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호] 일상 속의 과학기술 자동차와 자전거 이야기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1999/06/15 00:00
0.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기술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며, 다양한 기술들에 엮인 이야기거리는 끝도 없을 것이다. 모두들 하나씩 들고 다니면서 코 앞의 사람에 대한 예의보다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사람에 대한 안부가 더 절실하도록 만든 핸드폰이나 미묘한 기술적 장애로서 인간을 길들이는 자판기의 이야기를 읽었다. 이 란에 어떤 이야기들이 이어질지 흥미로운 일이다. 내가 이 란에다 채우려는 이야기는 자동차와 자전거에 대한 것이다.
1.
지난 4월 초에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통사고라는 것을 당해봤고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떤 차에 어떻게 당해는지 기억에 없지만 그 빌어먹을 것이 자동차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장 먼저 하게 된 생각은 앞으로도 자동차 운전 면허를 딸 일이 더 없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요즘도 뒤에서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고, 건널목을 건널 때 거의 모든 차가 멈추어서지 않으면 도로에 내려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동차를 운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겠냐 싶다. 자동차에 의해서 사고를 당한 내가 자동차를 몬다는 것이 모순된 일처럼 느끼지는 것이다.
내가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번 사고의 결과는 아니다. 작년인가, 아는 사람들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길을 막고 폐차를 망치로 두들겨 부순 일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느냐며 다들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동감했고 지지했다. 도시 안이라면 언제나 듣게 되는 자동차 소리, 길을 걷는 나를 아무때고 가로막으며 불쑥 튀어나와 위협하는 자동차들, 토할 것만 같은 시커먼 매연을 뿜어대는 그 아가리. 그 자동차를 조립하면서 먹고 사는 노동자, 도로를 건설하면서 사는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동차가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게다가 자동차는 그냥 탈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권력이며 억압하는 제도이며 사회적 차별의 상징으로 보인다. 건국 이래로 한 번도 그 자리를 인간에게 내주지 않고 오직 자동차만이 지배했던 광화문 한 복판을 막아서서 자동차를 부셨다는 것은 내게는 무엇보다도 급진적인 '반체제 운동'인 것처럼 여겨졌다. 회사 앞에 늘어선, 그 주인만큼이나 거만해 보이는 검은색 고급 자동차를 보고 있자면 그 주인들에게 당한(그리고 앞으로 당할) 모멸감이 되살아난다. 그럴 때면 '작음' 때문에 숱한 농담꺼리가 된 경차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까지 일곤 한다.
2.
광화문에서 자동차를 부셨던 친구들은 요즘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로 서울의 거리를 되찾겠다며, 2주에 한 번씩 자전거 뒤에 깃발 하나 꽂고 서울 시내를 내달리고 있다. 놀랄 만큼 자동차에 적응되어 있는 서울의 거리와 인간들, 그리고 인간들의 무의식과 편견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이다. 친구들은 자동차에 밀려 더 이상 교통수단으로서 실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자전거를 되살려 불러들이고 있다. 자동차를 때려부순 자들이 탈것으로.
거창하게 말해본다면 자전거가 교통수단의 '적정기술'이 아닐까? 지속가능한 교통수단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환경친화적이고 평등한 기술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아니다. 콘크리트 도로와 빠른 자동차로 대표되는 꽉 짜여진 억압체제에 저항하는 투쟁의 상징일는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사야겠다. 저항으로, 변혁으로 자전거를 타자. 같이 탈 사람!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기술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며, 다양한 기술들에 엮인 이야기거리는 끝도 없을 것이다. 모두들 하나씩 들고 다니면서 코 앞의 사람에 대한 예의보다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사람에 대한 안부가 더 절실하도록 만든 핸드폰이나 미묘한 기술적 장애로서 인간을 길들이는 자판기의 이야기를 읽었다. 이 란에 어떤 이야기들이 이어질지 흥미로운 일이다. 내가 이 란에다 채우려는 이야기는 자동차와 자전거에 대한 것이다.
1.
지난 4월 초에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통사고라는 것을 당해봤고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떤 차에 어떻게 당해는지 기억에 없지만 그 빌어먹을 것이 자동차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장 먼저 하게 된 생각은 앞으로도 자동차 운전 면허를 딸 일이 더 없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요즘도 뒤에서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고, 건널목을 건널 때 거의 모든 차가 멈추어서지 않으면 도로에 내려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동차를 운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겠냐 싶다. 자동차에 의해서 사고를 당한 내가 자동차를 몬다는 것이 모순된 일처럼 느끼지는 것이다.
내가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번 사고의 결과는 아니다. 작년인가, 아는 사람들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길을 막고 폐차를 망치로 두들겨 부순 일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느냐며 다들 말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동감했고 지지했다. 도시 안이라면 언제나 듣게 되는 자동차 소리, 길을 걷는 나를 아무때고 가로막으며 불쑥 튀어나와 위협하는 자동차들, 토할 것만 같은 시커먼 매연을 뿜어대는 그 아가리. 그 자동차를 조립하면서 먹고 사는 노동자, 도로를 건설하면서 사는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동차가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게다가 자동차는 그냥 탈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권력이며 억압하는 제도이며 사회적 차별의 상징으로 보인다. 건국 이래로 한 번도 그 자리를 인간에게 내주지 않고 오직 자동차만이 지배했던 광화문 한 복판을 막아서서 자동차를 부셨다는 것은 내게는 무엇보다도 급진적인 '반체제 운동'인 것처럼 여겨졌다. 회사 앞에 늘어선, 그 주인만큼이나 거만해 보이는 검은색 고급 자동차를 보고 있자면 그 주인들에게 당한(그리고 앞으로 당할) 모멸감이 되살아난다. 그럴 때면 '작음' 때문에 숱한 농담꺼리가 된 경차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까지 일곤 한다.
2.
광화문에서 자동차를 부셨던 친구들은 요즘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로 서울의 거리를 되찾겠다며, 2주에 한 번씩 자전거 뒤에 깃발 하나 꽂고 서울 시내를 내달리고 있다. 놀랄 만큼 자동차에 적응되어 있는 서울의 거리와 인간들, 그리고 인간들의 무의식과 편견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이다. 친구들은 자동차에 밀려 더 이상 교통수단으로서 실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자전거를 되살려 불러들이고 있다. 자동차를 때려부순 자들이 탈것으로.
거창하게 말해본다면 자전거가 교통수단의 '적정기술'이 아닐까? 지속가능한 교통수단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환경친화적이고 평등한 기술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아니다. 콘크리트 도로와 빠른 자동차로 대표되는 꽉 짜여진 억압체제에 저항하는 투쟁의 상징일는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사야겠다. 저항으로, 변혁으로 자전거를 타자. 같이 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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