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과학기술 관련 이슈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캠페인은 그리 생소하지 않다. 전자주민카드 시민사회단체 공대위와 생명안전·윤리 연대모임의 활동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개별 기술 반대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술적 위험의 평가나 연구개발비 운용 과정에서 명백한 왜곡이나 부패의 사례라도 드러나지 않는 한, 과학기술의 사회적 관리와 과학기술정책의 문제는 과학기술자 사회 및 정책 전문가의 책임일 뿐 시민사회단체가 개입할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모임은 이제까지의 활동을 통해 이 같은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별 기술의 반대를 넘어서는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참여민주주의 확대를 주장하여 왔다. 하지만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참여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이며, 이를 추구하기 위해 어떠한 구체적 활동이 따라야 할 것인가에 대해 뚜렷한 그림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를 목표로 내걸고 있는 21세기 프로젝트(의 성과와 한계)는 우리 모임이 주의깊게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90년대 초 미국의 진보적 과학기술운동 활동가들은 냉전 종식과 민주당 집권이 가져온 공간을 활용, 과학기술 발전이 군사적 응용이나 기업이윤 획득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내고 환경보호, 고용안정, 삶의 질 향상 등 중요한 사회적 목표에 부합되도록 하는 일련의 개혁 노력들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91년 CPSR(Computer Professionals for Social Responsibility) 전 대표 개리 챕먼(Gary Chapman)에 의해 설립된 비영리 연구·교육 프로그램 21세기 프로젝트도 바로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21세기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바는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로카연구소(Loka Institute)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개발의 사회적 목표와 우선순위 설정으로부터 개별 기술의 설계 및 위험성 평가과정에 이르는 과학기술 관련 의사결정들에서 대중 참여를 제도화하는 것, 즉 참여민주적 과학기술정책의 실현이다.

21세기 프로젝트의 대표적 활동 사례로는 SEMATECH의 개혁을 들 수 있다. SEMATECH은 미국 반도체 산업체들의 연구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산업체 콘소시엄이다. 21세기 프로젝트는 다른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하여 SEMATECH이 지원하는 연구개발에 반도체 생산이 작업장 안전 및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통합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고, SEMATECH은 결국 '92년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93년에는 CPSR과 함께 보고서 'Setting a New Course for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를 출간함으로써 클린턴 행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시장-주도 과학기술정책, 첨단핵심기술-중심 정책, 국가경쟁력 이데올로기 등을 비판하고 있는 이 보고서는 그 대안으로 사회적 필요-중심/참여민주적 과학기술정책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사회적 목표와 우선순위 설정에 다양한 사회 그룹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과학기술 목표 설정을 위한 국가포럼(National Forum for Science and Technology Goals)'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21세기 프로젝트의 노력이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21세기 프로젝트는 '93년 합의회의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는 '과학기술 목표 설정을 위한 국가포럼' 사업을 의욕적으로 시작하였고, 곧 적지 않은 수의 과학기술자, 정책 전문가,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으로부터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국립과학재단(NSF)으로부터 얼마간의 재정지원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몇 차례의 회의 개최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만다.

이후 21세기 프로젝트는 활동의 초점을 국가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에서 지역 단위에서의 참여적 기술 실험, 특히 정보통신기술의 분야로 수정하게 된다. 대표 개리 챕먼의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해 과학기술정책 민주화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고는 있지만 프로그램의 설립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한 셈이다. 그 배경에는 21세기 프로젝트가 개리 챕먼이라는 한 사람에 지나치게 의존해왔다는 점, 따라서 그의 거취 변동에 따라 프로젝트가 CPSR에서 텍사스 주립대학 공공정책대학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21세기 프로젝트는 텍사스 오스틴 지역에서 저소득층이 활용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 컴퓨터 네트워크를 설립, 운영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2000/01/15 00:00 2000/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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