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호] 기획번역 (2) 과학비평은 왜 안되는가? ( 2 )*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1999/10/15 00:00
나는 여기서 [기술과학] 비평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두 가지 사례를 검토해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비평가가 제도화된 기술과학에 대해 어떻게 처음부터 '타자'로 존재하게 되는지, 혹은 어떻게 '타자'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사례는 나 자신이 경험한 것인데, 여기서 비평가(철학자)로서의 나는 처음부터 [과학계] 외부의 비평가로 간주되었다:
뉴욕 롱 아일랜드의 쇼어햄(Shoreham) 핵발전소의 가동과 관련된 쟁점을 토론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여러 학문분야[discipline]들을 포괄하면서 이들간에 협동 작업이 이루어지는 ― 역주) 과학자 패널에서 일어난 일이다. 핵사고가 일어날 것에 대비한 대피 계획(롱 아일랜드의 모든 주민을 대피시킨다고 상상해 보라!)을 승인하기에 앞서, 발전소는 낮은 출력으로 시험운전에 막 들어간 상태였다. 과학자 패널 중에는 과거 맨해턴 계획에 연루되어 있었던 신랄하고 노골적인 스타일의 물리학자 맥스 드레스덴(Max Dresden)이 있었다. 그의 발표는 전문성을 옹호함과 동시에, 전문가의 결론에 대해 대중적 토론을 허용하는 것조차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핵에너지가 가장 깨끗하고, 안전하고, 궁극적으로 가장 값싼 전력원이라고 주장했으며(당시는 체르노빌 사고 전이었다), 쇼어햄 발전소의 가동에 반대하는 것은 ―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논쟁에 끼어들게 되었다. 나는 먼저 맥스로 하여금 전문성에 대한 옹호를 앞서보다 더욱 강한 어조로 되풀이하도록 유도하였다 ― 이제 그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기술적으로 복잡한 쟁점에 찬반투표를 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어 나는 그에게 쇼어햄 논쟁이 '과학적'인 성격의 것인지 '정치적'인 성격의 것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는 열을 내어, 그러나 슬픈 듯이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가 정치학 분야의 전문가인지를 물었고, 그는 발끈 화를 내며 아니라고 했다. 이에 대해 나는, 만약 그렇다면 전문성에 대한 당신의 주장을 따를 때 당신은 정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되며 정치적 과정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맡겨 두어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후에 쇼어햄 발전소가 가동을 중지하고 해체되는 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날 교수클럽에서 맥스가 내게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있는 대로 크게 내어 나를 공격했다. 그는 현재 가지고 있는 '반과학적' 성향으로 볼 때 철학과 전체가 해체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례가 제도화된 '전문가 신화' 내에서 비평이 외부화되는 과정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두번째 사례는 비평가가 처음에 과학계 내부에 있었던 경우, 즉 "내부고발자(whistle-blower)"의 예이다: 1991년 "걸프전" 때의 뉴스 보도를 혹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전략방위계획(Strategic Defence Initiative, SDI, 1980년대 냉전 치하의 레이건 행정부에서 시작했으며 속칭 "별들의 전쟁(Star Wars)"이라고 불렸다. 군사 위성 등을 이용해 대공망을 구성함으로써 적의 공격으로부터 미국 본토를 지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 역주)을 통해 개발된 신무기 중 하나인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의 시험 운용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뉴스 방송에서는 '요격 성공(interception)'으로 추정되는 장면들을 반복해서 보여 주었으며, 패트리어트의 요격 성공률이 95%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뒤이어 나타났던 좀더 비판적인 분석에서는 성공률 혹은 '명중률(hits)'이 24%까지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탄도학 전문가이자 MIT의 과학자였던 테오도르 포스탈(Theodore Postal)이 수행한 초기 분석에 부분적으로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뉴스에서 '명중'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던 비디오 장면들을 모아 컴퓨터 이미지 테크닉을 이용, 이를 확대하고 화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자세히 살펴본 결과 뉴스에서 명중이라고 주장했던 장면들이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는 패트리어트가 적의 미사일을 명중시켰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만, 미사일 제작사인 레이씨언(Raytheon) 사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레이씨언 사의 자문역을 맡고 있던 포스탈의 동료 샤울 에즈키얼(Shaoul Ezekiel)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중에 가면 주장과 반대주장의 십자포화에 휘말리게 된 MIT 역시 포스탈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간의 싸움은 지저분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레이씨언 사는 포스탈이 비디오테이프 이미지들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암시했다가, 나중에는 (에즈키얼의 주장을 따라) 비디오테이프 이미지의 입자 구조와 영상이 너무 거칠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주장을 완화시켰다. 이 논쟁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특히 행위의 도덕성을 문제삼아 포스탈과 에즈키얼 사이에 논쟁이 이어지고 있으며 MIT는 레이씨언 사로부터 매년 받고 있는 많은 액수의 자금 때문에 논쟁에 끼어드는 것을 피하려 하고 있다 (Science, 23 February 1996, pp. 1050-1052를 보라).
이것은 특수하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사이언스} 지는 "내부고발이 치르는 대가(costs of whistle blowing)"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제도로서의 과학 내부에 있는) 내부고발자들의 2/3 이상이 '왕따'를 당하거나 '진술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거나 고용계약 갱신이 사실상 거부되어 직업을 잃는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Science, 5 January 1996, p. 35). 오랜 시간을 끌었던 '데이빗 볼티모어(David Baltimore)' 사건은 이러한 시나리오가 들어맞는 또하나의 사례가 될 텐데, 여기서는 자료를 날조했던 범죄자가 아니라 내부고발자가 파면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내부의 비평가는 고립되고 (가능하다면) 많은 경우에 파면되어 결국 외부인이 되거나 '타자'가 되어 버린다.
위의 시나리오는 일반 기업들에서 일어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업 부문에서 이러한 왕따 현상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 추구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교회에 훨씬 더 가까운 과학의 대중적 이미지에 비추어 본다면 이러한 사실은 놀라움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제도로서의 과학이 교회보다는 회사와 같은 세계와 훨씬 더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과학에 충분히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과학비평
지금까지 서술된 내용은 과학비평이 맡아야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는 여태껏 과학비평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위에서 인용한 두 가지 사례는 그것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일단 논외로 한다면, 과학계 내부로부터의 비평과 외부에서 가해지는 비평 모두가 실제로 이루어져 왔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과학비평의 역할이 미술이나 문학비평의 역할과 다를 뿐만 아니라 미술이나 문학비평과 같은 방식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술비평가나 문학비평가는 비평이 너무 지나쳐서 대중의 공분을 자아낼 정도가 되지 않는 한, 파면되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위협을 받는 등의 일을 거의 겪지 않는다. 이런 차이에 더해, 우리가 [과학 영역에서] 그러한 제도화된 비평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부문, 즉 과학철학 분야가 그 동안 제 역할을 해 오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여기서 [제도화된 과학비평 영역에서의] 이러한 공백이 왜 생겨났는지의 원인을 세세하게 추적해 볼 여유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과학철학의 전통들 ― 실증주의와 분석철학의 전통,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실용적 분석철학의 전통에서 유래한 ― 이 마치 문학평론가가 문학에 대해 갖는 것과 같은 열정적인 관점을 자신들의 연구대상[즉, 과학]에 대해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평이라는 형태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과학을 정당화하고 심지어 과학을 모방하려는 시도, 즉 한마디로 철학을 좀더 과학'스럽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과학철학이 규범적(normative)인 색채를 띠는 경우에도 그것은 이상화된 합리적 개념론(rationalistic conceptualism)을 판단의 잣대로 삼았다. 초기의 실증주의적 시도들은 과학에서 순수한 논리적 형태를 분리해 내어 그것으로 과학을 규범적으로 판단하려 했는데, 이는 지질학 같은 과학 분야를 '비과학적'이라고 선언하거나 생물학 분야의 대부분을 사회학과 유사한 '말랑말랑한' 과학으로 격하시키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과학철학보다는] 두 가지 다른 철학 분야가 과학비평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좀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 하나는 다양한 유형의 '응용윤리학(applied ethics)' 분야들인데, 이는 의학적 맥락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술철학의 여러 분파들인데, 이 분야에서 비평이 가진 유효성의 정도는 앞서 위너가 언급했던 "반기술적"라는 영예(?)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각각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응용의료윤리학은 계속된 학습을 통해 의과대학과 병원 내에 부분적으로 제도화되어 왔으며, 그 속에서 평가와 반성의 실천을 실제로 수행하는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 기술철학자들은 다양한 구체적·개별적 기술들을 '기술 일반'으로 물화(reify)시킴과 동시에 '소외'니, '기술'에 대한 '자연'의 포섭이니 하는 지나치게 포괄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비평에서 과도하게 일반적인(generic) 경향을 띠어 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과학계] 외부와 내부의 비평가들은 여전히 '타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일까? 과학비평을 미술비평이나 문학비평과 유비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남긴 채?
과학비평가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 것인가?
이러한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여기서 뭔가 미래를 향한 예측을 내놓는 것이 나의 의무일 듯 싶다. 만약 내가 과학비평가의 등장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은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 것인가?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 몸담게 될 것인가?
미술이나 문학과의 유비를 계속 밀고 가 본다면, 나는 우선 과학비평가는 [미술비평이나 문학비평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폭넓은 지식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단지 많은 지식을 갖춘 아마추어 ― 자신의 연구대상에 대한 '애호가' 차원의 ― 의 수준은 넘어서면서도 완전히 [과학계의] 내부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점차로 몇몇 과학철학자들은 이 점을 깨닫고 있다: 이언 해킹(Ian Hacking)은 과학 기구들, 특히 현미경을 다룬 자신의 저작에서, 철학자들이 어느 정도는 "과학자들 속으로 들어가 같이 생활하고 그것에 익숙해질(go native)"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한 나는 과학비평이 개념적 분석의 문제라기보다는 작업에서의 암묵적인 노하우의 형태를 포함하는 과학적 실행 과정을 배우는 것에 더 가깝다는 해킹의 견해에 동의한다.
둘째로, 이 역시 미술이나 문학비평과 유사한 것인데, 비평에 종사하는 아마추어가 완전히 전업적인 예술가나 작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평하는 것에 아주 서툰 것에서 알 수 있듯, 완전한 자기동일시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은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좀더 포괄적이고, 좀더 학제적이고, 좀더 '거리를 두는' 것이 비평을 위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미술이나 문학비평과 대단히 유사한 측면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나는 기술과학이 미술이나 문학비평에서 일어나는 것 이상의 뭔가를 요구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예로, 미술이나 문학비평은 그것의 연구대상에 대해 여전히 '저자의 지위를 중시하는 패러다임(authorship paradigm)'을 따르고 있다. 비평가들은 마치 작가나 예술가처럼 자신의 서명을 표기하고 싶어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는 개인들로 남아 있으며,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고 따라서 비평의 결과물에 대한 찬사와 비난 모두를 혼자서 감내한다. 그러나 과학은 이와는 다르다: 과학의 스타일은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이며, 무엇보다도 집단적이고 간주관적(intersubjective)이다. 더우기 그것의 근저로 내려가면 심지어 발견의 과정조차도 간주관적이고 점차로 여러 가지 관점들이 개입하는 과정이 되어 가고 있다. 나는 비평가, 즉 철학자가 이 과정 속에 보다 완전하게 들어가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측면은 [여러 분야간의] 협력이다. 스토니 브룩(Stony Brook)에서 우리는 그러한 협력의 한 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뉴욕 대학 논리실험실(Logic Lab)에서 컴퓨터 모델링한 철학 문제들을 놓고 패트릭 그림(Patrick Grim)과 게리 마르(Gary Mar)가 공동작업을 통해 이루어낸 결과물이 그것이다 [이 중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컴퓨터공학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는 인문학과 공학간의 학제적 협력연구의 사례가 되는 것이다 ― 역주]. 그들의 연구는 ― 비록 어떤 직접적인 의미에서 과학비평의 사례라고 볼 수는 없지만 ―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지에서 주목할 정도로 높이 인정받았고(Scientific American, April, 1993), 협동 모형에 기반해 퍼지 논리와 게임 이론에서 혁신을 이루어낸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결국 간단히 말해, 우리는 '떼지어 모여야' 하며 협동적이고 간주관적인 작업을 통해 비평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또다른 측면은 '과학자들 속에 들어가 함께 생활해 보는 것'과 협력연구의 결과 양자 모두와 관련된 것으로, 과학비평가는 기술과학적 과정의 결과에 대해 [사후적인] 비평을 가하기보다는 그것의 기원에서부터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응용윤리학 분야가 지닌 한 가지 결함이, 그들이 마치 전쟁터에 파견된 야전 구급부대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그들은 부상자들을 치료할 수는 있지만, 전쟁을 예방하거나 전쟁의 결과가 덜 비참하도록 개선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은유를 계속 밀어붙이자면, 비평가가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의] 결과에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전쟁이 벌어지기 전의] 장군들의 전략 계획 장소에서부터 참여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부터 비판적으로 참여한 사례는 매우 드물고 찾아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제도로서의 과학 내부에 있는 배제 세력이 그러한 참여를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사례들을 인용할 수는 있다 (최근에 발견한 그런 사례들은 내가 쓴 책 {기술철학 Philosophy of Technology}(Paragon, 1993)에 언급되어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북유럽의 공과대학들을 방문했을 때 발견한 것들이다.
스칸디나비아와 네덜란드의 공과대학들에서는 철학자들이 연구팀에 포함된다. 그들은 종종 평가의 맥락에서 기술을 평가하고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윤리적·사회적 결과들을 고려하는 작업을 맡으며, 다른 종류의 기능(skill)이 요구되는 일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곳에 갔을 때, 나 역시 연구 설계를 리뷰하거나 그것에 대해 자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음으로써 점점 이러한 맥락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내가 겪었던 한 가지 사례를 들면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덴마크에는 병원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의료상의 특정한 위기상황의 문제를 다루는 연구팀이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그려보자. 한 환자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마취가 되어 있다. 그의 몸에는 각종 장비들이 부착되어 있고 거기에 연결된 일련의 기계장치들은 환자의 생명 신호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다이얼, 알람 소리, 오실로스코프 등, 이 모든 것들은 의사가 '읽도록' 해석을 요하는 표시장치의 일부분이다. 각각의 장치들은 수치가 미리 정해진 값에 도달하면 경고음을 울리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러나 숙련된 의사들은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 수술 도중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경고음이 '[실제로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가짜 경고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결정적인 판단을 요하는 지점에 이른다. 의사가 경고음을 무시하였는데 그것이 '진짜' 경고음이었을 경우, 환자에게는 위험이 닥치게 된다. 그러나 반면 경고음이 '가짜'였는데 의사가 상황을 알아보고 바로잡기 위해 수술을 중지한다면 또다른 위험이 닥칠 것이다.
여기서의 딜레마는 대부분의 경험 많은 외과의사들이 경험을 덜 쌓은 외과의사들에 비해 경고음을 무시하는 경향이 더 강하며, 이는 종종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 '진짜' 위기상황을 '가짜' 위기상황으로부터 판별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되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볼 때 이 문제는 '해석상의' 문제, 즉 [신호를] 제대로 읽었는가의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과학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의 결과는 가공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구적 텍스트를 넘어서는 '자연', 즉 환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과학]비평가는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비평가들이 '과학비평'이 무엇인지를 규정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일 것이다.
*출전: Don Ihde, "Why Not Science Critics?"(1997). [http://www.sunysb.edu/philosophy/faculty/papers/Scicri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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