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담이 열리고 있는 미국 시애틀에서는 WTO 뉴라운드 협상에 반대하는 세계 각국 비정부기구(NGO) 시위대에 의해 도심이 완전히 점령되었고, 결국 시당국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NGO들의 이런 격렬한 시위는 농업-환경-노동-인권 등 여러 이슈로부터 제기된 저항의 몸짓이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반대하는 적은 바로 현재의 WTO가 표상하고 대표하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세계화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2000년 이후의 세계 무역과 경제의 질서를 결정짓기 위해서 모였다는 이번의 WTO 회담에서 이처럼 선진국과 개도국을 막론하고 세계의 NGO들이 한 목소리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반대를 외치고 그것을 실력행사로 저지하려는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이제 21세기의 세계질서가 거대 다국적기업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세력과 이에 정면으로 맞서 대안적 질서를 위해 싸우는 NGO 세력 사이의 투쟁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이번 WTO 회담의 의제로 상정된 것 중 하나가 '유전자변형식품'(Genetically Modified Food)이라는 사실에 나는 주목하게 된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이라는, 일반대중에게는 이름조차 낯설고 별로 알지 않아도 불편이 없었던 첨단 과학기술이, 이제는 실험실을 뛰쳐나와 농산물에 적용이 되고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팔리며 드디어 각종 식품이 되어 대중의 식탁에 오르는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첨단 과학기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뛰어난 성공의 사례로 보일 이러한 유전자변형식품의 스토리는, 그러나 단순히 '과학기술의 승리'로만 찬양하기에는 어둡고 보다 복잡한 여러 측면들이 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35억년에 걸친 생물의 진화과정을 단숨에 뛰어넘어 인위적인 돌연변이를 만드는 것이 '유전자변형'일 텐데, 그렇게 변형된 생물체가 자연에 방출될 때 생태계에는 어떤 변화나 위험이 있지 않을까? 그러한 생물체에서 만들어진 식품을 인간이 섭취해도 건강에 이상은 없을 것인가? 더 나아가 그러한 식품을 굳이 개발해서 대량생산하는 이유는 과연 인류의 식량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거대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서인가? 그러한 유전공학적 농업이 세계시장을 지배할 때 제3세계의 농업과 농민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신자유주의 세력은 이런 모든 의문들에 대해 눈을 감도록 만든다. 유전자조작식품은 인류의 식량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길이며 제3세계를 위한 "제2의 녹색혁명"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따라서 유전자조작식품은 빨리 더 많이 개발되어야 하고 자유무역을 통해 전세계로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이를 반대하고 막는 것은 말하자면 과학기술의 진보를 반대하는 것과 같고 결국 이는 인류의 진보와 번영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어느새 과학기술은 신자유주의 세력의 편에 서 있고 그들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게 된다. 이러한 일방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이 위험한 것임은 물론, 약속했던 진보와 번영도 결코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1차 녹색혁명" 등 과거의 수많은 예를 통해 알고 있다. 오히려 그러한 과학기술 발전은 생태계의 파괴와 인간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켜 왔음을 우리는 줄곧 목도해 왔던 것이다. 이제 2000년대를 맞아 정보초고속도로로 전세계가 하나처럼 연결이 되고 휴먼게놈프로젝트로 인간생명의 모든 신비가 밝혀지며 심지어 인간복제의 시대가 열린다고 약속되는 이 때에, 거대 다국적기업 등 소수의 손에 쥐어진 과학기술 발전이 초래할 위험과 불평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공할 규모로 인류의 삶을 위협하며 어두운 미래를 예감케 하고 있다고 보겠다.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았던 20세기의 기술문명은 사회의 소수를 차지하는 전문가와 정치/경제 엘리트에 의해서 과학기술의 성격과 발전방향이 결정되어 왔고, 결국 다수의 시민은 의사결정에서는 소외된 채 대체로 그러한 과학기술이 부여하는 삶의 조건과 사회구조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개발독재에 의한 근대화를 경험해온 우리나라에서는 과학기술을 성장지상주의를 실현해줄 수단으로만 인식해온 까닭에, 근대적 과학기술의 문제점에 대한 신중한 성찰은 사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기적적 성장의 사례로 알려진 우리나라가 또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환경파괴와 안전사고 및 감시통제로 얼룩진 '복합적 위험사회'가 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신자유주의 세력의 손에 쥐어진 세계의 과학기술 발전방향에 더하여 이렇게 비성찰적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인식과 정책이 그대로 지속될 경우, 21세기에 전개될 기술문명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는 커녕 점점 더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지난 1997년 11월 22일에 출범한 참여연대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과민모)'이 이제 어느덧 2주년을 맞이하였다. 당시 출범사에서 밝혔듯이 우리 과민모는 "과학기술에서의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통해 보다 인간적이고 생태친화적인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 위에서 궁극적으로 보다 평등한 대안적 사회질서를 촉진하는 시민운동"을 추구하는 단체이다. 우리나라가 '복합적 위험사회'가 된 원인은 정부와 기업에 비해 시민사회가 약해서이고 특히 과학기술에 관한 의사결정에서 시민이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과민모는 판단한다. 따라서 시민참여를 통한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우리 사회에서 더 절실히,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과학기술에 지배받거나 무력하고 무관심한 시민이 아니라 성찰성을 지닌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시민을 위한 과학"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더 나아가서 시민사회의 민주적 결정에 의해 과학기술의 발전방향이 선택되는 "시민에 의한 과학"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과민모는 믿는다.

그동안 과민모는 이러한 목표를 지향하면서 '합의회의'와 같은 새로운 시민참여제도의 도입과 구축, 생명공학의 안전과 윤리를 확보하기 위한 시민감시운동의 전개, 시민과학강좌와 각종 출판물 발간 및 언론을 통한 시민교육과 홍보 활동, 새 세대에게 사회적 책임과 윤리에 바탕한 과학을 소개하는 대안적 교과서 개발 등에 힘써 왔다. 아직 과민모가 지향하는 원대한 목표를 실현하는 데는 턱없이 미약한 활동과 성취에 불과하다고 인정하지만, 그래도 과민모의 적은 인력과 척박한 국내의 환경을 감안할 때 지난 2년 동안 과민모가 이룩한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과민모가 없었다면 국내에서 결코 알게 되거나 시도되지도 않았을 '합의회의'와 '과학상점'과 같은 시민참여의 제도들, 그리고 정부나 일반시민은 물론 시민사회단체들까지도 무관심했던 생명공학의 안전과 윤리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하여 이젠 그것이 완전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름은 물론 법적 제도화까지 실현되게 만들었다는 점 등은 분명히 과민모가 일으킨 새로운 변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과민모도 2살을 넘었으니 NGO로서 유아기를 지나 성장기에 접어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침 2000년을 맞이하고 있으니 국내에서 유일하게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명시적으로 추구하는 NGO로서 지난 세기보다 더 고도의 기술문명이 될 새로운 밀레니엄에는 더 많은 기대와 책무가 과민모에 쏟아질 것에 틀림없다. 이번 WTO 회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21세기의 세계질서를 신자유주의 세력의 손에 맡기지 않으려면, 즉 기술문명이 더 심화된 위험과 불평등으로 점철이 되지 않으려면, 유일한 대안은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와 기술문명을 지금부터 함께 힘을 모아 만들어나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력에 맞서 싸우며 바로 이러한 대안을 앞장서 외치고 실천하는 것이 세계의 NGO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믿는다. 우리 과민모도 바로 이러한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서 새 세기에는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이 땅에서 꽃피울 수 있게 하는 시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더욱 힘차게 수행해나가기를 기대하며 또 다짐한다.

김환석(우리모임 대표, 국민대 교수)
1999/12/15 00:00 1999/12/15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PSPD/trackback/362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