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호] 작은특집 2 | 시민패널의 평가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1998/12/15 00:00
[유전자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 시민 합의회의에 참가하고
1. 이임갑 (시민패널, 충북대 심리학과 강사)
지난 여름 한 일간신문의 구석에 난, UNESCO 한국위원회의 유전/생명공학의 윤리적 사용에 관한 시민합의회의 (비전문가) 공고를 보고 제출했던 지원서를 다시 읽어보면서 새로운 감회를 느끼게 된다.
"95년부터 충남대 심리학과에서 연구원 및 강사로 재직하면서 정서/스트레스/중독행동 등에 관한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삶, 사회적으로는 조화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이에 관한 연구 및 강의를 통해서 학생들과 더불어 성장해 가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경력과 관심이 귀 위원회의 생명윤리 합의회의(비전문가) 지원자의 조건에 부합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또한 본 지원자로서도 관심의 영역을 확대하고 사회 속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지원하는 바입니다."
여기 소개한 지원서의 일부에서 보는 것처럼, 나는 시민합의회의에 관한 아무런 이해도 없이 그저 40대에 이르러 사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지원했고, 4개월 후에는 [유전자 조작 식품...] 시민패널 보고서를 14인의 이름으로 발표한 후 예전의 상태로 복귀하였다. 한바탕 꿈같기도 한 짧은 경험이었지만, 앞으로 나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민합의회의에 참여하면서 느낀 대표적인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1. 우리 나라에서 처음 열린 시민합의회의
시민합의회의는 우리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의견을 모아서 정리해 보는 것이다. 현대의 거대한 조직사회에서 전문가와 관료들의 발언권은 갈수록 커지고 비전문가인 시민들의 소리는 존중되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소외되는 [소외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은 어떤 표정으로 역사의 거울에 비춰질까?
비록 우리 시민패널들이 자발적으로 시민합의회의를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UNESCO 한국위원회가 펼쳐준 마당에 우리 14인이 어색하지만 흥겨운 몸짓으로 우리의 춤을 추어냈으므로 우리 자신의 합의회의였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 열린 시민합의회의였다는 역사적 의미에 생각이 미치면, 보통시민으로서 이렇게 쉽게 사회적 삶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열려있는 사회, 열어가는 사회,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우리 앞에 펄펄 살아있다.
2. 전문가와 교육받은 보통시민
UNESCO 한국위원회에서는 우리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성의껏 제공해 주었다. 예비회의 2차례와 본회의 3일간의 일정을 진행하면서 문서정보의 제공은 물론, 20여분의 관련분야 전문가들을 수배(?)하여 우리 시민패널 14인이 직접 교육받고, 질의-응답을 통해 합의회의 주제에 관한 체계적 이해와 전체적 조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번 시민합의회의는 전문가와 보통시민 사이의 차이가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우리 보통시민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사결정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정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적인 '지식의 크기'가 아니라, 균형을 갖춘 기초적인 정보를 토대로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내린 판단을 사회가 존중해준다는 '신뢰의 크기'다. 우리 보통시민들을 논의주제에 관하여 교육받은 시민(informed citizens)으로 만들어 주는 데 필요한 인력 및 재원을 정부에서 제공하는 사회적 장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3. 피곤함과 즐거움이 같이하는 민주주의로서의 시민합의회의
우리 시민패널 14인은 성별, 나이, 직업, 교육, 지역 등에 있어서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며, 경험이나 신념이 다르고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강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어떤 항목들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과정 그 자체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시민패널 최종보고서에서 몇몇 항목에 대해서는 견해차이가 있었음을 당당하게 기술하였다.
이제까지 내가 갖고 있던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회의는 실패한 회의'라는 고정관념은 시민합의회의에 참여하여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경청하고, 서로를 설득하려고 밀고 당기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강하게 주장하는 만큼 상대방도 강하게 주장할 권리를 가지며, 상대방이 경청하는 만큼 나도 진지하게 경청할 의무를 가진다는 평범한 도덕률을 가슴으로 느꼈다. 다양한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4인 모두 1/14만큼의 권리와 책임을 적극적으로 나누어야 하는 삶, 상대방을 배려하되 거리낌없이 논의하고 필요한 정보를 자유롭게 주고받음으로써 함께 성장해 가는 능동적인 사회가 가능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느껴지는 피곤함은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삶의 즐거움을 증폭시켜주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이 지금도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번 시민합의회의를 기획하고 추진해주신 김환석 교수와 UNESCO의 여러분, 그리고 우리 14인의 시민 패널 곁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한없는 인내심을 갖고 도와주신 여러 고마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따뜻하고 흐뭇한 우리 모두의 겨울모임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 채행옥 (시민패널, 가족보건의원 물리치료사)
"솔직히 돈이 없어서 대충 처리합니다. 실험실 안전지침 다 지켜가면서 무슨 돈으로 연구해서 언제 선진국 따라잡습니까?"
합의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전문가패널들로부터 들은 답변 중에서 너무 솔직해서 잊기 어려운 대답 중 하나다.
집에서 살림만 하신다는 한 시민패널께서는 그동안 '전문가? 나보다야 다방면으로 잘 아시겠지' 하는 소박한 신뢰감을 갖고 있었으나, 합의회의를 거치면서 '공식석상에서 하는 말 다르고, 사석에서 하는 말 다르고, 연구비 줄까봐 전전긍긍 걱정하는 전문가'들의 모습에서 무너지는 신뢰감을 느끼셨다고 한다. 그 뿐일까? 전문용어에 약하고 논리적으로 질문을 못해서 부끄럽다고 하시면서도 유전자조작 식품의 안정성에 대한 걱정 못지않게 전문가들의 좁은 시야에 더 실망하고 당혹스러워하셨다.
시민들이 과학적 근거없는 걱정만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한마디로 시민들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는 전문가들의 태도에 자존심 상한 시민패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하셨다.
"DNA약자가 뭔지 RNA약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전자조작 식품이 우리에게 득만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게 우리라는 것도 알고, 그들이 수십억, 수백억씩 들여서 연구하도록 지원하는 이도 우리라는 건 알구 있다구, 그렇기 때문에 우린 충분히 연구를 지켜보고 발언할 권리 갖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시민이라는 공통점 빼고는 직업도 다르고 나이, 생활습관이나 가치관이 다른 각각의 시민패널들이 합의회의를 거치면서 얻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처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최고 권위자들을 만난다고 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가졌던 주눅드는 심정은 어디로 갔는지 신경도 안쓰고 열의에 차서 말씀하시는 모습들은 내가 의심을 품고 있던 (솔직히 이전까지는 나 자신도 회의적이었다) 시민사회의 원동력을 한번 믿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며칠 병원에 보이지 않자 어디갔다 왔냐는 동료들에게 "유전자조작 식품에 관한 합의회의" 다녀왔다고 하면 내게 되돌아 오는 질문들이 있다.
"합의회의? 그게 뭔데?"
"유전자조작 식품, 그렇게 어려운 주제에 아무나 가도 되니?"
"그런데 거긴 왜 가니?"
신이 나서 얘기하는 내게 돌아오는 '이해하기 어려움'의 표정은 시민들의 관심에 '동의하기 어려움'을 나타내는 전문가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흔히들 21C는 시민사회라고도 하고 시민단체 활동을 배우는 확과가 인기리에 개강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게 시민사회는 아직 '감'이 잘 오질 않는다. 우연히 유네스코에서 준비한 합의회
의에 참여하면서 시민사회에 대한 맛뵈기를 했다는데 작은 의의를 두면서 내년에 열리는 합의회의 때는 좀더 성실하고 진지한 전문가들의 답변과, 전문용어는 모르지만 일반시민들의 '상식적이고 균형있는 판단'에 자신감을 가지고 전문가들을 당혹스럽게 할 시민패널들의 지원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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