써 의약분업에 대한 그의 의지와 노력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만 의료개혁에 대한 그의 헌신과 노고는 이 방면 사람들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전부터 그는 의료보험 통합문제를 위해 정부기관, 전문인 그룹, 시민단체 등에서 수십 개의 직책을 맡아 전방위적으로 일해 왔다. 벌써 2년 전 일이긴 하지만 개혁통신에 관한 얘기를 물어보자.

의약분업이 본격적으로 얘기된 게 98년 봄부터였지요. 의약분업 추진위원회 위원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의료보험 통합 때문에 의약분업에 대해 시간을 많이 쓰지 못했어요. 그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왜 의약분업에 대해 반발이 심한지를 연구했지요. 결국 약을 둘러싼 이윤 때문이라는데 생각이 미치고 그것이 먼저 해결이 되지 않는 한, 즉 약으로 인한 이윤이 최소화되지 않는 한, 의약분업은 힘들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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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금 전의 피로한 기색이 일시에 가신 표정으로 상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의약분업을 향한 일이라면 언제고 어디서고 거침없이 나서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강의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약간 흠이긴 하지만).

약가마진에 대해서는 제가 문제제기를 할 때까지 그 문제에 대해 이의가 없었지요. 그런데 약가 차액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이 모든 게 의약분업을 진행시키기 위한 수단이란 측면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문제이기도 했지요. 대략 그렇게 돌아나가는 돈이 1조5천억 원 정도 되겠다 라는 주먹구구식 계산이 나왔는데 당시 의료보험에서 나가는 돈이 6조원 밖에 안되었거든요. 이 비율로 보자면 어마어마한 돈이 비정상적으로 나간 거죠. 그래서 참여연대에서 실사를 해서 약가마진 추산을 해보니 1조 2천 3백억 원이 나왔어요. 제 계산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요. 그 이후 보건복지부가 자체 조사를 한 결과 9천억원으로 발표를 했지만 참여연대 조사가 더 정확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책꽂이에서 두터운 책자를 꺼내 일일이 짚어가며 "이건 진료수가이고 이건 행위 수가이고 .... 약가마진은 굉장히 높게 매겨져 있는 반면, 행위료에 대한 수가는 굉장히 낮게 되어 있어요..." 이런 저런 자료를 읽고 예습을 꽤 하고 나갔지만 얘기가 조금 깊이 들어간다 싶으니 나는 그만 주위가 산만해지고 말았다.
학생의 운명적인 나태함인가. 모르긴 몰라도 나 같은 일반시민들은 의약분업에 대해 그다지 전문적으로 알지 못한다. 아마 대충 두 가지 입장이 있을 것이다. 아, 그거 뭣땜시 하나, 불편하다는데, 한번에 약 타고 주사 맞으면 되는걸, 긁어 부스럼 아냐? 하는 단순명료파. 그리고 항생제 오남용률이 우리나라가 제일 높대요, 우리도 우리지만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의약분업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하는 개명원칙파. 국민들은 또 이런 걸 떠나서도 약가가 어떻고 수가가 어떻고 하는 것들이야 그 방면 전문인들이 알아서 해 주길 바란다. 그러라고 우리가 세금 내서 공무원들 봉급을 주는 거다.
전문분야 지식인들이 정책을 제대로 만들고, 의사들 약사들 모두 최고로 많이 배운 사람들이니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말고 ....이런 기대를 가지고 7월 1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양심선언'이라고 제목이 붙여져 나온 그의 발표로 주위에 굉장한 충격을 던져 주었는데 그 여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참여연대로 약가마진에 대한 자료를 넘겨준 뒤 개혁통신에 글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거예요. 개혁통신이 청와대로 가는 팩스라고 해서 비공개로 가는 것인 줄 알았죠. 그런데 홈페이지에 뜨더라구요. 내, 참.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글 형식으로 써 달라고 해서 팩스 사신 정도로 알고 감성적인 표현도 쓰고 그랬지요.
조선일보에서 맨 처음 기사를 썼는데 양심선언이니 하는 표현들로 뽑았더군요.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흘러간 부분이 있었지요. 그리고 국민회의 정책위원회에서 일을 했고 의약분업 시민대책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의약분업을 주도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지요. 지금도 오적 중에 하나로 들어가 있어요. 나머지 사적이 누군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의 대답이 아주 여유롭다. 하지만 같은 의료인의 입장에서, 그가 겪어온 어려움은 작지 않았다. 의료계의 내부를 고발하는 것은 고자질이나 마찬가지라며, 선후배를 도적으로 몰았다며 의료계에서는 징계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비난의 소리가 거센 만큼 그의 투쟁에 용기와 희망의 박수를 쳐준 사람들도 많았다.
여태껏 쌓아온 이력을 통해 김 교수를 보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흔들림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인 것을 능히 알 수 있다. 그는 스스로 권위에 대해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그게 무조건적인 반항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복종할만한 가치가 있는 권위인지를 미리 잘 살펴 본 다음'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한다는 말이다. 권위에 잣대를 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전적인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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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요즘 시민단체활동 하는 사람들의 성격이란 게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요? 네 가지로 분류되는 유형이 있는데 그중 진보적이면서도 조직에 충실한 사람들이 가장 효과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다고 보는데요.

그의 의약분업 필수론에 대해 '임상도 안하고 개원도 안한 무늬만 의사인 사람이 뭘 모르고 하는 소리' 라는 비난이 높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그는 의연하다.

임상도 개원도 안한 것은 맞는 말이지요. 그래서 모르는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의사들이 아파 봐야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 되겠군요. 내가 개업을 했다면 개업한 의사 입장에 치우쳐 있겠지요. 그러나 보건 의료정책은 의사들을 위한 의료정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국민들을 위한다는 데서 가치판단을 할 수 있어야지요.
의사들을 중심으로 하면 안되지요. 물론 보건 의료정책을 만드는 게 의사들한테 해로운 정책을 만드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데 있는 것이지요. 전 모르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열심히 물어보고, 알아보고, 공부합니다. 개원하신 분들도 자신이 경험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으시겠지만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지요. 개원을 해봐야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상당히 감정적이랄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조금도 흥분하지 않는다. 평소 그의 이런 태도 때문에 주위에서 그를 무서운 사람, 독한 사람, 냉정한 사람이라고 평하는 것일까? 그러나 감정의 흔들림을 억누르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경우가 살다보면 자주 있다 (그에게는 그런 경우가 너무 자주 있어 탈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제대로 된 의료정책과 비교했을 때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어떤 마음가짐이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 어려운 일을 자처하고 나서는가?

의료체계에 문제가 많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국민을 위한 보건의료 체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고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제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보건의료체계를 국민들을 위해서 제대로 작동하는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그 가운데 의약분업이나 의료보험 수가를 제대로 굳혀 놓는 것은 정상적인 의료체계를 만드는데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누군가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지요. 의사들이 마치 약가 차액 문제나 의약분업에 있어서 의권을 침해하고 의사들을 손해 보게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죠. 의약분업이나 정상적인 의료체계를 만드는 일이 의사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면 제가 그렇게 열심히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실천 때문에 그가 동료들에게 받는 눈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 문제를 의사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현재 우리 나라 국민과 의사들과의 관계는 파탄 상태라고 봐요. 의사에 대한 국민의 불신, 양자간의 괴리가 커서 의사들이 사회집단으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요. 의사 한 분 한 분은 훌륭한 사람이 많지요. 주위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의사라는 직종이 사회에서 제대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변신을 해야 한다고 봐요. 지금 의사가 지은 집은 모래 위의 집이에요. 단단한 반석 위에 새로 지어야하는데 그 과정이 어려운 거지요. 수만 명이 살아야 할 집을 새로 짓는데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 의견의 불일치나 뭐 그런 것들은 당연히 따라 오는 거지요. 이것은 약사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약사 역시 자기 정화는 주저하고 있어요. 임의조제만 해도 카운터맨(무자격약사) 정리가 급선무이지요. 그런데 약사들이 선뜻 나서지 않고 있으니 이점은 분명히 문제이지요.


의대를 다니면서 임상이 아니라 이론 쪽으로 인생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언제 하셨나요?

4학년 때였어요. 학교 다니면서 무의촌 진료를 많이 했지요. 70년대 당시 우리가 지향한 것은 지역사회의학으로, 환자를 개인적으로 보는 것 말고 대안적인 것으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돌이켜 보면 의료관리학에서 하는 초보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된 것이었어요. 의료전달체계, 지역사회 주민 참여니 이런 것이었는데, 의사들이 너무 치료 중심적으로 하지 말고 예방이나 건강 증진, 재활 이런 포괄적인 것들을 해야한다는 주장이었지요.
임상을 통해 환자를 돌보는 것보다는 거시적으로 의료체계를 만드는 일, 즉 좋은 의료제도 안에서 의사들이 일을 하게 되면 환자들을 위해 더 좋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그래서 예방의학교실에 들어갔지요. 1987년에 의료관리학이 예방의학으로부터 독립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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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무의촌 진료활동이나 농촌봉사활동의 대열에 들어선 대학생 중에 자신을 심 훈의 <상록수> 주인공과 연결짓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저녁 푸른 들녘에 서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을 젊은 학도들. 그 시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으실 테지요? 라고 질문하자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진다.

처음에는 문래동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때 안양천 좌우에 판자촌이 꽉 들어차 있었지요. 모래내에서도 활동을 했는데 당시 70년대 중반, 서울은 판자촌을 밖으로 밖으로만 계속 밀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어요. 우리 학생들도 동네가 밀려가면 밀려간 만큼 따라갔지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활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지요. 그 때 기억이 제게는 아직도 남아 있어요. 정책입안이라든가 그런 작업을 할 때면 늘 떠오르는 것이 무의촌 진료 때의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이 정책이 이로울까 아닐까에 대한 기준으로 늘 그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요. 착하고 순박하지만 대책은 영 없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의료제도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브 나로드!'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농민들을 위해 일하자고 외치던 러시아의 구호가 떠올랐다. 당시 젊은 의학도로서 신념에 불타고 계셨겠군요? 그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대답했다.

지금도 그래요.

난 순간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일 모레면 쉰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런데 스무 살의 청년일 때 가졌던 그 푸른 신념의 고갱이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대부분 사람들은 '그때는 그랬었지...' 하면서 허허로운 미소로 이상에 불타 올랐던 젊은 날을 회상하고 만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당시의 열정을 지금도 때때로 그 강도 그대로 느껴요. 그래요. 저는 학생 때 하던 생각이 잘 안 변하는 그런 경우의 사람인 것 같아요. 피터 팬 신드롬인지 몰라도, 별로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때는 지역사회주민, 민중을 위한 의료를 하려고 한 것이라면 지금은 국민을 위한 것,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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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촌 진료 활동을 하면서 부인 박 계봉 여사를 만났다. 같은 대학 간호대학에 다녔던 부인의 활동에 대해 김 교수는 '무의촌 진료활동 하면서 건진 것은 결혼 뿐'이라고 인색하게 평가했다. 귀엽고 착하게 보여 (지금도 그렇다고 덧붙이며!) 결혼해서 슬하에 1남 1녀를 둔 이 부부는 올해로 21년째 함께 살고 있다.
내조란 늘 그렇듯이 눈에 잘 띄지 않는 법. 칼끝같이 다려진 와이셔츠 깃이나 잘 매치 된 넥타이 정도로 아내의 정성이 밖으로 내비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밖에서 일하는 남편들이 성공한다면 그 공의 절반 이상은 아내의 몫이 아니고 무엇이랴. 일년에 고작해야 한 두 번 정도 저녁 식사를 집에서 한다고 스스로 고백할 정도이니 김 교수의 부인도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집 사람은 포기한지 오래 되었어요. 제가 워낙 일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저절로 포기를 한 거지요. 생각할수록 미안해요. 그러나 다행히 제가 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누구보다 인정해주고 밀어주니 고마울 뿐이지요.

평생 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시간을 합해 보면 세시간 정도뿐이라는 남편과 천생연분인지 박 여사의 손끝 맵고 안목 높은 살림솜씨는 정평이 나있다. 직접 만들고 다듬어 수준급 이상의 치장이 된 그 예쁜 집에 김 교수는 늦게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안 된 일이다. 그는 밖에서 불철주야 일하는 대신, 그 미안함을 중요한 고비 때마다 기쁜 소식을 아내에게 제일 먼저 전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지난번 의료보험 통합 때도 그랬고 이번에 의약분업 합의안이 타결되었을 때도 부인에게 전화로 그 기쁨을 가장 먼저 나누었다. 하지만 요즘은 의사집안 출신인 남편이 의약분업의 선봉에 서서 의사들과 반대입장에 서 있으니 부인의 입장이 여간 힘들지 않다.

특히 존경하는 인물이 있나요?

어나이린 베븐을 좋아한다고 하면, 글쎄 난리 나겠지요?

베븐(Aneurin Bevan, 1897-1960)이라면 2차대전 직후 영국 노동당이 집권했을 당시 애틀리 수상의 각료로 보건부 장관을 지낸 인물로 영국 의료보장제도의 틀을 확고하게 짠 전설적인 정치가이다. 웨일즈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전국민이 무상으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국립보건제도(National Health Service)를 만든 장본인이다.
적어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은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 후 보수당 정권마저 감히 어쩌지 못했던 NHS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런던대학교 보건대학에서 공부한 그의 경력과 NHS에 대한 호감을 삐딱하게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회주의 제도라 할만한 영국의 의료제도를 한국에 대입시키려 한다는 억지주장에 대해 그는 설명한다.

영국 NHS는 장점이 많은 제도이지요. 그러나 우리와는 배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적용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 제도가 가진 장점중에 우리와 맞출 수 있는 부분이 있나 찾고 있긴 하지만 의료정책을 연구할 때 전 미국이나 일본 독일 등 여러 나라를 많이 참고하지요.'

그의 연구실 벽을 둘러보았다. <닥터 지바고>의 영화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과 혁명의 대서사시.

닥터 지바고는 다섯 번을 봤어요. 시간에 따라 감흥이 달라지는데 젊었을 때는 라라와 지바고의 사랑이 아주 잊혀지지 않았는데 얼마 전 재개봉되었을 때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사는 얘기가 더 흥미롭더군요.

<태백산맥>이나 <토지> 같은 소설을 좋아한다는 그는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변해 가는 인간들의 모습에 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듯했다. 종교에 대해서는 냉정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데, 그럼 살면서 가장 믿을만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인간과 인간간의 연대죠." 그 특유의 스타카토로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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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회보장의 각 제도들은... 바다 위에 외로운 섬과 같이 떠 있다. 위태롭게 떠 있는 이 제도들이 국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필수적인...대안이라는 공동체적 인식을 전국민이 공유하는 새로운 담론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 - 즉,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메워 거대한 육지로 만들어 놓지 않는 한....상태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 잡지에 그가 기고한 글의 내용 일부이다. 섬과 섬을 메우는 국민의 힘, 문학적인 상상력이 물씬 풍기는 구절이다. 혹시 그는 몰래 쓴 시를 서랍 속에다 감춰두고 있지나 않을까?

하하,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요. 전 사실 책읽기도 좋아했고 글쓰기에 소질 있다는 말도 들으면서 자라서 문학을 공부할 수도 있었어요. 다분히 그런 성향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의사이신데다 제가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인지 의대 진학이 자연스러웠어요. 전 글을 쉽게 쓰는 게 진보적 지식인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노동자나 보통사람들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 된다고 믿어요. 대중에게 전하는 말은 쉽고 이해가 빠르게 쓰도록 애를 쓰죠. 순한글식 표현을 쓰려고도 하지요.

그는 아이들 이름을 모두 순한글로 예쁘게 지었다. 딸은 빛나래, 아들은 빛마로. 그리고 영국에서 키우다 데리고 온 하얀 털 복숭이 웨스트 하일랜드 테리어 강아지 이름도 '하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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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충남 논산에 사시던 아버지께서 처가인 전북 익산으로 피난하신 탓에 그곳이 고향이다. 호남평야가 시작되는 집 앞 들판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푸른 가을하늘을 보느라 한 시간을 통째로 바치기도 하고, 동글동글한 자갈돌이 눈부셨던 신작로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고향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물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그는 어릴 적 같은 마을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기억도 고향풍경 만큼이나 진하게 마음에 새기고있다.
야심이니, 돈 못 버는 콤플렉스라느니 하면서 그의 행동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를 한번도 못 만나본 사람들일 것이다. 얼마 전 그는 강연 차 전주에 갔다가 쓰러졌다. 너무 몸을 혹사하지 말라는 육체의 경고일 것이다. 지방강연이나 모임에는 해외 출장이 아닌 한 꼭 참여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애쓴다.

학생시절, 꼭 알아보고 대답을 얻고 싶을 때가 간절한 적이 있었거든요. 얘기를 해줄 누군가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죠. 바쁜 사람이 별 데 다 다닌다고 하는데 전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난항을 거듭하는 의약분업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착잡하다. 거센 파도를 예견했었지만 풍랑이 지나치게 높은 것 같다. 결국 언젠가 배는 항구에 닻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선원과 선객 모두가 미소를 지으며 갑판 위로 얼굴을 드러낼 날이 언제인지는 기약할 수 없다. 그 날이 오기까지 김용익 교수의 헌신은 계속될 것이다. 베븐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가시관과 은전 삼십 량을 함께 가질 수는 없다." 김용익 교수가 어떤 길을 선택해 왔고 또 앞으로 어떤 길을 택할지 우리는 이 정신적 사부의 혜안을 통해 분명히 알 듯하다.


글쓴이 : 권은정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2000/06/26 23:34 2000/06/26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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