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호] [독자투고] 생명소외(生命疎外)로서의 복제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1999/10/15 00:00
'인간조건'과 기술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인간조건 The Human Condition}(1958)을 1957년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성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아렌트는 인간실존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로 생명을 꼽았고, 지구가 생명의 근원적 조건인 탄생성을 가능케 하는 토대라는 점에
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에 나왔을 때는 그만큼의 변화된 상황에 대한 주의와 고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유전자조작 생물이 실험실에서 만든 환경에서 괜찮았다고 나중에 세상에 나왔을 때 수많은 SF에서 나온 괴물영화처럼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비행기가 원자력발전소 돔에 충돌해도 끄떡없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해도 관리 소홀 이나 무리한 사용으로 고의든 사고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과학적인 결과든지 결과를 낳은 조건과 가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바로 안전불감증이고 "비과학적인" 태도이다. 내가 수업시간에 들었던 썰렁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미국 어디엔가 UFO가 떨어졌다는 기사를 읽고 한 학생이 그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를 찾아가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교수는 단호하게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황한 학생이 다시 묻기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라고 하자 그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지금까지 UFO의 비행 모습으로 보면 우리보다 월등히 앞선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과학기술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우주선 추락을 막을 수 있는 과학기술을 가지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
서 가장 핵심적인 인간조건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인간이 과학기술의 힘으로 지구를 벗어나려는 최초의 시도에 성공한 사건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지금은 그다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지만, 지구상의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이른바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shock)'으로 가슴깊이 기억되었다. 우주개발에서 자신들이 앞서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미국인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와신상담한 끝에 12년 후인 1969년 7월 소련보다 먼저 유인 달착륙에 성공했다. 이 냉전의 결과물이 탄생한지 꼭 30년이 되는 지금 우리는 아렌트가 인간실존의 1차적인 조건이라고 했던 생명 그 자체의 조작과 복제를 더 이상 미래의 가능성이 아닌 현실의 문제로 직면하고 있다. 지난 9월 13일 한국유네스코가 주최한 "제 2회 생명복제기술 합의회의"에서 16명의 시민패널들이 전문가들과의 토론을 거친 끝에 "인간의 생명은 수정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한 복제 실험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발표하고 있을 때 발표장 바깥에서는 클로나이드라는 인간복제회사 한국지사의 직원들이 "Yes Cloning!"이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삶의 조건이자 생존환경이다. 우리는 공기를 숨쉬듯 기술과 기술품(技術品)들에 둘러싸인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시간 역시 자연의 대응물을 갖지 못한지 오래다. 산업화가 요구하는 초정밀시대의 1초는 세슘 원자의 충돌회수로 결정한 인공물(artifact)일뿐 더 이상 지구의 자전과 대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공간성과 시간성의 변화에 이어, 생명 자체를 둘러싼 변화가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생명공학의 세기 The Biotech century}라는 최근 저서에서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의 기간 동안 우리의 삶은 지난 천년 동안 겪은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변화의 핵이 생명공학(biotechnology)과 복제기술임은 물론이다.
기계론적 생물관의 인식론적 뿌리
몇 해 전 복제양 돌리가 탄생하면서 곧바로 인간복제를 둘러싼 논란이 시작되었지만, 최근들어 인간복제를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가령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잘 알려진 과학소설(SF) 작가인 아서 클라크는 얼마전 <아시아위크>지에서 2100년까지 실현될 과학기술의 목록을 열거하면서 가까운 미래인 2004년에 '공인된' 인간복제가 행해질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시험관 아기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충격이 완화된 후 인간복제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인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무엇이든 빨리 잊는 대중과 언론의 속성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그 본질을 놓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엄청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고 있으며, 이러한 강요 메커니즘의 저변에서는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근대사회의 소외구조가 기능하고 있다.
근대를 근대 이전(pre-modern)과 구분짓게 만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7세기 과학혁명(科學革命)이었다. 과학혁명은 작게는 코페르니쿠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천문학과 역학(力學)의 혁명이었지만, 크게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체를 바꾸어 놓은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 Principia}(원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1687)는 운동방정식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립시켜 '포탄의 궤적에서 행성들의 운행'까지 모든 것을 역학이라는 과학 법칙으로 설명했다. 이후 과학에 의한 세계설명은 과학에 의한 세계조작으로 이어지면서, 개발과 조작은 근대성(modernity)을 구성하는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 자연이 인간의 개발 대상으로 전락하자 인간과 자연은 유기적 연관성을 상실하고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틈이 벌어졌다. 동물과 인체를 기계장치로 바라보는 기계론적 생물관의 탄생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우주가 정교한 톱니바퀴로 이루어졌다는 시계장치 우주(clockwork universe)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생물판에 해당하는 동물기계론(beast-machine)은 생태계속의 무수한 생물들이 인간과 맺고 있는 풍부한 관계를 단절시키고 '걸어 다니는 자원'이라는 대상적 지위로 국한시켰다. 나아가 인체 역시 정신과 분리된 정교한 기계장치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19세기 유럽에서는 정교한 자동인형(automaton)으로 생물체를 흉내내려는 시도가 유행처럼 일어났고, 이후 로봇과 사이보그로 인간을 모방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생명소외로서의 복제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 이래 급속하게 발전한 분자생물학은 생명현상의 본질을 DNA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계론적 인식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005년까지 사람의 유전체(genome)를 모두 해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유전자를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식의 유전자 결정론적 관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동물복제와 인간복제 시도에 이르러 과학혁명 이래 자기-강화된 기계론적 인식론은 그 절정에 도달한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의 발견이 '생명의 설계도가 DNA이고 생물은 DNA를 보관하는 용기(container)'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기까지 한걸음에 불과했듯이, 유전자 해석에서 유전자조작과 생명복제로의 진전도 한걸음에 불과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근대사회의 인식론적 환경이 그 변환을 거의 자동적으로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생명소외의 과정이다.
생명복제 기술의 근저에 깔려있는 'DNA = 생명'이라는 사고는 우선 DNA에서 35억년에 걸친 생명탄생의 과정(process)을 배제시키고 DNA를 그러한 과정과 무관한 부호(code)로 환원시킨다. 아직까지 단세포 생물에서 동물에 이르는 진화과정에서 DNA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DNA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지 않았으며, 선형적(linear)이 아닌 복잡하고 우회적인 많은 경로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체세포(體細胞) 복제기술은 유성생식(有性生殖)이라는 복잡한 생식과정을 배제하고 우량의 특성을 나타내는 개체의 유전자를 복사하듯 복제하는 기계적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 유성생식(有性生殖)이 진화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많은 생물학자들은 유성생식이 생물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낳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사실 무성생식에 비하면 유성생식은 무척이나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들을 수반한다. 가령 짝짓기에서 성공하기 위해 동물들이 벌이는 지난한 구애 행위나 한 쌍의 남녀가 만나서 아기를 낳기까지 거치는 복잡다단한 과정과 그에 따른 숱한 물리적, 심리적 비용(cost)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런 비용은 그로 인해 획득되는 풍부함과 다양성에 의해 보상되고 남는다. 어쩌면 우리가 인간스러움(humanity)의 중요한 특성으로 꼽는 고도한 뇌 기능과 풍부한 감정도 거기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복제는 생명에서 이런 모든 과정들을 제거한다. 이것은 생명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과정과 그 배경들에서 생명을 소외시키고, DNA가 탄생할 수 있었던 풍부한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다. 복제의 논리는 불확실하고 비효율적인 우회로들을 제거해서 효율적으로 '우량'의 품종(인간을 포함해서)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우량성(優良性)을 가능하게 했던 원천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과정이었으며, DNA 자체가 그러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밖에도 생명복제는 생명이 생태계(ecosystem)와 맺고 있는 물질과 에너지 순환의 연결망(network)을 간과하며, 유전자의 발현과정 자체가 기계적인 1:1 대응관계가 아니며, '유전자-발생과정-주위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사실도 무시하고 있다.
생명, 인지, 그리고 주체
근대사회는 여러 겹으로 소외를 일으켰다. 일찍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풍부한 연결망을 잘라내 자연을 개발대상으로 환원시키면서 자연과 인간 모두를 소외시켰고,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삶의 총체성에서 노동과 여가를 분리시키고 노동을 소외시켰다. 그리고 급기야는 복제를 통해 인간조건의 근본토대인 생명과 탄생성까지 소외시키고 있다. 아마도 그 결과는 지금까지 인류가 겪은 어떤 고통보다도 큰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치를 대가의 상당부분이 우리의 정체성(identity)과 연관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오토마톤에서 인간복제에 이르는 생명소외의 움직임은 그 뿌리에 깔려있는 기계론적 인식론의 극복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저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은 생명을 고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생태계의 일부이자 연결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 역시 생명의 일부로서 생태계와 분리될 수 없으며,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다른 구성원들과 풍부한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그 정체성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인식으로 발전한다. 최근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에서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는 구성주의의 한 흐름인 급진적 구성주의(radical constructivism)는 그러한 측면에서 주목받을만하다. 움베르토 마투라나(H.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Varela)를 비롯해서 이 흐름에 속하는 생태학, 생물학, 심리학, 비선형 동역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은 생명, 인지(認知), 그리고 주체의 문제를 연결망과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론을 모색한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지난 3백년 동안 우리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틀지웠던 기계론적 인식론은 쉽게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태계 파괴에서 생명 자체의 소외에 이르는 그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성찰의 요구 또한 매우 크다.
* 이 글은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9월 22일자의 '학술기획: 과학기술과 사회변동 ② 과학기술과 주체: 사이보그와 인간복제'라는 난에 "생명, 인지, 주체의 조화로 인간조건을 바꾼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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