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호] 우리나라 합의회의 추진과정에서 나타났던 문제점 (4)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1999/06/15 00:00
우리나라 합의회의 추진과정에서 나타났던 문제점 <4>
연재순서 (4회 분재)
1. 합의회의의 출발
2. 과민모의 참여
3. 합의회의 주제의 선정
4. 조정위원회의 구성과 역할
5. 시민패널의 구성과 준비
6. 전문가패널의 선정
7. 언론의 문제
8. 정치권의 반응
9. 시민단체의 역할
10. 국제적 협력의 문제: TA기구, 외국 시민단체
11. 프로젝트책임자/사무국/주최기관의 문제
8. 정치권의 반응
합의회의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적 논쟁이 되는 기술문제에 대해 일반시민의 판단을 구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시킴으로써, 참여와 합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 합의회의 주제였던 '유전자조작식품'에 관련된 정치권에는 국회를 포함하여 식의약청, 농림부, 환경부, 과학기술부 등 다양한 부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국회나 정부 산하의 기구에서 합의회의를 주최하는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유네스코한국위원회라는 민간기구가 주최한 우리의 합의회의는 자칫 민간차원의 행사로만 그치고 정책결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못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처음부터 제기되었다.
그래서 실무진에서는 합의회의 개최사실과 그 최종결과를 관련 정치권에 알리고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의 과학기술정보통신위를 비롯하여 정부의 각 부처 담당자들에게 초청장은 물론 필요한 자료를 수 차례 송부하였고 요청시엔 직접 방문하여 설명도 하고 관심과 협조를 당부하였다. 또 전문가패널과 조정위원회에 관련된 핵심적 연구기관들의 인사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유전자조작식품'을 주제로 국내 최초의 합의회의를 한다는 사실만큼은 관련 부처의 담당자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짐작이 된다. 그러면 합의회의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과연 만족스러운 것이었을까?
대체로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정치권의 관심과 참여가 기대에 못미쳤다는 사실이다. 실무진의 적극적인 연락과 홍보에도 불구하고 합의회의 행사에 정책결정자들이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식의약청장이 축사를 하러 참석한 걸 제외하곤), 최종보고서를 관련 부처에 다 송부한 후에도 그 어떤 반응과 사후조치가 합의회의 결과에 따라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둘째로, 합의회의 개최에 대해 미약하나마 정치권이 보인 호응은 국회와 정부가 좀 다른 것으로 보였는데, 국회에서는 작년 정기국회를 위해 국회사무처에서 작성한 <국정감사자료집>에 이번 합의회의 개최 사실을 두 면에 걸쳐 소개하는 등 매우 호의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반면, 정부 부처들에서는 이번 합의회의의 결과를 기대한다기보다는, 시민을 참여시키는 이러한 형식의 행사가 정부에서 바라지 않는 결론(예컨대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한 반대)으로 나타날까봐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위와 같은 반응은 사실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일로서, 첫번째 합의회의의 시도에 대한 반응으로서는 그리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정치권에서는 아마도 지난 번 합의회의 개최가 엉뚱한 돌출 행사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는(국내의 맥락에서 볼 때) 생각이 들고, 아직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과학기술자와 정치가 및 관료들이 독점해오던 과학기술정책이라는 영역에 보통의 시민들이 합의회의라는 형식으로 참여하고 발언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9. 시민단체의 역할
합의회의에서 시민운동단체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시민운동은 당위적으로는 보통 시민들의 생각과 이해관계(혹은 '공익')을 대변하기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시민참여'는 모든 시민운동이 당연히 지지하는 하나의 가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합의회의처럼 정작 보통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주도하여 어떤 정책에 대한 논의를 하고 그 결론을 사회와 정치권에 직접 제시하는 방식의 시민참여제도에서는 시민운동단체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민의 대표 역할을 자임하던 단체가 합의회의에서는 기껏해야 전문가패널의 일부로 포함이 될 뿐이다. 심지어 주어진 주제에 관해 시민단체가 지닌 입장과 합의회의의 시민패널이 내린 결론과는 어긋날 수가 있다(아니 아마도 그런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예컨대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해 시민단체는 강력한 반대를 주장하는데 반해 시민패널은 표시제를 통한 제한적 허용을 주장할 수 있다. 이 경우 시민의 견해를 대변한다던 시민단체의 정당성과 대표성은 훼손이 되고,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알게 모르게 부여되었던 시민사회에서의 엘리트적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작년 6월 15일에 열었던 합의회의 워크샵을 기점으로 하여 실무진에서는 국내의 관련 시민단체들에게 널리 합의회의의 개최 사실을 홍보하였다. 반응은 대체로 참신하고 좋은 시도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당시까지만 해도 '유전자조작식품'이 왜 중요한 문제이고 시민운동이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아는 단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합의회의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시민운동 자체를 위해서도 큰 문제라고 여겨졌다. 여기서 나와 한재각씨 등 합의회의 실무진에 참여한 과민모 회원들의 임무는, 합의회의의 성공적인 추진과 더불어 시민운동권에 유전자조작식품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사실상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한 비판적 세력이 뚜렷이 형성되어 있지 않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대로 합의회의를 연다는 것은 한쪽의 세력과 전문가만이 있는데 '무얼 누구와 합의할 게 있느냐?'는 당연한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는 합의회의가 이미 무르익은 사회적 논쟁에 대한 '합의' 촉진만이 아니라, 아직 시민사회가 잘 모르고 있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주의 환기라는 선도적 역할이 있다는 걸 인정할지라도 너무 일방적인 상황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과민모 차원에서 여러 시민단체의 간사들에게 제안서를 띄워 생명공학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학습과 정보공유를 하자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주지하다시피 이 모임은 이후 꾸준히 성장하여 작년 9월에 지금의 <생명안전윤리연대모임>으로 탄생하였던 것이다. 이 연대모임의 본격적인 활동은 작년 9월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던 '생명공학육성법 개정관련 시민단체 토론회'부터 시작되었다. 이어서 이 연대모임에 참여한 단체인 <녹색소비자연대>가 9월 29일에 유전자조작식품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10월 20일에는 역시 연대모임에 참여한 단체인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 외국의 유전자조작식품 반대운동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표시제를 중심으로 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하여 과민모와 아울러 소비자단체, 환경단체들을 중심으로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한 비판적 시민운동세력이 점차적으로 형성이 되었고, 이들의 활동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유전자조작식품은 국내에서도 사회적 쟁점의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합의회의가 열렸을 때 시민단체들이 보여준 관심도와 참여의 수준, 그리고 태도는 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관심있을 만한 모든 시민단체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과민모가 속해 있는 참여연대와 조정위원중 한 분이 속한 기독교환경운동연대의 두 단체를 제외하곤 어느 단체의 대표들도 참석하지를 않았다. 위 연대모임에서 활동하던 각 단체의 간사들은 대체로 잠깐씩이나마 참석하였으나 관심은 전문가패널의 발표가 있던 첫날에 집중되었고, 오히려 합의회의의 진정한 결실이자 목적을 보여주는 최종일의 시민패널 보고서 발표시에는 거의 참석한 간사가 없었으며 그 내용에 나중에라도 관심을 표해오는 단체가 드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물론 지난 번 합의회의가 시민단체의 제안이나 공식적인 참여로 시작된 것도 아니었고(*참고로 99년 3월 호주에서 열렸던 유전자조작식품에 관한 합의회의는 호주소비자연맹의 제안으로 출범되었다 함), 과민모를 제외하곤 합의회의의 의의나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단체도 없었다는 것이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혹시 이는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이 그동안 '시민참여'를 열심히 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진정한 시민참여를 실현시킬 방안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증좌가 아닐까? 시민단체 역시 그야말로 보통 시민의 생각이나 목소리보다는 전문가의 견해에 의존한 시민운동을 벌이는 엘리트주의의 타성에 젖어 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이는 결코 국내의 시민운동을 비난하거나 탓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합의회의는 '과학주의' 혹은 '전문가주의'가 단지 정부와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시민운동조직에도 알게 모르게 팽배해 있음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시민지식'(lay knowledge)의 가치와 중요성이 부각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기농업을 직접 해봤던 시민패널 구성원은 실험실에서만 유전자조작작물의 재배를 해본 전문가가 미처 몰랐던 측면에 대해 의미있는 지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번 합의회의를 통해 전문가의 권위적 태도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히 인식된 반면, 전문가지식의 국지성(locality)이라든지 시민적 가치나 시민지식의 독자적 중요성이 기대만큼 분명히 부각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합의회의가 성공적이려면 그리고 시민운동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려면, 바로 이 전문가주의의 맹점과 시민지식의 중요성을 적극적이고 명시적으로 보여주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10. 국제적 협력의 문제: TA기구, 외국 시민단체
합의회의는 참여민주적 방식의 새로운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 TA)로서 대성공을 거두어 현재 급속히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12개국에 걸쳐 35건의 합의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한다(전세계의 TA활동에 대한 동향 파악과 각국 TA기구와의 링크를 위해서는 비엔나에 위치한 Institute of Technology Assessment가 개설한 사이트 http://www.oeaw.ac.at/ ita/www.htm을 참조, 그리고 합의회의에 관한 전세계의 동향에 대해서는 미국 Loka연구소의 사이트인 http://www.loka.org/pages/worldpanels.html을 참조할 것). 따라서 우리나라의 합의회의 개최는 단지 국내적 중요성만을 지니는 일이 아니라, 이를 통해 국제적인 TA 혹은 합의회의의 커뮤니티에 우리도 합류하여 주목을 받게 되는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유전자조작식품'이라는 주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외국의 시민단체들(예컨대 Greenpeace, Third World Network 등)에서 뜨거운 쟁점으로 다루어온 것이었던 데다가, UNESCO에서 1993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생명윤리사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에서 추진된 것이어서 이번 합의회의 개최는 여러 모로 국제적 연관과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나와 실무진은 추진 초기부터 우리의 합의회의 개최 사실과 추진 상황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가능한 협력을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예컨대 98년초 열린 일본의 최초 합의회의 책임자였던 와까마쑤교수를 초빙하여 워크샵을 가졌고, 97년 10월 한겨레신문과의 합의회의 취재시 알게 된 미국 Loka연구소의 스클로브박사에게 우리의 합의회의 개최를 알렸다. 그리고 때마침 덴마크의 합의회의 주관기관인 DBT(Danish Board of Technology)에서 개설한 국제적 TA 메일링리스트 (http://www.tekno.dk/tamethod. htm 에서 누구나 가입 가능)를 통하여 이에 가입한 여러 나라의 전문가들에게 우리의 행사를 홍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덴마크, 영국, 호주 등지에서 우리의 합의회의 개최를 축하하며 그 결과를 꼭 알고싶다는 연락이 오기도 하였다.
우리 실무진은 국제적인 홍보와 협력을 위해서는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영문보고서를 올려놓는 일이 필수라고 일찌감치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전문성이 있는 인력이 상당한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어서 의욕과는 달리 힘에 부쳐 제대로 추진이 되지 못했다. 결국 행사 전에는 한글로 된 간단한 홈페이지를 만드는 데 그쳤고, 시민패널보고서 등의 영문 번역작업은 계속 지연이 되어 합의회의가 끝난 지 6개월이 지난 최근에서야 완성이 된 상태다. 외국에서 우리 합의회의에 대해 보여준 관심과 기대에 부응할 신속한 국제 홍보작업은 결국 역량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고 자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올해 열릴 제2차 합의회의에서는 이 문제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텐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전문성 있는 인력이 자원봉사를 하지 않는 한 현재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예산 한계 내에서는 해결되기 힘든 문제라고 보인다.
11. 프로젝트책임자/사무국/주최기관의 문제
이제 이 합의회의를 주관하고 실무를 담당했던 나를 포함한 주체들에 대하여 간단히나마 자기성찰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기서는 합의회의를 성공적으로 추진할 만한 역량을 이들이 지녔느냐는 문제는 스스로 평가하기에 적절치 않으므로 논외로 하고, 합의회의의 주관자로서 요구되는 '방법론적인 중립성'(methodological neutrality)을 제대로 지켰는지에 대해서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즉 시민패널이 공정하게 구성이 되고 균형된 정보제공과 자유로운 토론분위기를 통해 시민패널이 스스로의 합의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의 여부이다.
이 문제도 나의 진술보다는 시민패널에 참여했던 분들에게 묻고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더 신뢰성이 있겠지만(*사실 합의회의가 끝난 후 시민패널 구성원들에게 간단한 설문지를 보내어 평가와 건의사항을 받도록 하였는데, 이 조항은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해 빠졌음), 프로젝트책임자인 나의 소감을 말하는 것도 참고사항은 되리라 여겨진다. 우선 주최기관인 유네스코한국위원회와 사무국의 자세에 대하여 말하자면, 공식적인 조직상으로는 정부에 가까운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권태준 사무총장님을 비롯하여 이승환 부장, 전성민 과장 등이 모두 합의회의와 같은 시민참여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분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주제인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하여 조직이나 개인 차원에서 어떤 이해관계나 선입견도 가지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다만 유네스코 본부가 93년부터 산하의 국제생명윤리위원회(IBC)를 중심으로 생명공학의 윤리와 안전에 관한 활동을 해왔고, 따라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도 이에 조응하는 방향의 활동을 해야 할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이는 유전자조작식품의 경우에도 무조건의 찬성보다는 생명윤리와 안전의 면에서 검토를 거쳐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97년 11월에 유네스코 본부에서 발표된 <인간게놈과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는 일방적으로 윤리와 안전만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연구의 자유와 인류의 복지 증진이라는 면에서 생명공학의 긍정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는 것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이러한 전체적 분위기는 합의회의가 추구하는 바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이 분들은 합의회의의 본래 취지와 목적대로 성공적인 추진을 하는 것 자체가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바라는 바임을 누누히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 프로젝트책임자인 나에게 모든 재량권을 부여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아직 국회가 합의회의 개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에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합의회의를 개최하기에 아마도 지금으로선 가장 적합한 기관이 아닌가 판단된다.
위에서 언급한 '방법론적 중립성'과 관련하여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그것은 합의회의의 실무자이면서 시민운동단체인 과민모에 속한 나와 한재각씨, 이혜경씨에게 있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과민모는 전문가의 독점영역으로 있던 과학기술에 대해 시민참여를 촉진함으로써 현존 과학기술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나아가서 (필요한 영역에서) 대안적 과학기술의 구성을 지향한다. 이 점에서 합의회의는 과민모의 목표와 잘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생명공학에 대한 국내의 관점이(특히 작년 합의회의가 열릴 당시만 해도) 거의 일방적으로 기술중심주의적이고 경쟁력우선의 관점에 치우쳐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따라서 국내의 시민사회에서 과민모의 역할은 단지 생명공학정책에 대한 시민참여가 아니라, 그 전에 먼저 생명공학의 윤리와 안전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논의를 소개함으로써 관점의 균형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민모는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앞장서 소개하면서 동시에 합의회의를 실질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나와 한재각씨, 이혜경씨에게 부과된 이러한 이중적 역할 때문에 혹자는 이번 합의회의의 공정성을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합의회의 일에 임해서는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보다는 합의회의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실무적 뒷받침을 하는 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우리 셋과 다른 과민모 회원들 사이에서도 생명공학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지만, 적어도 이번 합의회의에 임해서 우리의 우선순위는 합의회의의 본래 취지에 맞게 '방법론적 중립성'의 원칙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는 합의회의라는 주어진 공간 내에서 '유전자조작식품'에 관한 긍정적 입장과 부정적 입장을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된 정보를 시민패널에게 제공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상황(합의회의 당시)과 비교해보면 부정적 입장의 정보가 많이 들어간 것이라고 유전자조작식품의 옹호자들은 비판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합의회의의 목적은 정보가 골고루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타나는 시민사회의 피상적 여론을 그냥 비례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찬반의 관점과 정보가 균형되게 주어진 상황에서 보통 시민의 진지한 판단과 의사결정을 알아보려는 것이 그 취지라고 보는 것이다. 만일 이를 내가 잘못 이해했거나 잘못 끌어갔던 것이라면 나는 합의회의의 프로젝트책임자로서 적격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
이것으로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네 차례에 걸쳐 장문의 연재글을 써 주신 김환석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래 연재순서에 들어 있던 '12. 본행사에 대한 평가'는 본문의 다른 파트를 서술하면서 충분히 언급되었다고 판단되어 마지막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작년 11월에 열렸던 우리나라 최초의 합의회의의 준비과정과 행사 진행과정, 그에 대한 다방면의 상세한 평가를 담았던 이번 연재글은 여러 모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연재글에 담겼던 제 1차 합의회의에 대한 반성을 거울삼아 올 9월에 두번째로 열릴 '생명복제기술에 대한 합의회의' 역시 성공리에 치루어지기를 기원해 봅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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