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호] 기획번역(1) DNA 재조합 연구와 그 응용에 대한 규제*(2)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2000/01/15 00:00
NIH의 역할
미 국립보건원(NIH)은 1974년 7월, 버그 위원회의 서한이 {사이언스} 지에 실린 직후에 DNA 재조합 논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버그 서한에서는 NIH가 위험성 평가를 감독하기 위해 자문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재조합 DNA 분자의 확산을 최소화하기 위한 절차들을 개발할 것을 권고한 바 있었다.1)
버그 서한이 발표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당시 NIH의 원장이었던 로버트 스톤(Robert S. Stone)은 재조합 DNA 분자 프로그램 자문위원회(Recombinant DNA Molecule Program Advisory Committee) ― 나중에 재조합 DNA 자문위원회(Recombinant DNA Advisory Committee, RAC)로 명칭이 바뀌었다 ― 의 설치를 공표했다.2)
RAC가 내세운 목표는 버그 위원회의 그것보다는 분명히 폭이 넓었지만, 연구의 사회적·윤리적 함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고려도 하고 있지 않았다. RAC는 기술적 문제를 관장하는 위원회로 정의되었다; RAC가 조사하는 범위는 애초부터 다음의 사항들에 대한 것으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DNA 재조합체, 자연 상태에서 그것의 생존가능성, 그리고 다른 유기체에 그것이 전이될 수 있는지의 여부등에 관해 지식과 기술의 현재 상태를 조사하는 것; 특정 DNA 재조합체의 확산 가능성 및 그것이 공중 보건 및 환경에 가할 수 있는 위험을 평가하기 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권고하는 것; 그리고 연구 결과에 바탕해 규제 지침을 제안하는 것. 본 위원회는 특정한 구체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립된 기술위원회이다.3)
NIH 산하에 새로 만들어진 재조합 DNA 자문위원회는 아실로마 회의가 끝난 직후에 만나 연구 지침의 초안을 작성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최초로 만들어진 지침 초안은 과학자들로부터 너무 약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두 개의 버전이 추가적으로 더 만들어졌다. RAC는 이 중 세번째 것을 채택하여 1975년 12월에 NIH 원장인 도널드 프레드릭슨(Donald Fredrickson)에게 제출했다.
이 단계까지는 아실로마 회의 때의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있었던 과학자들만이 지침을 평가했다. 과학자사회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지침 작성 및 평가 과정에 사실상 전혀 접근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NIH가 위험성 평가의 과정을 광범한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들을 것으로 우려한 프레드릭슨은 원장직속자문위원회(Director's Advisory Committee, DAC)를 소집했다. NIH와 보건교육복지성(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HEW) 공동명의로 된 한 문서에 따르면, DAC는 "과학자사회와 일반 대중이 제안된 지침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4) 이 특별 자문위원회는 지침 초안의 작성을 담당한 기술 그룹에 비해서는 좀더 광범한 대상층을 포괄하도록 구성되었다. DAC는 보건학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판사 한 명, 생명윤리학자 두 명, 소비자단체 대표 한 명, 변호사 두 명 등을 포함하는 일군의 자문위원들로 구성되었다. 프레드릭슨은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자신 직속의 자문위원회인 DAC를 대중 참여를 고무하는 수단으로도 이용하였다. DAC는 1976년 2월 9일에서 10일까지에 걸쳐 메릴랜드 주 베쎄스다에서 최초의 공개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환경단체 대변인들과 과학자들은 이러한 시도들이 주요한 정책상의 쟁점에 대해 대중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는 지극히 미미한 노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NIH는 새로운 유전자 접합 기법과 연관된 문제들을 여전히 기술적인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규제지침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역할이 지니는 정치적 함의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즉, 미국 내에서 DNA 재조합 연구에 돈을 대는 가장 주요한 후원기관인 NIH가 이제는 규제 및 감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었다. 프레드릭슨은 이 역할을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NIH가 그 역할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곧 과학자들이 유지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고 있는 자율성을 내어주는 것을 의미했다. NIH의 관료적 구조는 과학자들이 잘 알고 있는 터였고, 과학자들은 NIH의 관리들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구 승인의 평가를 같은 분야의 동료 과학자들이 맡는 구조는 신뢰를 더욱 강화시켰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NIH가 자신들의 적이라기보다는 대변자라고 생각했다 ― 설사 NIH가 규제의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NIH는 [자신의 역할에 내재한] 이해관계의 대립에 대해 가해질 대중의 비판을 면하기 위해, DNA 재조합 연구 프로젝트들을 감독하는 다층적인 위원회 구조를 규제지침 속에 포함시켰다. DNA 재조합 연구를 수행할 모든 기관들은 상설적인 생물위험 위원회(biohazards committee)를 의무적으로 구성하도록 요구되었다. 이러한 위원회들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사항들에 대해 해당 기관에 조언을 제공하는 한편으로, 연구지원 신청들을 검토하고 프로젝트가 NIH의 DNA 재조합 분자 규제지침을 따르는 형태로 수행될 수 있음을 보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NIH의 동료 과학자 심사(peer-review) 그룹이나 연구 부서(Study Section)들이 책임을 맡았다. 이 그룹들은 각각의 연구승인 신청들이 지닌 과학적 가치, 제안된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위험들, 그리고 각 기관의 생물위험 위원회들이 내놓은 권고사항 등을 검토했다. 결국 이 그룹들은 과학적인 문제에 대한 검토의 차원을 넘어 규제기관에 준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셈이었다.6)
NIH의 재조합 DNA 자문위원회(RAC)는 보건교육복지성 장관에 대해 보고의 책임을 지면서 규제 과정에 또하나의 단계를 추가했다. RAC는 규제 지침들을 갱신하고, 숙주 벡터 시스템의 안전성을 보증하고, 대규모 실험들을 승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NIH의 책임자들이 규제지침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연구 승인과 계약들을 검토하는 책임을 졌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상과 같은 검토의 과정이 자신들의 연구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면 다른 이들은 규제지침이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검토 과정이 별반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 즉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위험들에 대한 유의미한 대응이라기보다는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전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 판단했다. NIH 자문위원회에 속한 많은 성원들이 DNA 재조합 연구를 수행하는 실험실과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계속해서 이해관계의 대립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7)
18개월간 지속된 연구의 일시중지 ― 이것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지만 ― 를 풀어 달라는 과학자들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해, NIH 원장을 맡고 있던 프레드릭슨은 모든 종류의 유전자 이식 실험에 적용되는 잠정적 규제지침을 1976년 6월 23일에 발령했다.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은 이러한 조처가 규제지침의 공포 이전에 환경영향평가발표(environmental impact statement, EIS)와 대중적 차원의 검토를 의무화하고 있는 연방환경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에 대한 위반이라고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프레드릭슨은 공포된 규제지침과 함께 배포된 27쪽에 이르는 논평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문제는 '천천히 가자'는 우려들과 빨리 전진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합리적인 균형 ― 실은 정책상의 합당한 '편향' ― 을 이룰 것인가에 있다."
그는 또한 실험실 안전은 기술적 해법을 요하는 기술적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8) 이 시기쯤에 이르면 DNA 재조합 연구의 비판자들에 의해 이 연구가 유전공학과 연관될 수 있다는 우려들이 공공연하게 표출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드릭슨은 이 문제가 NIH의 권한 밖이라고 간주하면서 자신의 논평에서 이에 대해 단지 간접적인 언급만을 했을 뿐이었다. "이 연구가 인간의 유전자를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대중이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약 미래에 그런 작업이 시도된다면 DNA 재조합 연구에서 개발된 기법들 중 일부는 연관을 가질 수도 있긴 하겠지만."9) DNA 재조합과 유전적 개입 사이에 존재하는 직접적 연관성을 부인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NIH는 공공정책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초기에는 인간 유전자치료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수년 후 NIH는 인간 유전자치료의 주창자이자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감독기관이 되면서 입장을 선회했다.
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NIH의 규제지침 하에서 작업하는 것과 의회가 제정한 규제조치들 하에서 작업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NIH의] 규제지침은 그 본질상 과학자들이 스스로를 모니터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었다. 연구를 감독하는 NIH의 다층적 위원회 구조는 동료 과학자들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은 고등 유기체와 하등 유기체간의 유전물질 교환에 관해 더 많은 지식이 얻어지면 실험실 봉쇄에 대한 제한도 완화되어 연구가 가속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NIH의 담당자들은 규제지침이 유연성을 유지해야 하며 위험에 관한 새로운 지식에 즉각 반응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했다.
그러나 NIH는 자신이 맡은 새로운 역할과 관련해 점차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먼저 국방성이나 농무성과 같은 다른 연방기구들에 의해 자금지원을 받는 DNA 연구의 문제가 있었다. 또한 NIH 규제지침은 민간기업이 돈을 대는 산업연구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셋째로, NIH는 마치 과거의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의 경우와 같이, 동일한 연구의 육성과 규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곤란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비판을 완화시키기 위해 보건교육복지성 장관은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DNA 재조합 연구에 관한 연방기구간 위원회를 설립함으로써 다른 정부기구들에서도 규제지침을 채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NIH 원장인 프레드릭슨은 관련 산업체들이 자발적으로 규제지침을 준수해 주기를 희망했다10) ― 몇몇 비판자들은 DNA 재조합 연구를 최초로 산업적으로 응용하기 위한 경쟁이 불붙는 시점에서 이런 희망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11) 그러나 대체로 볼 때 제약 및 화학산업 측이 규제조치들에 대항해 강력한 로비를 전개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했다. 몇몇 기업들은 민간연구소나 대학 연구시설에 대해서도 유사한 기준을 설정하는 법령의 제정을 심지어 환영하기까지 했다.
논쟁에 대한 대중의 참여
NIH 산하 DNA 재조합 연구에 관한 원장직속자문위원회(DAC)가 1976년 2월 9일에서 10일 이틀간에 걸쳐 개최한 공개 회의는 연방 차원의 정책 수립에서 대중의 의견을 반영시킬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NIH는 17개의 공익집단을 대상으로 공청회의 개최에 관해 공식적으로 통보하고, 규제지침 초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를 파견할 수 없는 단체들은 입 장을 진술하는 문서를 제출하도록 권고하였다. 지구의 친구들은 NIH가 쟁점을 협소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법적 책임, 지침 이행 여부에 대한 조사, 이행을 강제하는 절차 등이 제대로 정의되어 있는지, 산업적 응용으로부터 어떤 사회적·윤리적 문제들이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대중참여를 위해 심각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어떤 정치적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전미과학자연맹(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은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공청회 자리에 제출했다. 그에 따르면, 322명의 응답자 가운데 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과학자의 30%와 생물학 전공자의 25%가 NIH 규제지침이 "충분히 조심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는 더 폭넓은 과학자사회 영역 ― 대학에 자리잡은 학자들에서부터 전문가이지만 생물학에는 문외한인 일반대중까지 ― 을 논쟁 속에 끌어들이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보스턴 글로브 The Boston Globe} 지는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좀더 정교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보스턴 글로브}의 과학면 필자였던 로버트 쿡(Robert Cooke)은 19,000명의 경험있는 중견급 실험생물학자들 중 임의로 선정된 1,25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지를 우편발송하는 조사 작업을 지휘했다. 대학, 산업체, 정부에 고용된 490명의 과학자들이 회신을 보내 왔는데, 이들 중 거의 대다수가 상호 연관이 없는 생물 종들간에 유전자를 옮겨넣는 작업은 다소의 위험을 수반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응답자의 39%는 NIH의 규제지침이 좀더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익명으로 이루어진 이런 설문조사의 결과들은 NIH의 규제지침에 대해 과학자들이 공개석상에서 발언한 내용에서 시사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회의적 태도가 과학자사회 내에 존재함을 보여 주었다.
그 다음으로 NIH의 규제지침에 대한 공개적 대응이 나온 것은 환경영향평가발표(EIS) 초안이 1976년 9월에 {연방 연감 Federal Register}에 실렸을 때였다. 점차로 대중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주제라는 점을 감안하여, EIS 측은 상당히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에 대해 서면으로 광범한 의견을 제출해 주도록 요청했다.12) 이에 대해 선출직 정부관리들, 공공기구 종사자들, 그리고 전미자원보호협회(National Resources Defense Council), 환경보호기금(Environmental Defense Fund), 시에라 클럽(Sierra Club),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 보스턴 지부 등을 포함하는 시민단체 및 과학운동단체들로부터 38통의 서면 의견서가 제출되었다. 대부분의 의견서들은 실험실 봉쇄 문제를 여전히 주요한 쟁점으로 다루고 있었지만, 유전공학, EIS의 평가과정, 그리고 어떻게 민간기업들이 지침에 따르도록 만들 것인지의 문제 등에 대한 우려들도 표출되었다. 그러나 EIS에 대한 의견서들에서 제기된 이러한 많은 쟁점들은 문제를 기술적인 성격의 것으로 정의하는 NIH의 틀 구조 속에서는 마땅한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우려들은 말많은 소수파들이 지닌 우려로 치부되면서 10여 년 후가 되어서야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하게 되었다.
NIH가 규제지침에 대해 의견을 제출해 주도록 공개적으로 요청한 시점으로부터 4개월 후에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시는 P-3에 해당하는 DNA 재조합 연구에 대한 일시중지를 자체적으로 선언했다. 다른 지역사회들은 주와 지역 시 정부 차원의 행동이 확산되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자] 한때 생물학적 및 물리적 봉쇄의 기준이 효과적인 것인지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했던 과학자들은 이제 NIH의 규제지침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발빠르게 입장을 전환하였다. 유전학 연구와 관련된 지역사회 차원의 행동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로,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이 더욱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 것 ― 즉, 과학 연구에 관한 의사결정에 대중이 개입하게 되는 사태 ― 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간의 기술적 의견불일치를 옆으로 제쳐두게 되었다. 둘째로, DNA 재조합을 규제하는 지역과 주 차원의 조례가 통과되면서 규제가 현실화되자, 연방 입법에 대한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않았던 과학자들이 이제는 [모든 지역에서] 일관된 정책 시행을 바라면서 연방 의회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케임브리지 시가 취한 행동은 그것이 지니는 상징적인 가치 하나만 갖고 보더라도 지역 시민의 입장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취임에 분명했다. 케임브리지 시에서 DNA 재조합 연구가 대중적인 쟁점이 된 것은 하버드대학교가 낡은 실험실 하나를 개조해서 P-3에 해당하는 DNA 재조합 연구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계획을 다룬 지역 신문들의 보도가 케임브리지 시장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그는 시 의회차원의 청문회를 소집했다. 그 지역의 과학자들로부터 이틀간에 걸쳐 판단의 근거로 삼을 상반되는 증언들을 들은 후, 시 의회는 투표를 통해 NIH가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는 단계(P-3)로 분류한 모든 연구를 일시적으로 중지하도록 결정했다. 시 의회는 또한 이 문제를 연구해서 시에 조언을 제공할 심사위원회의 설치를 요청했다.
시 행정담당관은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패널을 구성하는 쪽을 택했고, 이 패널은 케임브리지실험심사위원회(Cambridge Experimentation Review Board, CERB)라고 불리게 되었다. CERB는 시 구역 내에 P-3 등급의 DNA 재조합 연구시설을 두는 것이 인간 건강에 어떤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임무를 맡았다. CERB는 5개월간에 걸쳐 과학자들로부터 증언을 들은 후, 실험을 허가하기 전에 NIH 규제지침에 별도의 안전조치를 추가할 것을 권고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여기서의 안전조치는 실험실에 대한 상시적 모니터링과 함께, 변형된 유기체가 임상적으로 쓰이는 항생제에 대해 저항성을 갖는지 여부를 지속적으로 반드시 검사할 것, 그리고 유전자 접합 실험에 대해서는 최고 수준의 생물학적 봉쇄를 도입할 것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CERB는 또한 의사결정상의 권위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조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DNA 재조합 연구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가 맡은 책임 영역을 넘어서는 심오한 철학적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전학 연구가 내포하는 사회적·윤리적 함의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 내에서 가능한 한 광범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대화는 과연 모든 지식이 추구할 만한 가치를 갖는 것인지에 관한 쟁점을 다루어야 한다. 또한 지식을 추구하는 어떤 특정한 경로가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소중한 자유들을 침범할 우려는 없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자연적·사회적 생태에 가해질 수 있는 장기적 차원의 위험을 다루는 기술영향평가의 문제도 제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정책 결정을 참여민주주의의 틀 구조 내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국가 전체 차원의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13)
시 의회는 CERB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 지역 내에서 수행되는 모든 DNA 재조합 연구를 규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조례에는 각 기관 내에 있는 생물위험 위원회와 연관을 맺고 있지 않은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시 생물위험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명시하고 있었다.
케임브리지 시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보도되었고, 미국 전역에 걸쳐 유사한 연구위원회가 생겨났다.14) 이 시기까지만 해도 논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연방 차원의 입법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과 주 차원의 행동이 가속화되자, 많은 과학자들은 지역 차원의 의사결정 기구들에서 나오는 [모든 지역에] 일관되지 못한 기준들보다는 연방 차원의 단일한 일련의 규제지침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록펠러대학교의 생물학자인 노턴 진더(Norton Zinder)는 과학자사회가 규제의 필요성에 대해 점차로 느끼고 있던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DNA 재조합 연구에 관해 연방 차원의 규제 입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것에 있어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서로 다른 주와 지역에서 서로 다른 규제지침을 채택하는 지역 차원의 선택이 확산되면, 관련된 과학자들 사이에는 혼돈과 혼란의 상황이 초래될 뿐이며 이는 궁극에 가서는 위선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손을 써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15)
일단 연방 차원의 입법이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부각되자, 과학자들과 대학 관료들은 그러한 입법의 결과가 연구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나타나도록 조직적인 노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월터 길버트(Walter Gilbert)는 의회에 보낸 공개 서한에서 1977년 열린 핵산에 관한 고든 회의에 참석했던 과학자들의 관점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DNA 재조합 연구의 결과 나타날 것으로 우리가 예견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혜택 ― 실용적인 차원과 기초학문적 차원 모두에서 ― 이 자유로운 연구를 질식시키는 입법과 규제 때문에 아예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규제 입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나라 전체에 걸쳐 일관된 기준을 적용해야 하며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만들어져야 한다.
여기서 표출된 길버트의 이중적 태도는 과학자사회 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보면 연방 차원의 입법은 과학의 관료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과학자들은 이로 인해 궁극적으로 미국이 생물의학 연구에서 점하고 있는 주도적 지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연방 차원의 입법이 없이는 DNA 재조합 연구에 대한 규제가 마치 조각천을 모아 짠 넝마 이불과 같은 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NIH에 권력을 집중시켜 지역 정부들이 독자적인 규제 조항을 둘 수 없도록 하는 약한 형태의 연방 입법이 통과되기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출전: Sheldon Krimsky, "Regulating Recombinant DNA Research and Its Applications," Dorothy Nelkin (ed.), Controversy: Politics of Technical Decisions, 3rd ed. (London: Sage, 1992), pp. 219-248. (번역: 김명진)
1) Science 185 (July 26, 1974), p. 303.
2) DNA 재조합 분자 자문위원회(RAC)의 설치는 1974년 10월 7일에 보건교육복지성 장관으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그 승인 결과는 Federal Register 39 (November 6, 1974), p. 39306에 나와 있다.
3) DNA Recombinant Molecule Research, report prepared for the Subcommittee on Science, Research and Technology of the Committee on Science and Technology (Washington, DC: Government Printing Office, December 1976), Appendix 5, p. 101.
4)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Recombinant DNA Research 1 (HEW Pub. No.[NIH] 76-1138: August 1976), p.iii.
5) {사이언스} 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번 청문회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새로운 연구기법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놓고 과학자사회 내에서 개발된 이론적 근거와 절차들에 대해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다." Science 191 (February 27, 1976), p. 834.
6)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Guidelines for Research Involving Recombinant DNA Molecules (June 1976), p. 52.
7) 니콜라스 웨이드가 RAC의 임무에 대해 {사이언스} 지에 쓴 기사에 따르면, "투표권을 가진 15명의 성원 가운데 의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현재 활동중인 생물학 연구자들로, 가까운 미래에 DNA 재조합 기법의 이용을 바라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며, 적어도 3명의 성원들은 . . . 아실로마 회의에서 허용되었던 제한된 유형의 DNA 재조합 실험에 이미 개인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Science 190 (December 19, 1975), p. 1176. 또한 다음도 보라: Francine R. Simring, "Folio of Folly: NIH Guidelines for Recombinant DNA Research," Man and Medicine 2 (1977) of the Journal of the Columbia University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그리고 "The Double Helix of Self-Interest," The Sciences 17 (May/June 1977), pp. 10-23, 27.
8)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Decision of the Director (June 23, 1976), pp. 1, 6.
9) Ibid., p. 9.
10) Ibid., p. 11.
11) DNA 재조합 연구에 대한 NIH 규제지침을 최초로 어긴 두 가지 사례는 대학 부설기관에서 일어났다. 캘리포니아대학교(샌프란시스코에 있는)에서는 생화학 및 생물물리학과 소속의 한 연구자가 NIH의 인가를 받기 전에 실험에서 벡터를 사용했다. 이에 관해서는 "Recombinant DNA: NIH Rules Broken in Insulin Gene Project," Science 197 (September 30, 1977), p. 1342를 보라. 그리고 {보스턴 글로브} 1978년 3월 26일자에 보도된 두번째 사례에서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한 연구자가 자신의 실험실에 대한 NIH의 공식 승인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DNA 재조합 실험을 하고 있었다.
12) EIS에 보내진 의견서들은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Environmental Impact Statements on NIH Guidelines for Research Involving Recombinant DNA Molecules, Part 2 (October 1976), Appendix K에 수록되어 있다.
13) Cambridge Experimentation Review Board, Guidelines for the Use of Recombinant DNA Molecule Technology in the City of Cambridge, submitted to the City Manager, January 5, 1977. 케임브리지 시민 보고서의 축약본으로는 "The Cambridge Experimentation Review Board,"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33 (May 1977), pp. 23-27을 보라.
14) DNA 재조합 연구와 연관된 지역 차원의 행동을 다룬 기사들은 {사이언스} 지의 다음 호들에 실려 있다: 191 (February 27, 1976); 193 (July 23, 1976); 194 (November 12, 1976); 195 (February 11, 1977).
15) Research and Recombinant DNA, An Academy Forum, March 7-9, 1977 (Washington, DC: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977), p.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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