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호] [독자투고] {시민과학} 4호의 불소화 관련 글을 읽고...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1999/03/15 00:00
{시민과학} 2월호에 실린 번역 논문 [수돗물 불소화의 짧은 역사]를 읽고 몇 자 적습니다.
논문과 함께 실린 {시민과학}의 소개글은 "저자는 ... 과학이 사회 속에서 문화적으로 위치지어지는 맥락을 무시한 채 순수한 과학의 목소리만을 강조하는 식의 접근이 지니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브라이언 마틴(Brian Martin)의 연구가 지닌 함의를 지적하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틴의 연구가, 불소화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과는 달리, 과학의 사회적 맥락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정작 투미(Christopher P. Toumey)의 논문은 마틴의 연구를 상당히 헷갈리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마틴의 연구를 호의적으로 인용하는 불소화 반대론자의 글(e.g. 녹색평론 김종철 교수의 글)이나 이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찬성론자의 글(e.g. 건치의 글)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과학의 사회적 연구' 더 나아가 '과학기술 민주화' 실천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큰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틴의 연구에 대한 투미의 기술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투미의 논문 중 몇몇 문장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틴은 경험적 증거나 과학적 권위에 호소해 불소화를 옹호하거나 비판했던 이전의 주장들로부터 급격하게 단절하여 "과학적 증거의 문제를 제쳐두면서"...
2) 이 관점에서는 역학자들, 치과의사들, 그리고 생화학자들이 불소화의 "과학적 가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 때문에" 불소화를 지지한 것으로 보았다.
3) 전문 학회들이 불소화를 단체 차원에서 지지한 사실에 있어서도 "과학적 판단은 별반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4) 그리고 "과학은 자연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불편부당한 활동이라기보다는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한 사회적 투쟁에 더 가깝다는 것"...
5) 경험적 과학지식의 기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회학의 흐름은 불소화 옹호자들의 근거를 박탈하여 "논쟁의 양편 모두가 권력과 통제를 향한 정치적 투쟁에서 '도덕적으로 동등'하다"는 관점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6) "과학적 논쟁에서 '과학의 역할을 부인'하는" 그런 접근 방법이 미친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 보기는 어렵지만...
이상의 인용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투미는 마틴의 연구가 '과학적 논쟁에서 과학의 역할을 부인'하고 있으며, '과학적 증거의 문제를 제쳐두'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마틴이 서로 다른 과학적 주장의 채택은 '과학적 가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에 의해, '과학적 판단과는 별반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투미에 의하면 마틴은 불소화 논쟁을 '자연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과는 무관한, 단지 '사회적' 성격의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투미의 기술은 마틴의 연구에 대한 불소화 반대론자와 찬성론자의 접근과 일치합니다. 불소화 반대론자와 찬성론자는 모두 마틴의 연구가 불소화 지지 과학자 집단이 '과학적 증거'와 무관하게 오직 '사회적' 요인에 의해 불소화를 부르짖고, 반대론자를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반대론자는 마틴이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 것으로, 찬성론자는 그가 과학적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엉뚱한 음모론을 퍼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엉뚱한 해석은 과학지식을 사회·문화적 산물로 이해하는, 마틴의 과학지식사회학 접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적 과학관, 즉 실증주의자들과 소박한(naive) 실재론자들의 과학관은 과학지식이 비사회적(non-social)임을 주장합니다. 과학지식의 창출, 검증, 채택 혹은 기각 등의 과정이 사회·문화적 요소로부터 자유롭게 자연적 실재, 논리 혹은 비인격적(impersonal) 방법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만일 과학지식에 사회·문화적 요소가 개입된다면 이는 '오염'일 수밖에 없고 반드시 그릇된 과학지식이 결과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불소화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모두 자신의 입장은 참된 과학인데 비해 상대방의 입장은 '오염'된 그릇된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통적 과학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과학지식사회학은 현재의 과학적 기준에 따라 거짓으로 여겨지는 과학지식 뿐 아니라 참으로 여겨지는 과학지식도 사회·문화적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최근 몇 년간 일었던 '과학전쟁'에서 잘 드러나듯이, 전통적 과학관을 고수하는 이들은 이러한 주장이 과학지식의 창출과정에서의 독립적인 자연적 실재의 역할을 무시하는 반실재론 혹은 관념론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연적 실재 없이는 지식의 창출도 불가능합니다. 관심의 초점은 독립적인 자연적 실재의 존재와 역할 여부가 아니라, 이에 대한 이해 즉 지식이 어떻게 창출되는가 하는 점이지요.
다시 말해 과학지식사회학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과학자가 자연적 실재를 사회와 문화의 창을 통해 이해하고 지식을 창출한다는 점입니다. 독립적 자연적 실재 자체로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open-endedness), 이러한 불확정성으로부터 과학지식이 창출되기까지는 자연적 실재에 대한 관찰보고(observation report, 즉 해석)의 작성, 관찰보고를 얻기 위한 실험적 실천, 개념, 논리 및 수학적 방법의 적용, 실험기기의 설계와 제조 등의 과정을 경유해야 하는데, 이들 과정이 곧 사회·문화적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과학지식 창출에서의 사회·문화적 요소는 따라서 '오염'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연적 실재와 함께, 없어서는 안될 핵심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여기고 있는 과학지식―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리고, 수십만 명을 살상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강력한 과학지식―역시 사회·문화적이라는 것이지, 불확실하기 짝이 없거나 거짓으로 밝혀진 과학적 주장에만 사회·문화적 요소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실재가 없으면 과학지식이 있을 수 없듯이, 사회와 문화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과학지식도 얻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틴의 연구는 분명 불소화 찬성론자들의 과학적 주장이 사회적·정치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찬성론자들의 인식론적 권위를 침식시키는 반면 반대론자들의 인식론적 권위를 상대적으로 높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찬성론자의 입장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틴이 만일 그의 연구에서 '과학적 가치와 무관'하다는 표현을 썼다면 이는 경쟁하는 서로 다른 과학적 주장들 중 하나의 주장을 채택하는 과정이 '비사회적'인 '순수' 과학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왜냐하면 그러한 '비사회적' '순수' 과학적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것일 뿐입니다.
논문의 앞부분에서 마틴의 연구를 매우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는 투미 스스로도 논문의 뒷부분에서는 "권력은 과학적 실행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과학자들이 무엇이 유효한 지식인지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일상적인 과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며 "불소화 논쟁에서 과학적 측면과 권력의 측면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마틴의 주장을 정확히 인용하고 있긴 하더군요.
과학적 차원의 문제를 제쳐두기는커녕, 마틴은 자연적 실재에 관한 어떠한 진술이 적절한 과학적 증거로 채택되어야 하는가, 그 경험적 증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떠한 분석방법이 적절한 과학적 방법으로 여겨질 것인가, 어떠한 전문분과가 주어진 과학적 논쟁에서 적절한 (즉 권위를 부여받는) 분과로 여겨질 것인가 등 '과학적' 차원의 문제들이 논쟁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불소화 논쟁의 양측에,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떠나,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마틴의 연구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함의가 있다면, 이는 과학―특히 불소화 논쟁과 같은 위험의 과학적 평가―에서 항시 존재하는 불확정성(indeterminacy)과 불확실성(uncertainty)이 어떻게 과학적 확실성으로 재구성되어 나타나는가에 대해 과학자사회와 대중들이 더욱 조심스럽고 성찰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불소화 찬성론자와 반대론자들은 전통적 과학관의 시야에 갇혀 이러한 함의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투미의 글은 그 모호함 때문에 혼란을 더 부추길 위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투미의 글에서 과학지식사회학 접근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빚어지는 혼란은 또 있습니다. 그는 마틴의 과학지식사회학 접근이 "논쟁의 양편 모두가 권력과 통제를 향한 정치적 투쟁에서 도덕적으로 동등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학지식사회학 접근은 과학적 논쟁에서 '인식론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그룹의 '인식론적' 권위를 침식할 수 있으며, 이는 적지 않은 정치적 파급효과를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기준이 사회·문화적 산물이라 해서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거부하지 않듯이, 과학지식에 대한 마틴의 방법론적 상대주의가 반드시 '도덕적·정치적 상대주의'로 이어질 필연적 이유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투미의 시각에 대해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는 글 머리에서 "반불소화 정서를 고무한 1950년대 미국인의 일상생활의 주요한 문화적 테마들을 밝힐 것"이며 "과학에 대한 특정한 상징들이 불소화 반대론자들에게 반대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음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더 긴 글의 일부만을 옮겼기 때문인지 번역된 부분에서는 그의 논점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글 전체를 읽지 않고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되겠지만, 아마도 투미는 과학지식 자체의 사회·문화적 성격보다는 과학기술이 대중들에게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가에 집중하는 과학기술의 문화학 연구의 한 조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조류의 문제는 실질적으로는 과학지식의 창출, 검증, 반증 및 적용 등의 과정을 문화와 분리하면서 단지 선언적으로만 과학지식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논하게 될 위험입니다. "과학 대 감정이라는 식의 모형" 즉 과학과 문화의 이분법적 구도를 폐기하고 "과학자들의 보증, 전문 학회들의 지지, 역학 연구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해석들"이 "문화적 과정들에 종속"되어 있음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는 종래의 주장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과학적' 차원의 문제들은 분석에서 실종되어 버린 채, 대중들이 과학적 논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와 같은 차원의 문제에만 초점이 집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마틴의 연구가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가 과학지식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보다 미시적 수준의, 과학지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과학내부의 분석에는 미흡했다는 점일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불소화 반대 전문가와 찬성 전문가들의 과학적 주장들이 관련 전문가 사회들의 문화와 스타일, 전문가 사회화 과정으로서의 교육, 관련 전문분과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방법론과 개념적 틀, 관련 전문가들의 과학적·기술적 숙련, 각각의 전문가들이 속하는 사회계층/계급, 문화 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요인들과 어떻게 동적으로 연결되고 있는지에 충분히 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비판적 검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지난호에 실렸던 글에 대해 적절한 지적을 해주셨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지난번의 번역글은 초점이 다소 흐릿하고 산만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냥 읽을 때는 쓸만한 글인 듯했는데, 막상 번역된 원고를 놓고 보니 소식지에 싣을 정도로 의미있는 글인지 다소 망설여지더군요. 하지만 찬성과 반대 주장이 타협의 여지 없이 서로 살벌하게 맞선 국내 상황을 고려한다면 불소화 논쟁의 흐름에 관련된 '사실'들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옮긴 이런 글도 나름대로 쓸모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논쟁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는 마땅한 다른 글을 찾지 못했기에 그냥 싣게 되었습니다. 번역상의 문제도 어느 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식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글의 원전 출전이 빠져 버리는 '조그만'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글의 출전은 Christopher P. Toumey, Conjuring Science: Scientific Symbols and Cultural Meanings in American Life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96), pp. 63-71입니다. 이 책의 5장이 미국에서의 불소화에 관한 사례연구인데 분량상의 문제 때문에 소식지에는 5장의 앞부분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글의 앞부분에서 하겠다고 했던 얘기들이 번역된 부분에 들어 있지가 않다는 문제가 생겼네요. 번역되지 않은 5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불소화에 대해 일반대중들이 그토록 격렬한 반발을 보이게 된 1950-60년대 미국사회의 문화적 분위기를 당시의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보여 주고 이를 반불소화 운동과 연결시키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이 과학지식의 생성의 측면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에 집중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은 정확하다고 생각되고, 그 점에서 마틴이 근거한 과학지식사회학(SSK)의 입장이 다소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즉, SSK의 급진성이 왜곡되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번역자 역시 수돗물 불소화를 다룬 마틴의 저작들을 직접 접해 보지 못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네요. 다른 2차문헌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마틴은 주로 치과의사회 같은 전문가조직 내에서의 권력관계를 분석했고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과학지식사회학에 의존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보면 투미가 글의 어딘가에서 지적했듯이 마틴의 연구는 논쟁의 반쪽(전문가사회 내부)만을 다루고 그것의 대중적·문화적 차원은 상대적으로 간과하는 한계를 안게 되는 셈인데, 여하튼 그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의 저작을 직접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번역자
논문과 함께 실린 {시민과학}의 소개글은 "저자는 ... 과학이 사회 속에서 문화적으로 위치지어지는 맥락을 무시한 채 순수한 과학의 목소리만을 강조하는 식의 접근이 지니는 한계를 비판하면서 브라이언 마틴(Brian Martin)의 연구가 지닌 함의를 지적하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틴의 연구가, 불소화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과는 달리, 과학의 사회적 맥락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정작 투미(Christopher P. Toumey)의 논문은 마틴의 연구를 상당히 헷갈리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마틴의 연구를 호의적으로 인용하는 불소화 반대론자의 글(e.g. 녹색평론 김종철 교수의 글)이나 이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찬성론자의 글(e.g. 건치의 글)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과학의 사회적 연구' 더 나아가 '과학기술 민주화' 실천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큰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틴의 연구에 대한 투미의 기술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투미의 논문 중 몇몇 문장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틴은 경험적 증거나 과학적 권위에 호소해 불소화를 옹호하거나 비판했던 이전의 주장들로부터 급격하게 단절하여 "과학적 증거의 문제를 제쳐두면서"...
2) 이 관점에서는 역학자들, 치과의사들, 그리고 생화학자들이 불소화의 "과학적 가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 때문에" 불소화를 지지한 것으로 보았다.
3) 전문 학회들이 불소화를 단체 차원에서 지지한 사실에 있어서도 "과학적 판단은 별반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4) 그리고 "과학은 자연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불편부당한 활동이라기보다는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한 사회적 투쟁에 더 가깝다는 것"...
5) 경험적 과학지식의 기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회학의 흐름은 불소화 옹호자들의 근거를 박탈하여 "논쟁의 양편 모두가 권력과 통제를 향한 정치적 투쟁에서 '도덕적으로 동등'하다"는 관점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6) "과학적 논쟁에서 '과학의 역할을 부인'하는" 그런 접근 방법이 미친 영향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 보기는 어렵지만...
이상의 인용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투미는 마틴의 연구가 '과학적 논쟁에서 과학의 역할을 부인'하고 있으며, '과학적 증거의 문제를 제쳐두'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마틴이 서로 다른 과학적 주장의 채택은 '과학적 가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에 의해, '과학적 판단과는 별반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투미에 의하면 마틴은 불소화 논쟁을 '자연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과는 무관한, 단지 '사회적' 성격의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투미의 기술은 마틴의 연구에 대한 불소화 반대론자와 찬성론자의 접근과 일치합니다. 불소화 반대론자와 찬성론자는 모두 마틴의 연구가 불소화 지지 과학자 집단이 '과학적 증거'와 무관하게 오직 '사회적' 요인에 의해 불소화를 부르짖고, 반대론자를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반대론자는 마틴이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 것으로, 찬성론자는 그가 과학적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엉뚱한 음모론을 퍼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엉뚱한 해석은 과학지식을 사회·문화적 산물로 이해하는, 마틴의 과학지식사회학 접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적 과학관, 즉 실증주의자들과 소박한(naive) 실재론자들의 과학관은 과학지식이 비사회적(non-social)임을 주장합니다. 과학지식의 창출, 검증, 채택 혹은 기각 등의 과정이 사회·문화적 요소로부터 자유롭게 자연적 실재, 논리 혹은 비인격적(impersonal) 방법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만일 과학지식에 사회·문화적 요소가 개입된다면 이는 '오염'일 수밖에 없고 반드시 그릇된 과학지식이 결과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불소화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모두 자신의 입장은 참된 과학인데 비해 상대방의 입장은 '오염'된 그릇된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통적 과학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과학지식사회학은 현재의 과학적 기준에 따라 거짓으로 여겨지는 과학지식 뿐 아니라 참으로 여겨지는 과학지식도 사회·문화적 산물임을 강조합니다. 최근 몇 년간 일었던 '과학전쟁'에서 잘 드러나듯이, 전통적 과학관을 고수하는 이들은 이러한 주장이 과학지식의 창출과정에서의 독립적인 자연적 실재의 역할을 무시하는 반실재론 혹은 관념론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연적 실재 없이는 지식의 창출도 불가능합니다. 관심의 초점은 독립적인 자연적 실재의 존재와 역할 여부가 아니라, 이에 대한 이해 즉 지식이 어떻게 창출되는가 하는 점이지요.
다시 말해 과학지식사회학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과학자가 자연적 실재를 사회와 문화의 창을 통해 이해하고 지식을 창출한다는 점입니다. 독립적 자연적 실재 자체로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open-endedness), 이러한 불확정성으로부터 과학지식이 창출되기까지는 자연적 실재에 대한 관찰보고(observation report, 즉 해석)의 작성, 관찰보고를 얻기 위한 실험적 실천, 개념, 논리 및 수학적 방법의 적용, 실험기기의 설계와 제조 등의 과정을 경유해야 하는데, 이들 과정이 곧 사회·문화적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과학지식 창출에서의 사회·문화적 요소는 따라서 '오염'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연적 실재와 함께, 없어서는 안될 핵심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여기고 있는 과학지식―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리고, 수십만 명을 살상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강력한 과학지식―역시 사회·문화적이라는 것이지, 불확실하기 짝이 없거나 거짓으로 밝혀진 과학적 주장에만 사회·문화적 요소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 실재가 없으면 과학지식이 있을 수 없듯이, 사회와 문화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과학지식도 얻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틴의 연구는 분명 불소화 찬성론자들의 과학적 주장이 사회적·정치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찬성론자들의 인식론적 권위를 침식시키는 반면 반대론자들의 인식론적 권위를 상대적으로 높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찬성론자의 입장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틴이 만일 그의 연구에서 '과학적 가치와 무관'하다는 표현을 썼다면 이는 경쟁하는 서로 다른 과학적 주장들 중 하나의 주장을 채택하는 과정이 '비사회적'인 '순수' 과학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왜냐하면 그러한 '비사회적' '순수' 과학적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것일 뿐입니다.
논문의 앞부분에서 마틴의 연구를 매우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는 투미 스스로도 논문의 뒷부분에서는 "권력은 과학적 실행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과학자들이 무엇이 유효한 지식인지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일상적인 과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며 "불소화 논쟁에서 과학적 측면과 권력의 측면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마틴의 주장을 정확히 인용하고 있긴 하더군요.
과학적 차원의 문제를 제쳐두기는커녕, 마틴은 자연적 실재에 관한 어떠한 진술이 적절한 과학적 증거로 채택되어야 하는가, 그 경험적 증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떠한 분석방법이 적절한 과학적 방법으로 여겨질 것인가, 어떠한 전문분과가 주어진 과학적 논쟁에서 적절한 (즉 권위를 부여받는) 분과로 여겨질 것인가 등 '과학적' 차원의 문제들이 논쟁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불소화 논쟁의 양측에,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떠나,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마틴의 연구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함의가 있다면, 이는 과학―특히 불소화 논쟁과 같은 위험의 과학적 평가―에서 항시 존재하는 불확정성(indeterminacy)과 불확실성(uncertainty)이 어떻게 과학적 확실성으로 재구성되어 나타나는가에 대해 과학자사회와 대중들이 더욱 조심스럽고 성찰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불소화 찬성론자와 반대론자들은 전통적 과학관의 시야에 갇혀 이러한 함의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투미의 글은 그 모호함 때문에 혼란을 더 부추길 위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투미의 글에서 과학지식사회학 접근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빚어지는 혼란은 또 있습니다. 그는 마틴의 과학지식사회학 접근이 "논쟁의 양편 모두가 권력과 통제를 향한 정치적 투쟁에서 도덕적으로 동등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학지식사회학 접근은 과학적 논쟁에서 '인식론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그룹의 '인식론적' 권위를 침식할 수 있으며, 이는 적지 않은 정치적 파급효과를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기준이 사회·문화적 산물이라 해서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거부하지 않듯이, 과학지식에 대한 마틴의 방법론적 상대주의가 반드시 '도덕적·정치적 상대주의'로 이어질 필연적 이유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투미의 시각에 대해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는 글 머리에서 "반불소화 정서를 고무한 1950년대 미국인의 일상생활의 주요한 문화적 테마들을 밝힐 것"이며 "과학에 대한 특정한 상징들이 불소화 반대론자들에게 반대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음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더 긴 글의 일부만을 옮겼기 때문인지 번역된 부분에서는 그의 논점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글 전체를 읽지 않고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되겠지만, 아마도 투미는 과학지식 자체의 사회·문화적 성격보다는 과학기술이 대중들에게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가에 집중하는 과학기술의 문화학 연구의 한 조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조류의 문제는 실질적으로는 과학지식의 창출, 검증, 반증 및 적용 등의 과정을 문화와 분리하면서 단지 선언적으로만 과학지식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논하게 될 위험입니다. "과학 대 감정이라는 식의 모형" 즉 과학과 문화의 이분법적 구도를 폐기하고 "과학자들의 보증, 전문 학회들의 지지, 역학 연구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해석들"이 "문화적 과정들에 종속"되어 있음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는 종래의 주장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과학적' 차원의 문제들은 분석에서 실종되어 버린 채, 대중들이 과학적 논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와 같은 차원의 문제에만 초점이 집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마틴의 연구가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가 과학지식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보다 미시적 수준의, 과학지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과학내부의 분석에는 미흡했다는 점일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불소화 반대 전문가와 찬성 전문가들의 과학적 주장들이 관련 전문가 사회들의 문화와 스타일, 전문가 사회화 과정으로서의 교육, 관련 전문분과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방법론과 개념적 틀, 관련 전문가들의 과학적·기술적 숙련, 각각의 전문가들이 속하는 사회계층/계급, 문화 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요인들과 어떻게 동적으로 연결되고 있는지에 충분히 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비판적 검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지난호에 실렸던 글에 대해 적절한 지적을 해주셨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지난번의 번역글은 초점이 다소 흐릿하고 산만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냥 읽을 때는 쓸만한 글인 듯했는데, 막상 번역된 원고를 놓고 보니 소식지에 싣을 정도로 의미있는 글인지 다소 망설여지더군요. 하지만 찬성과 반대 주장이 타협의 여지 없이 서로 살벌하게 맞선 국내 상황을 고려한다면 불소화 논쟁의 흐름에 관련된 '사실'들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옮긴 이런 글도 나름대로 쓸모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논쟁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는 마땅한 다른 글을 찾지 못했기에 그냥 싣게 되었습니다. 번역상의 문제도 어느 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식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글의 원전 출전이 빠져 버리는 '조그만'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글의 출전은 Christopher P. Toumey, Conjuring Science: Scientific Symbols and Cultural Meanings in American Life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96), pp. 63-71입니다. 이 책의 5장이 미국에서의 불소화에 관한 사례연구인데 분량상의 문제 때문에 소식지에는 5장의 앞부분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글의 앞부분에서 하겠다고 했던 얘기들이 번역된 부분에 들어 있지가 않다는 문제가 생겼네요. 번역되지 않은 5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불소화에 대해 일반대중들이 그토록 격렬한 반발을 보이게 된 1950-60년대 미국사회의 문화적 분위기를 당시의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보여 주고 이를 반불소화 운동과 연결시키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이 과학지식의 생성의 측면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에 집중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은 정확하다고 생각되고, 그 점에서 마틴이 근거한 과학지식사회학(SSK)의 입장이 다소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즉, SSK의 급진성이 왜곡되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번역자 역시 수돗물 불소화를 다룬 마틴의 저작들을 직접 접해 보지 못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네요. 다른 2차문헌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마틴은 주로 치과의사회 같은 전문가조직 내에서의 권력관계를 분석했고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과학지식사회학에 의존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보면 투미가 글의 어딘가에서 지적했듯이 마틴의 연구는 논쟁의 반쪽(전문가사회 내부)만을 다루고 그것의 대중적·문화적 차원은 상대적으로 간과하는 한계를 안게 되는 셈인데, 여하튼 그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의 저작을 직접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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